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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희정의 더 페이보릿] 이토록 웃기고 이토록 인간적인 - 장유정 감독

영화 <정직한 후보>를 만든 장유정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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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릭터와 배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 장유정이 말했다. 그건 아마도 진부하거나 틀에 갇혀있지 않은 여성 캐릭터가 배우들에게 가닿았기 때문이 아닐까.(2020. 08. 13)

장유정 감독

장유정 감독(이하 장유정)은 한국영화계에서 좀 특별한 위치에 있다. 스타 뮤지컬 감독으로 <김종욱 찾기>와 <형제는 용감했다>와 같은 자신의 흥행작을 영화로 옮겼다는 점도 그렇지만, 중간 규모의 코미디를 만들어 상업적으로 계속 성공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주목할 만하다. 

그는 “작품을 통해 하고 싶은 바”를 고수하면서도, 주어진 조건 안에서 최선을 뽑아내고, 제작 예산과 프로덕션 스케줄을 맞추며, 작품의 대중성을 확보하기 위해선 언제나 열린 태도를 취하는 편이다. 현장에서 발휘하는 즉흥성과 유연함을 엿볼 수 있는 에피소드들을 들으며, 그가 어떻게 큰 영화와 작은 영화로 양극화된 한국영화 시장에서 자신만의 자리를 만들어 올 수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작품의 개성 역시 독보적이다. 그야말로 드물고, 따라서 소중하다.


영화 <김종욱 찾기>에서 임수정 배우

새롭고 다양한 캐릭터와 배우들의 힘

나는 장유정의 영화를 좋아한다. 특히 돋보이는 건 생동감 있는 캐릭터와 마치 자기 자신인 것처럼 그 캐릭터들을 잘 살리는 배우들이다.

“<김종욱 찾기>(2010)의 임수정, <부라더>(2017)의 이하늬, <정직한 후보>(2019)의 라미란. 세 배우가 캐스팅 제안을 받고 출연을 결정하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다 합해도 일주일이 안 된다.” 

캐릭터와 배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 장유정이 말했다. 그건 아마도 진부하거나 틀에 갇혀있지 않은 여성 캐릭터가 배우들에게 가닿았기 때문이 아닐까.

“내 작품에서 여자들이 대상화되지 않는 건 사실이다. 이미 만들어진 틀 안에서 여성 인물을 변주하는 게 아니라, 캐릭터에 생명을 불어넣으려고 노력한다. 여자건 남자건, 사람은 복잡한 존재다. 하지만 많은 대중영화들이 그런 복잡성을 다루기보단 스테레오타입에 의존한다. 관객이 지루할 수밖에 없다.”

<김종욱 찾기>의 서지우(임수정 분) 역시 전형적이지 않은 인물이다. 실패가 두려워 관계로부터 늘 도망 다니던 서지우가 허당기 있는 한기준(공유 분)과 함께 첫사랑 ‘김종욱’을 찾아다니면서 성장을 하고, 마침내 진정한 사랑을 만난다는 영화의 얼개는 로맨틱 코미디의 관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영화를 특별하게 만드는 건 캐릭터의 성격을 결정하는 디테일이다. 무엇보다 서지우는 한국영화에서 찾아보기 힘든 ‘일하는 여자’였다. 뮤지컬 무대감독인 그는 직장에서 연애를 하지 않는다. 일을 한다. (한국 대중문화에서 이 얼마나 드문 상황인가!)

“무대감독은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판타지와 (무대 밖에서 현장을 진행해야만 하는) 현실의 가장자리, 그 경계에 놓여 있는 사람이다. 첫사랑의 환상과 현실, 과거와 현재 사이에 있는 서지우를 보여주는 설정이었다. 한편으로, 무대감독은 기술직이면서 위험한 직종이기도 하다. 서지우는 옷부터 행동까지, 그 일의 성격에 맞게 움직이는 사람이다. 그건 ‘남성적’이냐 ‘여성적’이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 현실감을 살리기 위해 임수정 배우가 많이 노력했다. 정말 프로페셔널했다.”


영화 <부라더>에서 이하늬 배우

스스로 “배우 복이 좋다”고 평가하는 장유정은 <부라더>의 오로라 역을 근사하게 소화했던 이하늬에 대해서도 “어떤 것도 해낼 준비가 된, 훌륭한 배우”라고 말했다. “그 사람의 그릇에 비해 맡는 배역들이 한정적인 것은 아닌가 라는 고민이 있었다.” 오로라는 확실히 관객들에게 이하늬의 영화배우로서의 가능성을 분명하게 각인시킨 캐릭터였다.

화려한 양산을 들고 안동 바닥을 누비는 오보라는 사실 종갓집 맏며느리로서 가부장제 문화의 최전선에서 어려운 시절을 살았던 순례(성병숙 분)의 유령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다 잊고 세상을 떠돌고 있는 오로라는 두 아들 석봉(마동석 분)과 주봉(이동휘 분)에게 깨달음을 주는 존재다. 동시에 그는 순례가 그저 어머니이자 며느리였던 것만은 아니었음을, 아버지 춘배(전무송 분)와 애틋한 사랑을 나누며 하루하루 충실하게 살았던 연인이기도 했음을 보여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부라더>는 각각의 캐릭터가 품고 있는 비밀과 역사를 서서히 드러내면서 각자의 사정에 귀를 기울인다. 그리고 ‘안동 종가’로 대변되는 가부장제 질서를 뒤집고 조금씩 개량해나간다. 


영화 <정직한 후보> 촬영 현장에서 장유정 감독

여자가 ‘진실의 주둥이’를 가질 때

그리고 2020년, <정직한 후보>가 개봉했다.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3선 의원 주상숙(라미란 분)이 “진실의 주둥이”를 얻게 되면서 벌어지는 해프닝을 따라가는 정치 풍자 코미디다. 스크린 위 라미란은 날개를 단 듯 했다. 하지만 처음 기획될 때 영화는 동명의 브라질 원작 영화와 마찬가지로 남성 정치인의 이야기였다.

“남자를 주인공으로 시나리오를 쓰는데 잘 안 풀렸다. 주인공이 너무 나쁘고 미웠다. 갑을 관계가 전복되어야 재미있는 건데, 언제나 갑인 한국의 남성 국회의원이 도대체 어디서 을이 될 수 있을지 답이 안 나왔다. 아내 앞에서 벌벌 기던 남자가 거짓말을 못하게 되자 갑자기 아내를 함부로 대한다? 생각만 해도 너무 싫었다.”

고민하던 중 “라미란 배우라면 어떨까” 싶었다. 얄밉지만 사랑스럽고, 사기를 치고 있어도 내면의 진정성이 엿보이는 캐릭터. 이런 이중성을 살려내기에 라미란만 한 배우가 없겠다 싶었다. 그가 “오케이” 하자마자 열흘 만에 시나리오를 싹 고쳤다.


영화 <정직한 후보>에서 나문희, 라미란 배우

“영화 홍보할 때 ‘여성 정치인’이라는 호칭은 빼자고 했다. 정치인이면 정치인이지 ‘여성’으로 구분할 필요는 없다. 얼마 전 화제가 되었던 류호정 의원의 경우도 그렇다. 옷차림이 TPO에 맞지 않다면 그걸 비판하면 된다. 성차별적인 비난을 할 필요는 없는 거다. 물론 여성의 특수성은 세밀하게 다뤘다. 예컨대 남자에겐 시어머니가 없지만 여자에겐 있다, 정치를 하는 남성은 화장을 안 해도 되지만, 여성이 화장을 전혀 안 하기는 쉽지 않다.”

‘남성 정치인’은 ‘정치인’이지만, ‘여성 정치인’은 자꾸만 ‘여성’으로 환원시켜버리는 편견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이 ‘을’로서 경험하는 어려움을 풍자의 대상으로 삼은 셈이다.

“신경을 쓴 건 헤어스타일과 ‘가발’이었다. 여성 정치인들 헤어스타일이 대체로 주상숙의 가발과 같다. 심상정이냐 나경원이냐 질문을 많이 받았는데, 힐러리 클린턴 스타일이다. (웃음) 여성 정치인의 긴 머리는 쉽게 ‘여성성’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정치인으로서 마이너스가 된다. 긴 머리는 주상숙의 욕망을 보여준다. 그래서 집에서는 긴 머리를 늘어트리고 있지만, 일할 때는 가발을 쓰는 거다. 이는 한편으로 정치인으로서 표리부동한 주상숙의 모습을 상징한다.”

덕분에 ‘가발’은 <정직한 후보>의 메시지 중 하나를 강조하는 장치로도 활용된다. 영화의 마지막, 주상숙을 누르고 국회의원에 당선된 정치 신인 신지선(조수향 분)의 인터뷰 장면에서, 신지선 역시 주상숙의 가발을 그대로 쓰고 등장한다.


영화 <정직한 후보> 촬영 현장에서 장유정 감독

어떤 조연도 도구는 아니다

코미디란 조금만 오버하면 촌스러워지고, 그렇다고 점잔을 빼면 남는 것이 없는 장르다. 약자를 비하하면서 웃기는 작품도 많지만, 이는 곧 불쾌한 감정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여러 함정들이 코미디 앞에 놓여 있다. 그래서 코미디야말로 어려운 장르다. 장유정의 코미디는 적절하고 또 세련됐다. 그건 확실히 누구도 타자화하거나 소외시키지 않는 장유정식 캐릭터의 힘 덕분이다. 그는 갑과 을의 자리, 현재와 과거, 현실과 판타지, 진성성과 기만 등 경계 위에 존재하는 인물의 딜레마와 아이러니를 통해 웃음과 눈물을 만들어낸다.

“내 작품은 하나의 큰 줄기만을 따라가는 스타일이 아니라 수많은 서브플롯들로 이뤄져 있다. 작은 성냥개비로 쌓아올린 탑과 같다.” 

그 작은 성냥개비 하나하나에 캐릭터를 살려내는 디테일이 숨어 있다. 그는 “주연이냐 조연이냐 따라 작품 속에서 가지는 무게감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도 어떤 인물도 도구로만 소비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고 덧붙였다. 그의 영화에서 주연뿐 아니라 조연 역시 빛나는 이유다. 이 태도가 실패 없이 인간적인 코미디를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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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손희정(문화평론가)

페미니스트 크리틱. 논문 〈21세기 한국영화와 네이션〉으로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다시, 쓰는, 세계》《페미니즘 리부트》와 《성평등》을 썼고, 《을들의 당나귀 귀》와 《그런 남자는 없다》를 책임 편집했다. 함께 쓴 책으로는 《대한민국 넷페미史》, 《페미니스트 모먼트》, 《그럼에도 페미니즘》, 《소녀들》, 《지금 여기의 페미니즘X민주주의》, 《누가 여성을 죽이는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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