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여성들은 불공평한 삶을 살아야 하는 걸까?
이이효재 선생님의 공부와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1924년에 태어나 100년 가까운 인생을 살아내면서 비록 몸은 노화하였지만, 마음은 오히려 사랑으로 그득해졌다. 억압받는 여성을 넘어 인간 모두를 사랑으로 품어내려는 노력이 그 증거다.
글ㆍ사진 박정희
2019.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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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송이 꽃이 피어날 때 모든 곳에 봄이 온다.” 어느 영성가의 말을 읽는 순간, 이이효재 선생님의 삶을 이보다 더 생생하게 묘사할 수는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이효재 선생님은 이 땅의 여성들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만큼 찬바람이 쌩쌩 불던 동토에서 태어나 가장 먼저 꽃을 피우고 봄의 소식을 알린 분이었다.

 

한 사람의 일생은 인류의 역사이고 그물처럼 엮인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발자취이며 귀중한 기억 창고이다. 우리가 걸어가야 할 방향을 알려주는 나침반이며, 삶의 지혜를 담은 한 권의 책이기도 하다. 한 시대의 맨 앞에 서서 살아온 이들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이효재 선생님의 삶은 우리나라 여성들이 나아가야 할 길을 안내하는 이정표라 할 수 있다.

 

인류 역사는 수천 년 동안 끊임없이 변화해왔다. 그러나 어느 하나 자연스레 변화한 것은 없다. 모든 변화는 불편과 부당함을 느끼는 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불편함과 부당함을 깨닫는 순간 원인을 골똘히 생각하게 되고 해결 방법을 찾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왜 우리 여성들은 이렇게 불공평한 삶을 살아야 하는 걸까?”

 

이이효재 선생님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고통당하는 여성들을 보며 어렸을 때부터 고민했다. 학자로서 평생을 공부하고 가르치면서도 이 질문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여성들의 평등하고 자유로운 삶을 가로막는 원인을 찾아 연구하고 극복하는 것이 선생님이 붙잡고 싸워온 일생의 화두였다. 내가 이이효재 선생님을 처음 만난 때는 선생님이 서울 생활을 접고 경남 진해로 내려가신 뒤였다. 대학교에 다닐 때부터 이이효재 선생님을 존경해왔지만 실제로 만나 뵙고 인사를 드린 건 몇십 년 만이었다.

 

“내가 갖고 있는 어린이책이 있는데…… 내 친구가 자기 딸이 쓴 책이라고 보내주었어요. 함께 유학한 친구였는데 그 친구는 미국에 눌러앉아 살았지. 딸이 미국에서 어린이책 작가로 크게 성공했다더라구.”

 

내가 어린이책을 쓴다는 말에 책꽂이를 뒤져 선물로 주신 책이 린다 수 박(Linda Sue Park)의 『내 이름이 교코였을 때』이다. 한국계 미국인인 작가는 그녀의 어머니가 일제 강점기에 창씨개명을 당했던 경험을 바탕으로이 책을 썼다고 한다. 이이효재 선생님 역시 그녀의 어머니와 같은 시대에 나고 자란 세대다.

 

이이효재 선생님은 해방 직후 미국 유학을 떠났고 유학 중에 한국 전쟁이 발발했다. 휴전 이후에도 전쟁의 공포가 너무도 컸기에 공부를 마친 뒤 귀국을 꺼리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선생님은 처음부터 미국에 눌러앉아 살 생각이라고는 손톱 끝만치도 없었다. 하루빨리 선진적인 교육을 받고 돌아와 내 나라내 민족들의 삶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잊은 적이 없었다. 2년여 동안 열렬히 구애하며 청혼했던 미국 청년의 열정도 매정하게 거절할 수 있었던 힘이었다.

 

이이효재 선생님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조국에 돌아와 어느 학자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가족과 여성을 대상으로 한 연구를 시작했다. 선생님이 가족 연구를 시작했을 때 가족은 자연스레 생기는 것인데 그것이 무슨 사회학이 되느냐고 남성 학자들은 비아냥거렸다. 하지만 선생님은 가족이야말로 사회 과학의 가장 기초적인 대 상이라 믿었다. 가족이 민주화되어야만 여성들의 삶이 평등해지고 사회가 민주화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족 연구를 시작으로 여성들의 역사와 여성 차별의 구조를 밝히는 데 온 힘을 쏟았다. 한국 최초로 여성학 교육 과정을 대학 내에 설치하고 여성학 이론을 현실 운동에 결합시켜 해방 이후 여성 운동의 큰 줄기였던 가족법 개정 운동, 호주제 폐지 운동, 정신대대책협의회 결성 등을 이끌어냈다. 그렇게 이이효재 선생님은여성 운동의 이론가이자 실천가로 평생을 살았다.

 

성폭행, 성추행, 몰카 반대, 미투 운동, 낙태죄 폐지 등 젊은 여성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희망적이고 바람직한 일이다. 다만 남성과 여성의 대립과 투쟁이 아닌 인권의 시각에서 정의되고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고생각한다.

 

결혼과 출산을 거부하는 여성들도 늘고 있다. 오늘의 현실에서는 도저히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를 엄두가 안 난다는 것이다. 1980년대에 여성들이 가족법 개정이나 호주제 폐지를 주장하면서 ‘우리 애 안 낳는 파업하자’는 주장을 펼친 적이 있었다. 자발적 출산 파업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결혼과 출산을 뒷받침해줄 사회적 시스템이 미비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포기하는타의적 파업이다. 몹시 안타깝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족과 여성, 남성에 관한 관념을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는 이이
효재 선생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가족이나 인간관계는 고정불변하는 것이 아니다. 남녀가 함께 사회, 정책, 관념, 생활을 온전히 바꿔야 결혼도 출산도 기꺼이 감당할 수 있는 사회가 만들어진다.”

 

1970년대부터 이이효재 선생님은 여대생들에게 “독신으로 살 자신이 있고 독립성까지 갖추었을 때 진정으로 평등한 혼인이 가능하다”라고 말씀하셨다. 지금은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그때 여대생들은 그 말의 뜻을 알아듣지 못했다. “여자가 혼인하지 않고 아이를 낳았다고 해서 그 아이가 사생아가 된다는 것은 말이 되느냐?”라고 소리 높여 이야기했을 때 학생들은 깜짝 놀라며 귀를 의심했다. 그만큼 선생님은 시대를 앞서 나가며 변화를 이끄는 분이었다.

 

이이효재 선생님은 이제 여성이라는 화두를 인간으로 바꾸어 생명에 대한 존경과 사랑, 평화, 자유, 정의, 인권의 가치에서 남녀가 조화롭게 살아가는 사회를 꿈꾸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모성뿐만 아니라 부성에도 사랑의 능력은 있어. 이걸 깨치면 전쟁보다는 평화를 부르짖을 수밖에 없지. 생태를 살리자고 할 수밖에 없어. 그래서 나는 희망이있다고 봐.”

 

이이효재 선생님의 공부와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1924년에 태어나 100년 가까운 인생을 살아내면서 비록 몸은 노화하였지만, 마음은 오히려 사랑으로 그득해졌다. 억압받는 여성을 넘어 인간 모두를 사랑으로 품어내려는 노력이 그 증거다.

 

봄을 불러오는 맨 처음 핀 꽃 같은 인생을 살아오신 이이효재 선생님의 이야기가 많은 이들, 특히 젊은 여성들에게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다. 우리에게 이런 할머니도 있었음을 기억하고 선생님이 살아온 삶을 지침 삼아 자신이 서 있는 지점을 제대로 둘러보고 길을 개척했으면 한다. 부디 이 책이 모든 이의 마음에 봄을 불러오는 한 송이 꽃이 되길 바란다.

 

 


 

 

이이효재박정희 저 | 다산초당
아직 여성이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제대로 된 권리를 인정받고 동등한 기회를 부여받으려면 나아갈 길이 멀다. 그 먼 길을 나아가는 데 있어 이이효재의 이야기가 든든한 정신적 버팀목이자 동반자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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