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질 특집] 박지리, 일곱 권의 책으로 세상에 남은 낯선 이름의 천재 – 사계절 김태희
저는 박지리가 청소년소설을 쓴 작가라는 걸 늘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동시에 어떤 성인소설 작가들보다 훨씬 더 뛰어난 문학 작가라고 단언해요.
글ㆍ사진 정다운, 문일완
2020.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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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리. 혀끝에서 아무리 굴려봐도 낯선 이름인 이 작가는 아쉽게도 세상에 부재중이다. 2010년 『합체』로 데뷔한 후, 『맨홀』『양춘단 대학 탐방기』『세븐틴 세븐틴』『다윈 영의 악의 기원』『3차 면접에서 돌발 행동을 보인 MAN에 관하여』, 『번외』까지 총 7권의 책을 쓰고 홀연히 세상과 이별했다. 박지리가 작가로서 세상에 남긴 짧은 알리바이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건 그의 책 모두를 세상에 내놓은 사계절과 김태희 팀장일 것이다. “진지한 문제의식, 비교 대상을 찾을 수 없는 독보적인 작법으로 우리 사회에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한국 문단의 영원한 기린아, 라고 할까요.” 

튀는 제목만큼이나 작품에 담긴 세계관도 독특할 것 같은 작가를 한 줄로 요약해달라고 청했을 때 김태희 팀장이 던진 답변이다. ‘덕질’이 한 대상의 모든 것을 알고 싶은 활동의 전모라면, 박지리 작가와 김태희 팀장의 관계는 딱 들어맞는 레고 조합 같은 느낌이다.  


첫 만남을 묻지 않을 수 없네요. 

데뷔작인 『합체』로 8회 사계절문학상을 받았어요. ‘이리지’라는 필명과 ‘합체’라는 낯선 제목의 조합, 감히(?) 조세희 선생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과감하게 인용한 신인이면서 결코 가볍지 않은 글솜씨에 심사위원과 편집자 모두 정체를 궁금해했습니다. 2010년 3월 초에 처음 만났는데 스물다섯 앳된 얼굴의 대학을 갓 졸업한 친구였어요. 작가의 말을 그대로 옮기면 “졸업하고 몸이 안 좋아 집에서 쉬는데 심심해서 글이나 써볼까 하는 생각에 제일 먼저 떠오른 단어 ‘합체’를 종이에 적고 그걸로 글을 써서 상을 받았다!” 작가 수업을 받은 적도 없고, 비문학 전공자라 어느 기자가 다음 작품의 시놉시스를 물었을 때 ‘시놉시스’가 무슨 뜻인지 물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박지리 작가에 대한 ‘덕질’의 시작은 어땠나요? 

박지리 작가는 사적인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어요. 잘 만나주지도 않고, 연락도 안 되고. 그런데도 이상하게 끌리는 사람이 있잖아요. 『합체』 때만 해도 ‘이 사람 봐라? 신기하네. 잘되면 좋겠다.’ 응원하는 마음이었다면 두 번째 작품 『맨홀』부터 말 그대로 ‘덕질’ 수준이 됐어요. 작가든 평론가든 만화가든 교사든 만나는 사람마다 박지리 이야기를 했던 것 같아요. 


『합체』. 심심해서 썼다는 이 데뷔작으로 사계절문학상을 받았다.
'박지리 월드'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잇는 『맨홀』.

낯선 이름 ‘박지리’를 세상에 알리는 노력이 엄청나다고 들었습니다. 

『양춘단 대학 탐방기』는 작가의 첫 성인소설인데 사계절이 문학판에서는 생소한 터라 추천사 받는 일도 쉽지 않았어요. 그래서 뒤표지 글을 익명의 평론가 스타일로 정성껏 쓰고, 기자들에게 보도자료와 함께 손편지를 넣어 보냈어요. 이 작가를 눈여겨봐달라고! 결정적으로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이 뮤지컬로 올라가면서 많은 것이 바뀌었어요. ‘뮤알못’인 제게 ‘연뮤덕’ 용어는 새로운 외국어였지만, 그분들의 열정과 애정으로 새 삶을 찾은 셈이죠. 현재 『맨홀』은 영화제작 계약을,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은 웹툰을 논의 중이에요. 

박지리 작가를 떠올리기 최적인 문장을 소개해주실 수 있나요? 

‘분명 모두의 마음속에 존재하는데, 아무도 서로의 내면에 그런 인간이 존재하는지를 모르는 인간. 자신의 모습이 흐릿해질 밤이 오길 기대하는 인간, 거울을 보면서 그 안의 인간에게 질문하고 대답을 기다리는 인간, 죽음에서는 삶을, 삶에서는 죽음을 느끼는 인간. 모두의 인간이면서 오직 나 하나만의 인간…’ (『다윈 영의 악의 기원』, 658쪽) 

일곱 권 모두 애정이 깊겠지만, 굳이 추천서를 고른다면요. 

딱 하나만 골라야 한다면 ‘박지리 월드’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맨홀』, 독자들에겐 박지리 작가의 모든 것이 담겨 있고 『맨홀』의 확장판이라고 볼 수 있는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을 권해 드려요. 


『맨홀』의 확장판이자 작가의 존재를 확장해준 『다윈 영의 악의 기원』욜로욜로판.
뮤지컬배우들의 목소리를 직접 담은 QR코드도 숨어 있다.


박지리 작가의 작품은 사계절 1318문고, 욜로욜로 시리즈에 공통 유닛처럼 들어 있는 경우가 보입니다. 작가에 대한 사계절의 애정이랄까, 배려는 어떤 믿음에서 출발하는 걸까요? 

사실 분야를 나누는 것 자체가 우습지만 좋은 청소년소설은 좋은 문학작품이라는 걸 박지리 작가를 통해 증명하고 싶었어요. 청소년소설을 처음 시작한 출판사로서 일반 독자들이 갖고 있는 청소년소설에 대한 편견을 깨고 싶었거든요. 저는 박지리가 청소년소설을 쓴 작가라는 걸 늘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동시에 어떤 성인소설 작가들보다 훨씬 더 뛰어난 문학 작가라고 단언해요. 

최고 덕후가 제안하는 ‘박지리 독서법’이 있을까요? 

일단 짧고 가볍게 『세븐틴 세븐틴』이라는 단편으로 시작합니다. 내 취향에 부합한다면 『번외』『3차 면접에서 돌발 행동을 보인 MAN에 관하여』, 그래도 작가와 작품이 좋다면 『맨홀』을 읽습니다. 그런 다음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을 읽습니다. 


"박지리 작가의 작품은 딱 일곱 편이지만 이 작품들 모두가 시대를 초월해 널리 읽히는 고전으로서의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사적인 독서로서도, 사회적인 책읽기로서도."

박지리 작가는 이제 세상에 없습니다. 작가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을까요? 

워낙 조용한 사람이라 평소엔 세상에 없다는 생각을 잘 못 해요. 다만 부조리한 어떤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박지리 작가라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글을 써냈을까 궁금해지곤 해요. 이제 더는 박지리 작가의 신작을 볼 수 없어 아쉽지만, 늘 함께하는 마음으로 응원하고 싶습니다. 저희가 하는 모든 일이 박지리 작가가 원하는 일이었으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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