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무도한 범죄 소식을 들었을 때, 착한 일을 했다고 여길 때, 내 기준에 어긋나는 누군가를 만났을 때 우리는 만족감을 느낀다. ‘나 정도면 괜찮은 사람’이라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며 점점 더 커지는 ‘괜찮은 나’. 우리는 정말 괜찮은 걸까?
소문난 글쟁이이자 ‘<중앙일보>의 송곳’이라 불리는 권석천. 그는 ‘인간의 비극은 자신을 믿기 시작할 때 출발한다’며 ‘나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의심하기를 권한다. 사람의 가치가 떨어지는 시대에 ‘사람에 대한 예의’를 말하는 그에게 ‘예의’는 불편함과 편함의 접점을 찾는 일. JTBC 보도총괄이 되고 한 달 뒤, 새 책 『사람에 대한 예의』를 펴낸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는 숨을 쉬듯 누군가를 손가락질하지만 당신과 나 역시 한 발만 잘못 디뎠어도 다른 삶을 살게 됐을 것이다. 당신과 나는 우리가 살았을 삶을 대신 살고 있는 자들을 비웃으며 살고 있다. '나도 별수 없다'는 깨달음. 인간을 추락시키는 절망도, 인간을 구원하는 희망도 그 부근에 있다. 스스로를 믿지 않기를. (16쪽)
행성 주변을 도는 ‘위성’ 같은 사람
JTBC 보도총괄로 부임하고 한 달여 만에 책이 나왔어요. 어떻게 지내나요?
생활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지난 5월 초에 인사가 났고 <중앙일보>에서 다시 JTBC로 가게 됐어요. 혼자 생각하고 글 쓰는 일을 하는 사람이 논설위원이라면 보도총괄은 사람을 많이 만나야 하는 일이거든요. 회의도 많고요. 그래서 요즘 안 쓰던 근육을 쓰고 있습니다. 말하는 근육, 가까운 사람들의 말을 듣는 근육이요.
보도총괄직을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고요. '글 쓰는 삶을 살고 싶다'고 했는데 <중앙일보> 논설위원이 글 쓰는 삶과 더 어울리지 않나 싶은데요.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고,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하고 싶었기 때문에 오래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람에 대한 예의』를 쓰면서 지금까지 써온 글과 다른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강해졌어요. 신문이 아닌 다른 플랫폼에서도 그게 가능하겠다고 생각했고요. 신문 칼럼은 주로 '~해야 한다' 또는 '~해서는 안 된다'라는 이야기를 2,000자 내에서 하는 글이잖아요. 물론 이런 글이 필요하고 앞으로 칼럼을 안 쓰겠다는 건 아니지만, 굳이 환경을 제한할 필요는 없겠다고 판단했죠.
내부의 분위기에 반하는 글을 많이 써왔는데 불편하거나 걱정되는 건 없었나요?
반대되는 글은 아닌 것 같아요. 다른 글이었죠. 걱정이라기보다 마음의 불편함이 있는 건 사실이에요. 그런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글 쓰는 사람이라면 모두 이런 불편함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해요. 다른 이야기를 해야 하잖아요. 누구나 하는 생각을 쓰는 건 의미가 없죠. 그러면 긴장감, 불편함이 생길 수밖에 없지 않나요? 함께 일하는 사람이나 외부와의 긴장감, 불편함이 투영된 글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고요. 문제는 그 불편함을 어느 정도까지 밀어붙이느냐인데 '어쩔 수 없다'라는 생각이 들 때 선을 넘게 되잖아요. 글 쓸 때도 마찬가지예요. 선을 넘지 않으면 글의 의미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면 넘고, 불편해지는 거죠.
'<중앙일보>의 송곳'이라는 수식어가 있죠. 들으면 느낌이 어떤가요?
면구스럽죠. 주머니를 찢고 나오는 게 송곳인데 '과연 내가 그렇게 살았나'하고 생각해 보면 가깝지 않은 것 같아요. 그동안 제가 살아온 걸 돌이켜 보면 후배들과 같이 고민하고 비판하면서도 회사 앞에 서면 조금 달라지는 박쥐 같은 선배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들고요. 물론 마음속에는 송곳 같은 게 있겠죠. 삐죽삐죽해서 부딪히는 것들이 분명히 있었던 것 같은데.... 어떻게 보면 칼을 밖으로 꺼내기보다 안에서 꺼낸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중심에 있으면서 주변에서 눈을 떼지 않는 사람처럼 느껴져요. 주변을 보게 하는 동력이 뭔가요?
주변인이라는 의식이 있기 때문이겠죠. 동력이라기보다 상처가 아닐까 싶은데요. (웃음) 초등학교 때 네 번 전학을 다니면서 아주 약한 정도의 따돌림을 받았는데 이런 경험이 중심이 아닌 주변에 서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한 것 같아요. 중심이 되어서 무언가를 이끌겠다기보다 조금 떨어져서 잘하는지 지켜보자 생각했고, 그래서 기자를 하게 된 거 같아요.
실제로 ‘주류와의 거리를 의식하면서 살아왔다고’도 하셨죠. 의아했어요.
그렇게 물어보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요. '좋은 대학 나와서 좋은 직장에 다니는 사람이 왜 주류와 거리를 두느냐?'라는 의미가 담겨 있겠죠. 옳은 지적입니다만 대학 때부터 줄곧 중심에 있지 않다는 생각을 해왔어요. 대학 때 전공이 적성에 맞지 않아서 다른 과 강의실을 서성이곤 했거든요. 친구들이 형법 이야기를 하면 섞이지 못하고 혼자 '저 대화에는 무슨 뜻이 있을까?', '어떤 가치가 있을까'라고 생각하기도 했고요. 심적인 거리가 있었죠. 경력 기자로 회사를 옮기고 난 뒤에도 마찬가지였고요. 위성 같다고 할까요. 행성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진 별똥별은 아니지만, 행성 주변을 맴도는 위성이요. 그래서 조금 떨어져서 보게 된 것 같아요.
위성치고는 존재감이 큰 것 같은데요. (웃음) 지금은 의심할 여지 없이 중심에 서게 되셨고요.
그렇죠. 현재는 많이 달라졌죠. 어떤 조직에서 중심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서….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운명 같은 느낌이 있어요. 보도국장이나 보도총괄이 된 것 모두 예상하지 않았던 일이거든요.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지만, 자신을 잃지 않으면서 잘 해내고 싶습니다. 위성도 존재감은 있으니까요. (웃음)
예의는 불편함과 편함의 접점을 찾는 일
자신을 의심하는 태도를 권하고 있어요. 이게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이것도 습관이 될 수 있지 않나 싶은데요. 의심하려는 태도를 의심한다면요?
일단 의심하려는 마음 자체가 하나의 포즈이거나 자기만족을 위한 장치 아니냐고 묻는 것 같아서 의미심장하고요. 자신을 의심하는 노력이 어떤 결과로 이어지려면 '나'를 넘어서 '우리'를 의심해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기자 집단일 수 있고, 대한민국에서 잘 사는 사람일 수도 있고, 그냥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일 수도 있죠. 제가 책에서 '악의 낙수효과'를 말했잖아요. 피라미드 맨 꼭대기에 있으면서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좋은 일 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꼭대기에 있는 악이 밑으로 흘러내려서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고통받을 수 있거든요. 자기의 무게 때문에요. 이런 것들을 깨닫고 자신을 의심하면서 바꾸려고 노력한다면 의미 있지 않을까 싶어요.
내가 속한 곳을 기준으로요.
공동체 내에 미세먼지처럼 뭉쳐 있는 것들이 있잖아요. 편견이나 혐오 같은…. 미세해서 보이진 않지만, 결과적으로 그 미세먼지로 인해 진짜 봐야 할 것들을 볼 수 없죠. 이런 미세먼지가 뭔지 깨닫고 바꿔나가면 더 좋은 쪽으로 나아가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요.
이런 노력을 같이할 사람이 있어야 힘이 나는데 그렇지 않을 때가 많잖아요. 혹시 외롭거나 어려워서 힘들 때는 없었나요?
외로울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고요. 예전에 회사 구내식당에서 한 선배를 마주쳤는데요. 그 선배가 제 칼럼에 달린 댓글을 봤다면서 알려주더라고요.
어떤 내용이었나요?
‘권석천은 회사에서 혼밥하고 있을 것 같다’고...(웃음) 그 선배는 저랑 다르게 쓰는 분인데 서로 식판 들고 혼자 먹다가 마주친 상황이었어요. 그 선배가 “나도 혼밥하는데 왜 너만 혼밥한다고 하냐”고 해서 같이 웃었죠.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편이라 외로움을 느끼지는 않았는데요. 다만 제가 하는 일에 대해서 같이 일하는 사람들로부터 구체적인 반응이 왔으면 하는 생각은 있었는데 그런 게 많지는 않았죠. 이번에 책 쓰면서 편집자 덕분에 이런 갈증이 해소됐어요. 편집자의 반응에 따라 글을 많이 고쳤는데 신뢰 관계에 있는 누군가의 반응은 중요한 것 같아요. 구체적으로 바꿀 수 있으니까요.
불편함을 권하는 책이에요. 그런데 인간에게는 편한 걸 선택하려는 관성이 있잖아요. 선택의 상황에서 이런 관성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요?
불편하게 살라는 건 아니고요. 불편한 사람이 되기로 각오하면 오히려 편하게 살 수도 있다는 말이에요. 책에서 어떤 대기업 부장이 한 말을 소개했잖아요. 그 사장의 말대로 자기 캐릭터를 ‘할 말은 하는 사람’으로 잡으면 누구든 쉽게 못 해요. 사장 되고 부사장 되기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까지는 올라갈 수 있죠. 그리고 편하고 싶은 마음은 본능이잖아요. 사람도 동물이니까 본능대로 살려는 욕망이 있죠. 이를테면 ‘밥이냐 원칙이냐’는 문제 앞에서 밥을 선택하는 게 사람일 수밖에 없고 거기에서 완전히 벗어난 사람도 없어요. 그런가 하면 우리는 문명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본능만 따라가지도 않아요. 이 불편함과 편함 사이의 접점을 찾아야 할 것 같아요. 그게 예의일 수 있죠.
인간에 대한 예의요?
그렇죠. 예의를 지키는 일이 편한 게 아니잖아요. 그냥 내키는 대로 하면 자신은 편할 수 있지만, 조금 불편하더라도 예의를 갖추면 서로 편해져요. 지금까지 우리 사회가 이런 가치를 주목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예의에 어긋나는 사람이나 상황을 봤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 편인가요?
누구나 그렇듯이 눈살을 찌푸리면서 ‘저 사람은 왜 저렇게 행동할까?’하고 생각하죠. 다른 사람들이 나서지 않으면 나라도 그러지 말라고 이야기해야 하는 건 아닌가 싶을 때도 있고요. 제가 예의 없게 행동할 때도 물론 있는데요. 일단 누구든 상대를 어른으로 대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서로 어른이라고 생각하고 행동하면서 자기 결과에 책임지고 배려할 건 배려하면 꼰대가 안 되는 거 같아요.
어떤 분은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 후배한테 먼저 밥 먹자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데요. 혹시 이렇게 구체적으로 노력하는 게 있나요?
꼰대가 되지 않으려는 거 자체가 꼰대라고 하던데요? (웃음)
사실 꼰대가 안 되는 건 불가능하지 않나 싶기는 해요. (웃음) 덜 꼰대스러울 수 있겠지만요.
꼰대가 안 될 수 없죠. 그리고 저는 밥 먹자고 하는데요? (웃음) 구체적인 노력이라면 일단 후배들의 사적인 일상에 관심을 표하지 않아요. 윗사람들은 그걸 관심이나 애정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가벼운 호기심이고 간섭이죠. 또 하나는 후배들이 필요를 먼저 이야기할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에요. 그래서 사무실 문을 항상 열어 놓고요.
자신이 하는 일을 모르면 연민에 빠지기 쉬워요
내밀한 이야기들도 많이 실렸어요. ‘아픈 손가락 같은 글’들이라고 했는데 마지막까지 게재 여부를 고민한 게 있나요?
‘어디선가 아버지가 센서 등을 깜빡일 때’라는 제목의 글인데 성장 과정, 아버지와 관계에 관한 이야기라서 마음에 걸렸죠. ‘이런 이야기를 책으로 내는 게 맞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요.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도 글 쓰는 사람의 예의 같아요. 글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고요. 편집자한테 책 뒤쪽에 실어달라고 부탁했는데 1장 맨 끝에 배치했더라고요. (웃음)
독자 입장에서는 그런 글을 읽으면 저자와 조금 더 가까워지는 것 같아요.
읽으면서 본인의 아버지를 떠올렸다는 분들이 있더라고요. 예전에 대법원에 관한 책을 냈을 때는 지인들한테 많이 보내주고 했는데 이 책은 못 보내겠더라고요. 이런 이야기가 어떻게 느껴질까 싶어서요. 원래 아는 사람한테 내밀한 이야기 하는 게 더 어렵잖아요.
법을 전공했지만 시를 좋아했고, 문화부 기자를 꿈꿨지만 법조기자로 일했어요. 지금은 ‘<중앙일보>에서 권석천의 글만 읽는다’라는 말을 듣고요. 공통점이 보이는데 우연인가요?
잘 보신 것 같아요. 우연은 아니고요. 생각했던 삶을 살지 못한 거죠.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내가 뭘 잘하고, 어떤 일을 하고 싶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집과 학교를 왔다 갔다 하면서 살다 대학에 갔고 법을 공부하게 됐는데 내 적성하고는 달랐던 거죠. 그렇게 한 번 겉돌기 시작해서 여기까지 왔고, 이게 운명이 되고 인생이 되었는데 그 과정 자체가 행복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전공이나 친구가 나빠서가 아니라 저랑 안 맞아서 힘들었고, 회사에 들어와서도 문학 담당 기자를 했다든지 하면 인생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있어요.
더 잘했을 것 같다는 말인가요?
잘했을 것 같다는 의미는 아니고요. 달랐을 것 같아요. 인공위성처럼 주변을 맴돌고 있었기 때문에 얻은 것도 있거든요. 좋고 나쁨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완전히 다른 길인 거죠.
이번 책에서 여러 형식의 글을 쓰셨더라고요.
2012년도부터 칼럼 '권석천의 시시각각'을 썼는데 다양하게 써보고 싶었어요. 신문에 실리는 글이 재미없었거든요. 제목만 보고 무슨 내용인지 대충 알면 더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고, 그러면 내 글도 그렇게 읽힐 수 있겠구나 싶었어요. 그렇게 되지 않게 하려면 다르게 써야겠다고 생각했고, 나름대로 절박했어요.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쓸 수 있을까’ 고민했고요. 그래서 이번에 책을 내면서 총 38개의 글을 써서 편집자에게 줬는데 그중에 하나를 빼자고 하더라고요.
어떤 글인가요?
움베르트 에코가 쓴 『프라하의 묘지』라는 두 권짜리 소설을 보면 반 쪽 정도가 한 문장인 글이 있어요. ‘이제 어느 행인이 있어..’로 시작되면서 파리의 뒷골목을 돌아다니는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똑같이 써보고 싶더라고요. 장문의 묘미랄까. 그런 걸 좋아해서 1895년 서울 광화문을 배경으로 썼는데 재미없다고 킬 당했죠. 제가 봐도 재미없는 것 같아요. (웃음)
혹시 최근에 인상 깊게 본 문장이나 글이 있다면요?
‘단어들이 섬광처럼 결론을 내리게 하고 너는 빠져나오라’라는 문장이 생각나요. 도널드 홀이라는 미국 작가가 여든 넘어 쓴 책 『죽는 것보다 늙는 게 걱정인』에 나오는 구절인데요. 글 쓰는 사람이 주의할 점이 아닌가 싶어요. 글 쓰다 보면 자꾸 설명하고 싶어지거든요. 읽는 사람이 모를까 봐. 글이 말하게 하고 자기는 빠져나와야 하는데 멈춰서서 글을 걱정하는 거죠.
기자님의 칼럼을 좋아하는 젊은 언론인이 많아요. 이제 막 언론인이 됐거나 언론인을 꿈꾸는 사람에게 조언한다면요?
언론인은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잖아요. 어떤 일을 다른 사람보다 깊이 파고들어서 '사실은 이런 것이다'라고 보여줘야 하니까 정직해야죠. 그리고 일하는 과정이 투명해야 해요. 소셜미디어가 계속 발전하는 요즘 같은 상황에서는 더 그렇고요. 쉬운 직업은 아니에요. 돈이나 명예가 크게 주어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정말 하고 싶어서 하는 사람이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먼저 자신을 잘 알아야겠죠.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는데 성격 때문에 언론인이 되기를 주저하거나 포기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아요. ‘나는 내성적이고 소심하고, 술도 잘 못 먹는데 기자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요. 이런 생각 안 했으면 좋겠고요. 사람을 만나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사람도 필요하지만, 자료를 파악하고 정리해서 전달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는 게 언론이거든요. 그러니까 본인의 성격 때문에 고민하기보다는 본인의 강점을 키우는 방법을 고민하라고 말하고 싶어요.
경험에 의한 조언인 것 같은데요. 일을 시작한 이후에 본인에게 자료를 다루는 능력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죠?
맞아요. 다른 기자는 검사랑 농담도 하면서 금방 친해지는데 저는 검사 방을 못 들어가고 그 앞에 서 있고 그랬어요. 들어가서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나 싶고, 친해지기 힘들더라고요. 5년 차, 10년 차 되면서 달라지긴 했는데 숫기 없는 건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그래도 경제부를 거치고 법원 취재를 담당하면서 판결문 보고 해석하는 일을 내가 잘한다는 걸 알았고, 그러면 기자라는 직업이 맞겠다 싶었죠. 호기심은 있는 거니까요. 호기심만 있다면 소심하거나 내성적인 성격은 문제 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런데 호기심이 없으면 기자 생활은 안 맞을 거예요.
책에 많이 등장하는 단어 중 하나가 원칙이에요. 언론인으로서의 원칙이 있다면요?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을 보면 주인공 동백이가 그러잖아요. ‘노 머니에 노 서비스’가 아니라, ‘노 매너에 노 서비스’라고. 저도 마찬가지예요. 직업적 자존감,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침해하면 ‘노 서비스’죠.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이라는 책에 '두려움도 호의도 없이'라는 말이 있는데요. 개인의 호오나 어떤 사람한테 미안해서, 회사가 힘들어지니까 등을 이유로 쓰거나 쓰지 않는 일은 없어야 해요. 나침반이 망가지면 길을 잃잖아요. 자신이 어떤 일을 하는지 모른 채 일하면 자기 연민에 빠지기 쉬워요. 자기는 항상 피곤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열심히 일하지만 따져보면 결국 안 좋은 일을 열심히 하고 있을 수 있어요. 그러니까 자기가 하는 일이 어떤 일인지 알아야 하고, 양심과 자존심을 지켜야죠.
JTBC 뉴스룸을 통해 ‘죽지 않고 일할 권리’를 이야기했어요. 사람에 대한 예의를 지키려는 노력으로 보여요. 앞으로 더 조명받아야 할 이야기가 있다면요?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묻고 따지고 조명하는 일이 저널리즘인 것 같아요. 그러면 해야 할 이야기가 너무 많죠. ‘죽지 않고 일할 권리’는 가장 기본적인 거고요. 직장 내 따돌림이나 여성 혐오도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인데 문제의식을 못 느끼는 사람이 많아요. 피해자 몇 명이 재수 없어서 당한 일로 치부하지 말고 사회와 언론에서 의미를 부여하고 메시지를 던지려고 노력해야죠. 할 이야기가 너무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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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영
'이야기하면 견딜 수 있다'는 말을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