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스플래쉬
얼마 전 인턴사원 채용에 면접관으로 들어갔다. 사흘 동안 꼬박 지원자들을 만났다. 사람을 판단하는 자리는 늘 어렵다. 잠시의 만남으로 누군가를 판단하는 건 사실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한눈에 들어오는 특징은 있다. 긴장하는 사람과 긴장하지 않는 사람은 쉽게 구분이 된다. 시선을 자연스럽게 받으며 또박또박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이 눈에 띈다. 아마 면접을 10분, 20분만 진행한다면 이런 첫 인상이 평가를 강하게 좌우할 것이다.
이번 면접은 꽤 길었다. 네 사람이 한 조로 들어와 40분에서 1시간 가량 진행했다. 그러다 보니 변화가 보였다. 초반에 긴장해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던 지원자가 시간이 지나며 기를 펴는 경우가 꽤 있었다. 더듬던 말들이 차분해지고 시선도 안정되었다. 한 지원자가 “잠깐 생각 좀 하고 답을 해도 되겠습니까?” 말한 뒤 숨을 고르더니 비로소 한 사람의 생각이 명료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긴장만 약간 풀려도 이렇게 달라지는데 평소의 자연스러운 모습은 얼마나 다를까. 우리는 함께 오래 일할 사람을 찾는데, 면접이라는 경직된 상황에서는 그 모습이 짐작되지 않는다.
오랜 시간 관계를 맺고 여러 상황을 함께 거치지 않고서는 사람에 대해 판단하기가 힘들다. 사람을 알아보는 일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아무튼 판단은 내려야 했고, 시간이 필요하다 해서 면접을 수십 번 볼 수는 없는 노릇이라, 내 나름의 최선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하지만 충분히 시간을 갖지 못하고 누군가를 평가하는 일은 찜찜한 기분을 남긴다.
사람만 그런 것도 아니다. 책에 대해 판단하는 일도 그렇다. 서점에서 일하다 보니 “꼭 도서MD가 되고 싶습니다”, “저는 정말 책을 좋아합니다” 라는 말을 면접 자리에서 많이 듣는다. 책에 애정을 지닌 사람을 만나는 일은 언제나 반갑다. 하지만 이들이 서점에 입사해 해야 할 일 중 중요한 일은 책을 선별하는 것이다. 몇몇 책을 따뜻한 손길로 어루만지고 각별하게 소개할 수는 있겠지만, 몇 배나 더 많은 책들을 흘려 보내야 한다. 몇몇 책은 판매가 시작되기 전부터 충분한 재고를 갖춰두지만 어떤 책들을 보유하지 않기도 한다. 서점은 책을 고루 애정하지 않는다.
이런 선별은 피할 수 없다. 인터넷 서점이든, 오프라인 서점이든 책을 소개하는 자리에는 공간적 한계가 있다. 아니 공간의 한계가 없어서 끝없이 책을 놓아둘 수 있다 하더라도 그 안에서 목 좋은 자리와 그렇지 않은 자리의 차이는 나기 마련이다. 어떤 책을 좋은 곳에 놓을지 선별하는 일은 결코 피할 수 없다.
재고 또한 그렇다. 물류 공간의 제약으로 모든 책을 갖추는 것은 불가능하다. 혹여 공간적 제약이 없다 하더라도 판매되지 않는다면 결국 반품의 문제가 생긴다. 반품은 출판사의 경영에서 중요한 문제다. 반품 과정에서 책이 파손되기도 하고, 도서를 추가 제작하는 시점을 판단하는 일과 그에 따른 자금 운용 계획을 세우는 일을 어렵게 한다. 그래서 서점 직원은 책을 많이 파는 것도 중요하지만 반품을 하지 않는 일도 중요하다. 어떤 책을 얼만큼 들여 놓을지 늘 적절히 판단해야 한다. 판단의 결과 어떤 책은 많이 보유하고 어떤 책은 자제하게 된다.
아쉬운 점은 이런 판단이 너무 즉각적으로 이뤄진다는 것이다. 책을 선별하는 일이 결코 피할 수 없는 일이고, 그래서 중요한 일이라면, 중요한 만큼 심도 있게 검토하고 싶다. 내가 왜 이 책을 골랐고, 저 책을 고르지 않았는지 명확한 근거를 갖고 싶다. 책을 읽고 검토할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다. 아니 부족하다기보다 없다는 게 맞을 것이다. 발주하랴, 프로모션 준비하랴, 거래처와 미팅하랴 바쁘다. 어떤 책을 잘 보이는 곳에 놓을지, 어떤 책을 몇 부나 보유할 지는 순간적인 감각으로 결정된다.
물론 짧은 시간에 감각적으로 내리는 판단이 허술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경력이 쌓이면 쌓일수록, 표지와 제목, 저자, 책의 메시지, 출판사의 (자본력이 포함된) 능력 정도를 입력하면 판매고가 예상되고, 실제 판매량도 거기서 많이 벗어나지는 않는다. 이 정도만으로도 매출관리와 재고관리는 안정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경력이 늘어도 할 수 없는 게 있다. 아직 충분히 주목받지 못한 책들의 가치를 알아보고 알리는 일이다. 책을 제대로 검토하지 않고서는 이런 작업은 불가능하다.
“아니 왜 이 책은 소개해주지 않는 겁니까?”라는 하소연도 여러 차례 들었다. 나름의 답을 했지만,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합당한 답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나는 그 책을 제대로 검토하지 못했으므로.
그러므로 읽고 생각할 시간을 늘 원한다. 회사에서는 불가능하니 일을 하지 않을 때는 늘 읽으려 한다.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책에 코를 박고 열렬히 읽는다. 시야가 책을 향하고 있으니 알게 모르게 출퇴근 인파 속에서 폐를 끼친 적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발버둥쳐도 읽는 시간은 금세 끝난다. 집에 가서는 집에서 해야 할 일과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또 있으므로.
필요한 시간은 일에 관한 시간만이 아니다. 아이에 대해 생각할 시간도 필요하다. 아이의 성장과 발육에 대해, 아이의 마음과 그 날씨에 대해, 아이를 사회의 일원으로 길러낸다는 것에 대해, 동시에 아이를 사회적 편견과 억압으로부터 보호하는 일에 대해 나름의 중심을 가진 부모가 되고 싶다. 아이는 저대로 쑥쑥 자랄 수 있겠지만, 그래도 그 옆에서 좋은 영향력을 미치는 존재가 되고 싶다. 세심하게 쌓아 올린 생각을 바탕으로 단단하게 빚어낸 태도를 가진.
좋은 태도를 가진 사람은 타인에게 영감을 준다.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으면 덩달아 좋은 사람이 되고 싶고, 잘 살아 보고 싶은 의지가 생긴다. 드러내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빛이 나는 사람들이 있다. 순간 반짝이고 사라지는 빛이 아닌 뭉근하고 꾸준한 빛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
- 엄지혜, 『태도의 말들』 , 53쪽
다행히도 아이에 관해서라면 약간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지난 1년 동안 <채널예스>에 ‘아이가 잠든 새벽에’라는 제목을 달고 글을 썼다. 오늘 이 글을 마지막으로, 모두 19편이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일단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고, 글을 쓰는 동안에도 계속 생각이 일어났다. 아이와 아내와의 순간들이 기록되었고, 나의 감정과 생각이 다듬어져 정리되었다. 나는 지난 1년 동안 조금은 더 스스로가 만족스러웠다. 물론 글을 쓰는 시간 역시 그냥 생기는 것은 아니어서, 제목 그대로 새벽에 카페로 나가 하품 쏟아내며 썼다. 포기한 잠이 많다.
마감이 연이어 다가오는 글을 써 보는 건 처음이었다. 마감이 있으니 글을 지속적으로 쓸 수 있었지만, 동시에 마감에 쫓기다 보니 원하는 만큼 충분히 생각해보지 못하고 쓴 것들이 많고, 써보고 싶은 이야기를 아예 못 쓰기도 했다. 내 능력이 부족해서 쓰지 못한 것들은 개인적으로라도 계속 써보고 싶다. 생각할 시간이 없는 생활에서, 글을 쓴다는 건 멋진 경험이었다. 잠을 포기할 가치가 있었다.
앞으로는 ‘가족’이라는 제도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싶다. 아빠와 엄마, 아이로 이루어진 ‘정상가족’이지만, 가족에게 부여된 기존의 관념과 역할을 따르지 않고 우리 세 사람에게 적합한 관계를 많이 고민해보고 싶다. 가족은 너무 가까이 있기에 서로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해야 하는 관계 같다.
세상에 대해서도 더 알아가고 싶다. 미국과 중국이 부딪히고, 부는 대물림 되고, 성폭력과 산업재해가 끝없이 일어나며, 미세먼지는 자욱한 세상에서 나름의 의견을 가지고 살고 싶다. 내가 사랑하는 도시 경주가 신라의 ‘왕경’이던 시절의 풍경에 대해서도, 7세기 고대 동아시아의 세계대전에 대해서도 궁금한 게 많다. 계속 읽고 생각하고 싶다. 시민으로서의 정치적 역할도, 개인으로서의 취향도 모두 소중히 여기고 싶다.
물론 시간은 여전히 없을 것이다. 잠을 줄이는 방식으로 글을 쓰는 것도 오래 가기는 힘든 방식이다. 마땅한 방법은 없다. 그저 일상에서 생기는 불규칙한 틈들을 하나 하나 그러 모아서 조금씩 조금씩 생각을 전진시켜 갈 뿐이다. 이 많은 생각거리를 이 부족한 시간들로 감당할 수는 없겠지만, 매일 조금씩은 더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대단한 삶을 꿈꾸는 것은 아니다. 그저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를 느끼는 것들에 대해 할 수 있는 만큼 열심히 생각하고 싶을 뿐이다. 생각만으로 삶이 깊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생각 없이는 깊어질 수 없으므로. 가족에 대해서, 일에 대해서, 세상과 동료 시민에 대해서, 나의 오래된 취향에 대해서 나는 더 깊게 생각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생각해 볼 것들에 대해 생각하는 모습. 이게 내가 원하는 내 모습이다. 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은 내 모습이기도 하다.
내겐 시간이 필요하다. 생각할 시간이 절실히 필요하다.
김성광
다행히도, 책 읽는 게 점점 더 좋습니다.
joytea
2020.03.19
wooya
2019.06.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