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스플래쉬
얼마 전 새벽, 정신과 약을 100알쯤 삼켰다. 눈을 뜨니 응급실이었고, 호스가 코와 팔목에 잔뜩 붙어 있었다. 심지어 기저귀까지 차고 있었다.
기억에는 없지만 나는 약을 먹고 동생을 깨운 뒤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고 했다. 동생은 119에 신고했고, 나는 들것에 실려 병원에 갔다. 위 세척을 했고 먹은 약 중에 위험한 약이 섞여 있어서 검사를 더 해야 한다고 했다. 눈을 뜨자마자 오줌이 마려웠는데, 위험한 약이고 자시고 화장실을 가지 못하게 해서 당황했다. 간호사가 치워 줄 테니 기저귀에 그냥 싸라는 것이다. 죽으려고 한 마당에 뭔들 못하겠느냐만 희한하게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결국 소변줄까지 꽂았다.
그런데도 난 멀쩡했다. 단지 속이 조금 안 좋을 뿐이었다. 이틀은 입원해야 한다는 말에 경악하며 몇 시간이고 애원한 끝에 퇴원할 수 있었다. 토사물이 잔뜩 묻은 잠옷 차림에 맨발로 병원을 빠져나(올 뻔했으나 친절한 간호사분 덕분에 슬리퍼를 얻어 신고)왔다.
돌아와서 이틀 정도 죽만 먹으니 더더욱 멀쩡해졌다. 자해의 흔적은 어디에도 남지 않았고, 애꿎은 주변 사람들의 마음에만 안도감과 상처를 동시에 남겼다.
무라카미 류의 <69>에서 나왔죠
“상상력은 권력을 쟁탈한다”고
이 시대에 딱 맞는 얘기죠
돌들이 사랑 넘치는 빵이 되거나
황사 대신 향기로운 장미잎들이 불어오거나
전쟁터에 쏟아진 포탄이 빼빼로 과자거나
신현림 지음, 「내가 못 본 이야기를 해봐요」 부분
어렸을 때 ‘만약에 놀이’를 좋아했다. 이 놀이는 혼자서도 할 수 있고 누군가와 함께할 수도 있었다. 혼자서 하는 법은 이랬다. 가만히 누워 내게 일어났으면 하는 일들을 상상하는 것이다. 만약에 내가 좋아하는 배우와 몸이 바뀐다면, 만약에 집 한편에 돈다발이 가득 쌓인다면, 뭐든 읽기만 하면 외워지는 뇌를 갖게 된다면…. 또 내가 좋아하는 친구가 날 좋아하게 된다면, 엄마랑 아빠가 싸우지 않게 된다면, 친구가 이사 가지 않는다면 등등.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일들을 상상할 때도 있었지만 대체로 좋은 상상을 했고, 그 상상 속 질문에 답을 하며 즐거웠다. 이 놀이를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방법도 간단했다. 질문 속 ‘나’를 너나 우리로 바꾸는 것이다.
어린 친구들이 대부분 그렇듯 나는 만약을 상상하고 꿈꾸며 자랐다. 『키다리 아저씨』를 읽으며 나를 구원해 줄 막연한 누군가를 상상했고, 내 취향대로 꾸민 멋진 방이 생길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며 즐거워했다. 미래를 상상하는 건 현재를 살아가기 위한 발판이자 잊기 위한 도피처였다.
그렇게 달콤했던 내 ‘만약에 놀이’는 나이를 먹고 현실이 무거워짐과 동시에 사탕처럼 조금씩 녹아 갔다.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시집 속 문장을 읽으며 깨달았다. 내 즐거운 상상력은 완전히 녹아 버렸다는 걸. 돌들이 빵이 되기를 상상하고 포탄이 빼빼로가 되는 모습을 그리는, 그 재미와 유희의 순간이 없어져 버렸다는 것을. 사실 없어지거나 사라졌다기보다는 잠시 멈췄다는 말이 맞겠다. ‘그래서 사는 게 재미없었구나’ 생각하며 약을 먹었다.
요즘 뒤늦게 유튜브에 입문했다. 자신이 산 명품을 보여 주고 설명하는 영상을 보게 되었는데, 재밌어서 계속 찾아보았다. 정말정말 돈이 많은 사람의 집도 봤고 좋은 차도 구경했다. 비행기 퍼스트 클래스 탑승기도 보았다. 뭐든 볼 수 있었고, 내가 영영 알 수 없을 거라고 여겼던 세계를 아주 쉽게 접할 수 있어서 신기했다. 그리고 오랜만에 돈이 아주 많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비싼 가방을 마구 사고, 연예인이 산다는 넓은 집도 사고, 영상 속 저 사람들처럼 행복해하면서.
하지만 잠시였다. 돈이 많으면 좋지만 그게 내 상태를 낫게 해 줄 수는 없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언젠가부터 밝고, 긍정적이고, 그래서 좋은 에너지를 뿜어 내며 활발히 살아가는 이들이 제일 부러웠다. 삶이 즐거울 수만은 없고 그건 그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적어도 의욕이 있는 사람들 말이다. 무언가를 하고 싶은 욕구가 있는, 그렇게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 현실에 충실하는 건 미래를 기대하는 일이기도 하다. 오늘을 살면서 더 나아질 내일을 상상하고, 달라지거나 이루게 될 미래로 조금씩 다가가기 때문이다.
말랑말랑한 사랑의 상상력이 그리워요
가지려고만 드는 세상에서
남 주고, 나누고, 보살피는 손들이 그립고
사랑 넘칠 나 자신이 그리워요
신현림 지음, 「내가 못 본 이야기를 해봐요」 부분
약을 먹고 얼마 후, 친구는 한 달 뒤 우리가 죽게 된다면 무얼 할 거냐고 물었다. 하고 싶은 게 없었다. 억지로 단어를 만들어 내느라 시간이 걸릴 정도였다.
친구는 세상에 무언가를 남기고 싶다고 했다. 신기했다. 난 아무것도 남기고 싶은 게 없는데. 그리운 거, 바라는 거, 만약이라는 단어도 없는데. 아니다. 사랑스러운 사람들, 마음에 말랑말랑한 상상력이 있고 그걸 뿜어 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부럽다. 그리고 그랬던 내가 그립다. 이런 생각을 하는 거 보니 아직 의욕이 있는 건가? 잘 모르겠지만, 그냥 지금은 부럽다. 사랑 넘칠 나 자신이 그립다. 새로운 사탕을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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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를 타고 달렸어신현림 저 | 민음사
그녀의 시를 읽으면 마치 침대 위에 함께 누워 그녀와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나누는 것 같다. 그녀와 함께 울고 웃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따뜻한 희망을 얻게 된다. 사진작가이기도 한 시인의 감각적인 사진 17컷이 시의 감동을 더한다.
백세희(작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출판사에서 5년간 일했습니다. 10년 넘게 기분부전장애(경도의 우울증)와 불안장애를 앓으며 정신과를 전전했습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를 지었습니다.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떡볶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