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희 칼럼] 영화 재번역과 고대 유물 발굴
클래식을 재번역할 땐 고대 유물을 발굴하는 기분이 든다. 대사 하나하나 바스러질까 조심히 발굴해서 이리 살펴보고 저리 살펴보고 또 조심히 내려놓고.
글ㆍ사진 황석희(영화번역가)
2020.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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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제작사에서 영화 <마지막 황제>를 출시하게 됐다며 재번역을 의뢰한 적이 있다. 좋아하는 작품이라 냉큼 수락했는데 작업 기간 내내 의뢰를 수락한 과거의 나를 분 단위로 갈굴 정도로 번역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

우선 1987년 작품이라 대본의 상태가 이집트 파피루스 수준이었다. PDF로 받았지만 그 옛날 대본을 스캔한 것이어서 글자가 다 뭉개져 있고 일부는 글자의 윗부분이나 아랫부분만 보였다. 이게 무슨 고대 문자를 해독하는 작업도 아니고… 인터넷에서 어찌어찌 구한 영어 자막은 또 그 나름대로 상태가 안 좋았다. 더 황당한 것은 정식 대본에 있는 고유명사가 틀려서 도대체 뭘 가리키는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었다.

가령 대신들이 어린 푸이에게 자금성의 각 건물 이름을 가르칠 때 ‘the Gate of Marshovala’라는 문을 언급하는데 자금성 지도를 아무리 뒤져도 그런 이름의 문은 없었다. 혹시나 선통제 시절의 자금성은 지금과 다를까 싶어 그 시절 지도까지 구해 봤으나 역시나 그런 괴상한 이름의 문은 없었다. 심지어 최후의 보루라고 여겼던 어느 중국어 교수님도 모르겠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결국은 중국 웹을 뒤지기 시작했다. 중국어는커녕 내 이름도 한자로 헤매는 인간이 중국 웹을 뒤지려니 인터넷을 처음 할 때 버벅대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간신히 구글 웹 번역기의 힘을 빌려 <마지막 황제>의 대사를 언급하고 있는 글 타래를 두어 개 찾았다. 그 중국인들도 ‘the Gate of Marshovala’라는 곳이 대체 어디인지 모르겠다며 추리 중이었다. 그중 한 댓글에 눈이 번쩍 뜨였다. 혹시 무(武)를 뜻하는 ‘martial’을 변형해서 쓰려던 게 아닐까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길로 자금성의 문 중에 무(武)가 들어가는 문을 뒤지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무(武)가 들어가는 문은 단 하나였다. 자금성의 북문인 신무문(神武門). 문의 위치를 확인하고 영상을 다시 보니 영상에서도 대신들이 신무문의 위치에 있는 건물 모형을 가리키는 게 보였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과 마크 피플이 공동 집필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나한테 왜 그러셨어요, 두 분. 

‘신무문’ 세 글자를 찾으려고 꼬박 하루를 썼다. 그럴 수밖에 없던 것이 <마지막 황제>의 기존 번역은 오역이 많기로 유명해서 블루레이 제작사에서 그대로 출시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하고 재번역을 의뢰한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막 하나하나에 신경이 더 쓰였다. 틀린 것들을 최대한 바로잡는 작업에서 또 실수를 잔뜩 저지를 거라면 내 작업은 의미도, 가치도 없는 것이고 굳이 날 지목해 의뢰한 클라이언트의 기대를 배신하는 일이 될 테니까.

이런 기회는 아주 드물지만 클래식을 재번역할 땐 고대 유물을 발굴하는 기분이 든다. 대사 하나하나 바스러질까 조심히 발굴해서 이리 살펴보고 저리 살펴보고 또 조심히 내려놓고. 최근에 재번역한 영화 <지옥의 묵시록>도 그런 케이스다. 마찬가지로 오역이 많기로 유명하고 클래식이라 영화를 깊게 보는 팬이 많은 작품. 이렇게 부담스러운 작업도 없다.

<마지막 황제>나 <지옥의 묵시록> 같은 클래식에 오역이 많다고는 했지만 선배 번역가들의 실력을 무시하거나 낮잡아보는 것은 아니다. 그 시절의 번역 환경이 얼마나 열악했는지 알기에 차마 선배들의 잘못이 크다고 말하긴 어렵다. 인터넷이라는 전능한 무기와 여러 인적 네트워크로 무장한 나는 그분들에 비하면 반칙 수준의 환경에서 번역을 하는 셈이다. 내가 그 시절에 번역했더라면 그분들보다 못해도 서너 배는 많은 실수를 했을 거다. 부끄럽지만 솔직히 말해 실수가 문제가 아니라 인터넷 없이 번역 자체가 가능할지도 미지수다.

클래식들을 재번역하면서 느끼지만 클래식을 재개봉할 땐 최대한 재번역 작업을 거치면 좋겠다. 대부분이 재번역을 거치지 않고 기존 번역을 영화사 내부에서 감수하거나 기존 자막을 그대로 상영한다. 물론 사정은 있다. 비용 문제도 있고 해외 스튜디오에서 재번역을 허락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부디 스튜디오를 설득해서라도 재번역하려는 노력을 기울여 줬으면 좋겠다.

출판계엔 몇 년 전부터 세계문학전집을 시대에 맞게 재번역하는 움직임이 있다. 클래식 영화들도 그런 대접을 받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예전과 달리 대사들을 더 깊고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수단들이 있는 시대다. 물론 그런 수단을 사용한다고 완벽한 번역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지막 황제>나 <지옥의 묵시록> 새 번역도 분명 어딘가에서 흠이 발견될 것이고 아주 부끄러운 실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더 나은 번역을 할 수 있는 수단들이 존재하는 시대에 흠결이 있던 과거의 결과물을 나태하게 그대로 내놓는 건 관객에게도, 그 작품에도 큰 무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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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재번역 #고대 유물 #발굴 #클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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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희(영화번역가)

번역가이자 남편, 아빠이다 2005년부터 번역을 시작하여 주로 영화를 번역하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보헤미안 랩소디>, <캐롤>, <데드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