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래디 미카코 저자. 도쿄신문 제공
영화 <기생충>에서 반지하에 사는 기택(송강호)의 가족과 동익(이선균)은 다른 공간, 다른 동선, 다른 계획을 가진 삶을 산다.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두 삶은 섞이지만, 영화관을 떠나면 우리는 기택의 삶을 만날 수 있을까? 외면하기에는 가까이 있고 알기에는 불편한 언더 클래스의 이야기 말이다.
브래디 미카코 저자는 영국의 탁아소에서 보육사로 일하며, 언더클래스(저변)의 삶을 기록해왔다. 현장에서 겪은 일을 밤마다 블로그에 썼고 그 이야기가 한 권의 책 『아이들의 계급투쟁』 으로 묶였다. 영국의 정치는 노동당이 언더 클래스에 복지와 안전망을 제공하던 ‘저변 시대’에서 복지제도가 대폭 축소된 ‘긴축 시대’로 변화했다. 보육사에서 이 변화를 지켜본 브래디 미카코는 ‘긴축 시대’가 망가뜨린 연대의 흔적을 과거 ‘저변 시대’에서 찾아낸다. 저자는 멀찍이 떨어진 관찰자가 아닌, 그들과 일상을 함께하는 당사자로서 말한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미래를 상상할 기회의 문을 열어 주는 것이라고. 절망의 순간에도 “거기서 끝날 수 없는 무언가”(232쪽)를 찾아내는 브래디 미카코 저자를 서면으로 만났다.
흘러가듯 한 권의 책이 됐다
작가님의 이력이 독특해요. 영국 펑크 음악이 좋아 무작정 영국으로 가셨고, 지금은 20년 넘게 살고 계시다고요. 영국에 정착하시면서 ‘아 이건 정말 생각했던 것과 다르구나’ 하신 것이 있다면요?
아니요, 다르다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1980년대에도 몇 번인가 영국에 살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도 그렇게 큰 충격을 받았다든가 위화감이 들었던 적은 없었어요. 비교적 잘 적응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일본보다 영국이 체질적으로 잘 맞나 봐요. 자기가 태어난 나라가 가장 잘 맞는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보육사로 일하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딱, 제게 아이가 생겨서 육아라는 게 재미있다고 생각했을 때예요. 당시 노동당 정권이 외국인 보육사를 대대적으로 모집을 했거든요. 문화적 다양성은 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경험하게 해주는 것이 좋다는 취지였어요. 하지만 그건 겉으로 그랬다는 거고요. 실은 보육사가 부족했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해요. 그 흐름을 타고 저는 보육사가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런던의 일본계 기업에서 일한 적도 있고 프리랜서 번역가로 일한 적도 있는데, 완전히 다른 일을 하고 싶었달까요. 지금 생각하면 그랬던 것 같아요.
이 책은 2017년 일본어로 출간되었습니다. 영국의 이야기를 일본 독자에게 전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가 있나요?
책을 만들겠다고 생각한 것도 아니었고, 다른 사람에게 읽힐 거라 생각하고 쓴 글도 아니었어요. 이 책 뒷부분(제2부)은 저의 개인 블로그에 썼던 글입니다. 탁아소에는 여러 가지 상황에 처한 아이들이 옵니다. 정말 심각한 상황의 아이들도 있었고요. 실제로 빈곤의 현장에서 일하다 보면 정말 괴로운 때가 있습니다. 그런 때에 다른 사람이 읽어주기를 바라서가 아니라 제 자신을 위해서, 내일도 힘내서 일할 수 있는 기분을 만들기 위해서 썼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일본 독자에게 무언가를 전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에요. 책이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걸요.
그 블로그를 발견하고 글을 읽은 출판사 분이 “이런 걸 잡지에 연재해주시지 않겠습니까?” 하고 연락을 주셨어요. 그래서 연재한 것이 책의 앞부분(제1부)입니다. 그것도 매월 마감에 임박해서 쫓기듯 썼습니다. 정말 흘러가는 대로 그냥 놔뒀더니 한 권의 책이 된 거예요. 저는 그다지 계획을 세우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서 대부분 뭐든 흘러가는 대로 놔둡니다.
제목이 ‘아이들의 계급투쟁’이에요. 어떤 계기로 정하게 되셨나요? 작가님이 인종, 젠더에 앞서 ‘계급’을 중요한 키워드로 강조하시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최근 영국에서는 클래스 폴리틱스(계급정치)가 부활했다는 이야기들을 많이 해요. 노동당 당수 코빈의 등장이나 미국의 샌더스 열풍 같은 일들이 있었지요. 영국에서는 토니 블레어가 내건 ‘제3의 길’ 노선 이후 좌파와 자유주의자는 인권과 젠더, LGBT 같은 아이덴티티 폴리틱스(정체성 정치)만 중시하고 계급정치의 문제를 잊어버렸던 거예요. 그래서 경제 격차가 이렇게까지 벌어지고 빈곤 문제도 심각해졌다고들 합니다. 이것이 브렉시트의 원인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분석도 있었습니다. 저는 스트레이트한 정치 시평도 씁니다. 그런 책도 냈고, 신문 칼럼도 씁니다. 그 분야의 일로 지금 말한 것 같은 계급정치로의 회귀라는 문제와 좌파가 경제 정책에 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성을 계속해서 주장해왔어요. 그러니까 『아이들의 계급투쟁』 에도 그런 관점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책에도 나오듯 저변(언더 클래스)의 삶을 전하는 것은 자칫하면 ‘빈곤 포르노’로 소비될 수 있어요. 탁아소의 이야기를 쓰실 때, 그런 걱정은 없으셨나요?
좀 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제2부는 제 개인 블로그에 쓴 글을 가져온 거예요. 늦은 밤, 맥주를 마시고 취해서 쓰기도 했습니다. 언더 클래스의 아이들과 함께 하는 일이 괴롭기도 했고요. 제 자신의 당시 상황도 좀 그랬고 해서 갑갑한 기분으로 썼습니다. 그러니까 ‘이걸 쓰자’고 마음먹고 썼다기보다는 그것이 내 일상이었으니 쓴 셈이지요. 특별히 ‘빈곤 현장의 르포를 써보겠다’는 마음을 먹고 잠입한 것도 아니고요. 보육사 자격을 따기 위해서는 실습할 곳이 필요했고, 그런 저를 받아준 곳이 저변 탁아소였을 뿐이었습니다. 보통의 어린이집에서 몸도 마음도 편하게 일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요.
지금에 와서 드는 생각인데요. 제2부(블로그 시절의 글)에서 제가 반복해서 썼던 이야기는 영국의 밑바닥에 있는 ‘상호부조의 정신’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거기에서 희망을 느꼈던 것 같아요. 상호부조의 정신에 대해 쓰면서 ‘영국에도 아직 희망이 있다’고 스스로 북돋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어요. 그리고 제1부에서는 그 상호부조 정신마저 부숴버린 긴축재정의 잔혹함에 관해 썼습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의 계급투쟁’은 빈곤에 대한 책이 아니라 긴축재정에 반대하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에서는 경제 정책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긴축 정책이 망가뜨린 것
이 책의 구성은 역순이에요. ‘긴축 탁아소’ 이후의 이야기가 먼저 나오고 과거 ‘저변 탁아소’ 시절이 그 후에 나오죠. 이러한 구성을 택하신 이유가 있다면요?
이 책의 구성은 담당 편집자의 아이디어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응? 시간 순서대로 쓰지 않아도 되나?’ 싶었어요. 그런데 확실히 긴축재정으로 공적 보조금이 큰 폭으로 삭감된 부분을 앞으로 가져오고, 그 이전 아직 탁아소에 활력과 여유가 있던 시대의 이야기를 뒤로 가져가니 긴축재정의 잔혹함이 더 잘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편집자의 생각에 찬성했습니다. 매우 훌륭한 편집자예요. 그녀가 없었다면 이 책은 존재하지 않았을 겁니다.
‘저변 탁아소’ 시절, 애니를 주축으로 보육사들이 진정한 교육을 고민하는 모습이 놀라웠어요. 상응하는 보수가 없어도 “어째서 이런 사람들이 이런 곳에 있을까”(64쪽) 싶은 뛰어난 사람들이 있었죠. 이런 분위기는 어떻게 가능했나요?
1970년대 페미니즘이 크게 대두되던 때, 런던에서 활동하던 여성들에게는 남다른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지방의 공영주택지 같은 가난한 곳으로 이사를 와서 탁아소, 취학 아동 보육소(맞벌이 부부의 자녀 등 초등학생의 방과후 보육을 담당하는 곳 - 옮긴이), 가구와 의복 재활용센터, 여성의 쉼터(가정폭력 등으로부터 도망쳐 나온 사람들을 위한 - 옮긴이), 법적인 조언을 해주는 주택공동조합 등에서 활동하는 여성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무료 탁아소도 그 흐름에서 생겨난 것이지요. 애니를 비롯해 탁아소에서 일하던 여성들, 다양한 곳에서 이런 흐름을 이어가던 같은 세대의 여성들은 스스로를 ‘활동가’라고 불렀습니다. 단순한 보육사라기보다는 자신이 발을 딛고 선 커뮤니티에서 시작해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의식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작가님이 만난 소위 ‘밑바닥 아이들’은 우리가 상상하는 모습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감정을 잘 표현하지 못하고 폭력적 성향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작가님은 “거기서 끝낼 수 없는 무언가”를 관찰하시는데요. 여기에 대해 좀 더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책의 마지막 부분에도 쓴 것처럼, ‘존엄’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작가님은 ‘저변 탁아소’와 ‘긴축 탁아소’를 대비시키셨지만, ‘저변 탁아소’ 시절이 마냥 좋았던 시절만은 아니에요. 그럼에도 저변 시절에는 적어도 아이들이 충돌하고 의지하는 ‘인간적인 소음’이 있었죠. 그 시절을 돌이켜 볼 때, 가장 그리운 것은 무엇인가요?
에너지랄까요, 혹은 활력이랄까요. 그리고 밝은 마음과 관용이요. 긴축재정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위축되면 사람의 마음 또한 위축됩니다. 째째해지고 편협해지고 자기와 다른 사람이 존재하는 것조차 인정할 수 없게 돼요.
이민 가정의 아이를 교육시키는 문제는 까다로울 것 같아요. 작가님은 아이가 자라 영국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그 나라에서의 정상성”을 가르치는 것이 어렵다고 말씀하셨는데요. 가정에서 습득한 것(부모의 문화)과 탁아소에서 가르치는 것이 충돌하는 상황을 겪으신 적이 있나요?
예를 들면, LGBT에 속하는 사람들도 탁아소에 있었습니다. 인형 놀이를 준비(아이들이 자유롭게 놀 수 있도록 인형의 집에 인형을 배치해둡니다)할 때도 항상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는 가정만이 아니라, 아버지 인형 둘을 인형의 집에 넣어두기도 했는데, “이건 아니야” “이상해”라고 하면서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이들도 있었어요. 그런 아이들의 부모는 대개 동성애에 그다지 관용적이지 않은 나라에서 온 이민자이거나, 동성애를 인정하지 않는 종교를 믿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어른과 대등한 인간
저자님은 인종 차별은 반대하면서 하층 내국인을 혐오하는 ‘소셜 레이시즘’을 자주 관찰하셨어요. 자신은 소위 정치적으로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혐오’가 왜 일어난다고 생각하시나요?
자기가 옳다고 굳게 믿고 있으니까요. 그런 사람들이 모이면 자기가 틀렸다고 생각하는 집단에 벌을 내리기 시작합니다. 벌을 내리는 행위는 일단 자기가 어딘가 높은 곳에 있는 듯한, 마치 신이 된 듯한 착각을 맛보게 하기 때문에 쾌감이 생기고 기분이 좋아지겠지요. 이 쾌감을 맛보려는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어 다른 집단을 처벌하기 시작하면 폭주하는 게 아닐까 합니다.
‘정치적 올바름’은 다양화된 세계에서는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다른 사람을 처벌해 자기 기분이 좋아질 목적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자님은 하층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돈이나 ‘푸드 뱅크’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다고 보시나요?
자신의 가능성을 더 넓혀갈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리고 어떤 아이들에게든 그 기회를 주려고 하는 사회요.
우리는 하층의 삶을 모르는 만큼, 그들과 공존하는 방법을 잘 모릅니다. 경멸 아니면 시혜적 대상으로 보게 됩니다. 저변의 사람들, 특히 저변의 아이들을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이 아이의 입장이었으면 우리는 어땠을까 상상해보는 것. 그리고 자기가 잘 모르는 세계에 사는 사람과 만나보는 것. 모르는 것은 만나다 보면 알게 됩니다.
언더 클래스의 사람들이 드러내놓고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것도 문제지만, 한국 사회의 문제는 빈자가 아예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사회를 살아가는 한국 독자들에게 한 말씀 해주신다면요?
영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우연히 저변 탁아소 같은 곳에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만, 재미있는 것은 같은 영국에 살고 있는 일본인이라도 “이 사람이 쓴 것은 믿을 수 없어. 이런 건 본 적이 없거든”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계층과 생활 범위가 다르면 빈민과 우연히 스쳐 갈 기회도 없는 것은, 지금 아마도 전세계 어디든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사회가 분리되는 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기와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과 만나는 수밖에 없습니다. 책상 앞에서 궁리한들, 인터넷에서 답변을 찾으려 한들 진실은 알 수 없습니다. 인간들끼리 실제로 만나서 지뢰를 밟기도 하고 실패도 하면서 서로에 관해서 배워갈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에서는 ‘노키즈존’ 논란이 있었어요. 카페, 극장 같은 공공의 장소에 아이를 동반하지 못하게 하자는 주장인데요. 아이가 예의를 지키지 않는 것은 부모의 책임이라는 인식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영국에도 이런 현상이 있나요? 또, 우리 사회가 어린이를 대하는 시각은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영국에서도 아이들을 데려가서는 안 되는 호텔 같은 것은 있지만 그것이 늘어나는 움직임은 보지않습니다. 오히려 줄어들고 있는 것 같아요. 보육사 자격증을 땄을 때, 가장 먼저 들은 이야기는 일대일로 아이들과 이야기할 때는 같은 시선으로 이야기하라는 것이었어요. 그러니까 중요한 것을 말할 때는 쪼그리고 앉아서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추라는 것이지요. 이는 정신적인 메타포이기도 합니다. 어른이 아이보다 위에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들은 어른과 대등한 ‘작은 인간’임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향후 집필 계획이 궁금합니다.
지금 6곳에 연재를 하고 있습니다. 마감에 쫓기듯 쓰고 있어요. 정치 시평에서 영국문화 비평, 생활 에세이, 평전까지 여러 가지를 하고 있어요. 같은 것을 계속 쓰면 금방 질리는 사람이라서요, 장르에 집착하지 않고 제 스스로가 재밌다고 생각하는 것을 쓸 생각입니다.
번역: 노수경
보육사, 작가, 칼럼니스트. 1965년 일본 후쿠오카현 출생. 빈곤 가정 출신으로 펑크 음악에 빠져 존 라이든(펑크록 밴드 섹스 피스톨스의 보컬)에게 큰 감화를 받았다. 후쿠오카현립슈유칸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상경했다가 영국으로 건너갔다. 런던과 더블린을 전전하다 무일푼이 되어 일본으로 돌아왔지만, 1996년 다시 영국으로 건너가 지금까지 20년 넘게 살고 있다. 런던의 일본계 기업에서 몇 년간 일하다 프리랜서로 전향해 번역과 저술 활동을 해왔다.보육사 자격증을 취득한 후 탁아소와 어린이집에서 일하며 ‘반反긴축’의 입장에 서게 되었다. 문학평론가 구리하라 유이치로는 일본의 소위 리버럴한 교양인들이 ‘반긴축’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게 된 것은 그녀의 영향 때문이라고 말했다.
『아이들의 계급투쟁』으로 2017년 제16회 신초다큐멘터리상을 수상했고, 2018년 오야 소이치 기념 일본 논픽션 대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 지은 책으로 『꽃의 생명은 No Future』, 『아나키즘 인 더 UK-무너진 영국과 펑크 보육사 분투기』, 『더 레프트-UK 좌파 명사 열전』, 『Europe Calling-땅바닥에서 보내는 정치학 보고서』, 『THIS IS JAPAN-영국 보육사가 본 일본』, 『지금 모리시를 듣는다는 것은』, 『노동자 계급의 반란-땅바닥에서 본 영국의 EU 탈퇴』, 『여성들의 테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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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계급투쟁브래디 미카코 저/노수경 역 | 사계절
현장에 단단히 뿌리를 박은 그의 글은 어떤 거창한 이론이나 통계 없이도 사회에 뚜렷이 존재하는 계급 차와 특정 계급을 배제하고 몰아내려는 견고한 벽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낮은 곳에 서 있으면 정치가 사회를 어떻게 바꾸는지가 잘 보인다.
김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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