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뭐길래] 서점에 가서 무작정 몇 장 읽어 봐요 - 박소정 편
그냥 무작정 서점에 가서 몇 장만 읽어봅니다. 대체로 ‘아. 이건 내 책이다’ 라는 느낌이 오면 망설임 없이 구매 하지요. 그럴 때면, 숨겨진 보물찾기 쪽지를 발견한 듯한 기분이 들죠. 
글ㆍ사진 엄지혜
2019.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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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예스>가 미니 인터뷰 코너 ‘책이 뭐길래’를 매주 목요일 연재합니다. 책을 꾸준하게 읽는 독자들에게 간단한 질문을 드립니다. 심각하지 않은 독서를 지향합니다. 즐기는 독서를 지향합니다. 자신의 책 취향을 가볍게 밝힐 수 있는 분들을 찾아갑니다.

 


박소정 씨는 올해 초 ‘녹색광선’이라는 작은 출판사를 시작했다. 출판사 이름은 에릭 로메르의 1986년 영화 <녹색광선>에서 따왔다. 영화 속 주인공은 남들보다 예민한 감수성의 소유자로, 해질 무렵 드물게 볼 수 있는 자연 현상인 ‘녹색광선’을 만나고 싶어 한다. 박소정 대표는 애서가들이 이와 비슷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다. “대체로 남다른 감수성을 지니고 있고, 어느 날 자신에게 예고 없이 다가올 아주 특별한 책을 늘 기다리는”, 그런 독자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책을 지속적으로 만드는 것이 박소정 대표의 목표다.

 

녹색광선 출판사는 최근 발자크의  『미지의 걸작』   과 슈테판 츠바이크의  감정의 혼란』  을 출간했다. 두 작품 모두 유명한 고전 작가들의 소설이지만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는 않았던 작품. 말 그대로 ’미지의 걸작’으로 존재했던 소설이다. 박소정 대표는 이런 소설을 발굴해서 고풍스러운 양장본 디자인으로 만들어 독자들을 찾아갈 계획이다.

 
지금 읽고 있는 책, 최근에 좋게 읽은 책을 소개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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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작가 조르조 바사니의  『핀치콘티니가의 정원』  을 읽고 있어요.  『핀치콘티니가의 정원』   은 ‘페라라’라는 이탈리아의 도시가 배경인 소설인데, 가보지 않은 도시와 등장 인물들을 머릿속으로 아련하게 그려보도록 만들어 주는 소설이랄까요? 소설은 ‘오래된 무덤’에서 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무덤조차 찾을 수 없기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지만 엄연히 존재했던, 주인공의 기억 속 사람들에 관한 회상이 바로 이 ‘무덤’에서 부터 비롯된다는 것이 인상적이었어요. 이 소설은 홀로코스트 광풍이 불어오기 직전의 ‘가장 아름다웠던 한 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특히 주인공의 기억의 중심에는 첫사랑 ‘미콜’이 있는데요. 그녀에 대한 기억들은 찬란하지만 가슴 아프게 묘사됩니다. 이 소설은 홀로코스트를 직접 증언한 소설들과 달리, 유태인 박해 직전의 낙원과도 같았던 시절을 서정적으로 묘사했기에, 그 이후에 닥칠 일들이 역설적으로 더욱 비극적으로 느껴지게 만들죠.
 
이 책을 읽기 직전에 읽은 책 또한 이탈리아 작가의 소설인데요. 1934년도에 노벨상을 수상한 ‘루이지 피란델로’의 단편집 『어느 하루』 입니다. 9개의 단편 하나하나가 모두 임팩트가 대단한데, 어떤 것은 기괴하고, 어떤 것은 참 코 끝을 찡하게 만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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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틈이 고전을 찾아 읽는 편인데, 최근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야』   라는 작품을 번역이 다른 두 출판사의 책으로 읽었어요. 느낌이 약간 다르게 다가오긴 했지만, 두 번역 모두 유려하고 아름다웠습니다.  『백야』  는 어느 몽상가가 우연히 만난 여인에게 느끼는 짧은 사랑에 관한 이야기인데요. 상당히 감성적이고 섬세합니다. 도스토예프스키 작품답지 않게(?) 등장 인물도 몇 명 없고 분량도 많지 않아요. 말미의 반전이 가슴 아팠습니다. 마지막 문장은 주인공인 몽상가의 독백인데요.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오 하느님! 한순간 동안이나마 지속되었던 지극한 행복이여! 인간의 일생이 그것이면 족하지 않겠는가?”
 
어떤 계기로 선택하게 되었나요?
 
『핀치콘티니가의 정원』  은 영화로(비토리오 데 시카 감독 / 1970년 작)먼저 만났고, 그전에 바사니의  『금테안경』  이라는 소설을 워낙 인상적으로 읽었기에 망설임 없이 선택했지요. 『어느 하루』 의 경우는 최근 관심이 촉발된 이탈리아 작가들에 대해 찾아보다가 우연히 루이지 피란델로를 알게 되어 읽어보게 되었어요.  『백야』  또한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의 1957년 영화 <백야>를 먼저 보고 원작 소설를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종종 인상적인 영화의 원작 소설들을 찾아서 읽곤 합니다.
 
평소 책을 선택할 때, 기준은 무엇인가요?
 
문학과 예술의 영역에 발을 들이고 있는 지인들(작가, 출판사 분들, 인문/예술 종사자)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다가 작품 정보를 알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알게 된 책은 웬만해선 인터넷으로 정보를 찾아보지 않아요. 그냥 무작정 서점에 가서 몇 장만 읽어봅니다. 대체로 ‘아. 이건 내 책이다’ 라는 느낌이 오면 망설임없이 구매합니다. 그럴 때면, 숨겨진 보물찾기 쪽지를 발견한 듯한 기분이 들죠. 
 
한 작가를 알게 되고 그 작가에게 꽂히면, 그의 책을 몰아서 읽는 편입니다. 그 때부터는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찾아서 읽는 거죠. 오래 전 쿤데라에게 빠졌을 때는 쿤데라 책을 다 찾아서 읽었고, 필립 로스와 윌리엄 트레버, 파스칼 키냐르, 마르그리트 뒤라스, 미셸 우엘백의 소설들도 그렇게 일정 기간 동안 몰아서 읽었죠. 한 시절을 한 작가와 함께 난다고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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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좋아하는 책들의 상당수는 고전입니다. 최고의 단편들을 쓰는 ‘윌리엄 트레버’와 ‘줌파 라히리’ 이전에 ‘안톤 체홉’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체홉의 단편들은 하나하나가 전율 그 자체입니다. 몇 번을 다시 읽어도 같은 기분이 들어요. 조지 오웰의  『1984』   만큼 소름 끼치는 디스토피아 소설이나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  만큼 아름다운 문장이 가득한 책을 만나는 일은 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고전은 지루하다는 편견이 있지만,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 중반 고전들은 의외로 모던한 작품들이 많아요. 시간을 뛰어넘어 존재하는 것들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죠.    

슈테판 츠바이크의 작품들도 읽다 보면 빨려 들어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야기에 끌리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츠바이크가 쓴 소설과 평전들은 이야기가 지닌 힘이 정말 강력해요.
 
어떤 책을 볼 때, 특별히 반갑나요?
 
저는 일명 X세대라 불리는, 문화의 혜택을 듬뿍 받고 자라난 세대입니다. 특히 예술 영화에 대해서는 각별한 애정이 있는 세대죠. 당시에는 많은 친구들이 <키노> 잡지를 구독하고 PC통신 영퀴방에서 지식의 자웅을 겨루거나 각국의 문화원에서 상영하는 다양한 영화를 보고 이야기를 나누곤 했지요. 좋은 영화를 소개하는 책을 만나면 오래 전에 연락이 끊어진 옛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갑습니다. 현대 프랑스 시네아스트들과 그들의 영화들을 소개하는  영화관을 나오면 다시 시작되는 영화가 있다』  가 제게는 그런 책이었는데요. 그 책을 읽은 후 잠시 잊었던 레오스 카락스의 영화들을 다시 찾아 보았습니다. 

 

반대로 영화 <백야>를 보고 루키노 비스콘티에 관한 책을 찾아 보니 루키노 비스콘티-역사와 개인이 변증법』  이라는 책이 있어서 바로 구매했습니다. 영화가 책을 읽도록 이끌기도 하고, 반대로 책이 영화를 보도록 이끌기도 합니다.
 
신간을 기다리는 작가가 있나요?
 
쿤데라가  『무의미의 축제』  를 출간한지 벌써 5년이 지났네요. 이 책의 그의 마지막 소설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당시 쿤데라의 나이가 여든 다섯 정도 였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흔에 접어든 그가 쓴 신작을 만날 수 있었으면 해요. 평균 수명 100세 시대 소설가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일이 될 테니까요.


 

 

미지의 걸작오노레 드 발자크 저/김호영 역 | 녹색광선
실재보다 더 강렬한 진실성과 존재감을 담고 있어서 그 자체로 독자적인 생명력을 갖는 예술작품에 대한 꿈 또는 상상, 보편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인 꿈에 대한 추구를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드라마틱한 서사로 풀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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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이 뭐길래 #박소정 대표 #핀치콘티니가의 정원 #백야 #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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