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워바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달리기를 시작했다. 지난 글에서 베이킹을 시작했고 더워서 그만 두고 있다고 한 것을 기억한다면, 그리고 그 글이 부산스럽게 취미가 바뀌는 나에 대한 상세한 묘사를 담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당신은 이 글의 첫 문장부터 웃었을 것이다. 얘 또 시작이네! 이번엔 또 뭐라고 달리기를 인생의 동반자처럼 소개하나 보자!
내게 달리기는 새로운 취미가 아니다. 이미 육 년쯤 전에 시도한 적이 있다. 꽤 좋은 취미였다. 사실 벅찰 정도로 좋아하는 일이었다. 그 때 나는 외국에 있었고 자주 달렸다. 도시를 상징하는 건축물 주위를 달리면 내가 중요한 사람이 된 것 같은 벅참이 느껴졌다. 평생 올 일이 있을 줄 몰랐던 도시에서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하루하루 기워 가며 살던 때, 달리기는 내가 숨을 크게 쉬고 뱉을 수 있게 했다.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그처럼 자유롭게 달릴 수 있는 공간이 더 이상 없다는 것을 알았다. 지나치게 차와 언덕과 사람이 많았다. 나는 유난스러운 사람이긴 했지만 인파를 헤치며 달릴 수 있을 만큼 얼굴이 두껍지는 못했다. 삼 년 정도 전혀 달리지 못했다. 그 사이에 명상을 배웠고(그렇다, 명상을 취미로 삼기도 했었다.) 순수하게 기쁜 순간을 찾는 명상 도중 달리기가 떠올랐다. 나는 놀라고 말았다. 아직도 이걸 기억하고 있단 말이야? 그 뒤로 몇 번쯤 학교 운동장을 뛰었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그 해 여름 밤이 너무 덥기도 했고 트랙이 집에서 멀기도 했고 끝나면 늘 야식을 먹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올해 다시 달리게 된 계기에 영화 <아워 바디>가 있다. 동적인 운동을 시작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때에 보게 된 그 영화가 무척 좋았다. 멋져 보이는 또래 여성을 따라 달리기를 시작한 자영의 이야기가 남 말 같지 않았다. 나 역시 사는 게 재미 없는 때였다. 자영이 욕망하는 상대의 욕망과 자신의 욕망을 동일시하는 단계를 지나 스스로를 알아가는 과정이 특히 좋았다. 내가 달리기라는 하나의 사건으로 인해 자영만큼 변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건 극에서 가능한 거고 나의 삶은 매번 새로운 것에 도전하면서 조금 바뀌려나 싶다가 돌아오곤 하니까. 그래도 자영처럼 달리고 싶었다. 혼자, 어두운 밤의 도시를.
삼 년 전 왜 달리기를 이내 그만두었는가 생각해보면 둘이 달렸기 때문이다. 나한테 달리기는 혼자 하는 운동이고 혼자 해야만 한다. 스스로 선택한 고독함이 주는 안정이 있다. 어른의 맛처럼 느껴지는 뿌듯한 감정. 서양인처럼 어깨를 으쓱, 고개를 까닥하며 말하자면, 혼자 할 수 있는데 왜 둘이 해? 그리하여 다시 혼자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기 어플이 제공하는 프로그램 중에 하나를 선택하고 사십여 분 혼자 시간을 가진다. 아무 생각도 말도 필요하지 않다. 레깅스를 입고 번화가를 가로질러 공원까지 가는 길에 나에게 꽂혔던 시선들이 보잘 것 없어진다. 나는 지금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고. 당신이 쳐다 보든 말든 내 알 바 아니야. 영화에서나 봤을 법한 도시에서 달리고 있다는 육 년 전의 벅참이 오늘의 서울에서도 유효하다. 장소의 문제가 아니었나 보다. 어디서 달리냐보다 중요한 것은 달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는지도.
달리는 시간이 나와 나의 시간이다. 영화 <아워바디>에 나오는 몇 차례 섹스신은 모두가 중요하지만 마지막 섹스신을 빼놓고는 영화를 말할 수 없다. 타인의 욕망을 실현하던 이가 자신의 욕망에서 타인을 제거하기까지, 달리기가 얼마나 중요한 요소였던가. 그녀와 그녀의 시간이 주는 충만함이 달리기를 통해 차곡차곡 쌓이다가 터진다. 그래 아무렴 어때, 너 좋을 대로 해. 내가 자영에게 조언이라도 할 수 있는 위치인 것처럼 말을 걸며 영화를 끄고선, 운동화를 신는다. 나도 그때까지 달리고 싶어, 자영아, 아직도 너는 달리고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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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연(도서 MD)
수신만 해도 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