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는 고독한 행동이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고, 오로지 자신의 힘만으로 헤쳐 나가야 하는 과정이다. 글을 쓸 때 온갖 종류의 두려움과도 대면해야 한다. 쓰고 있는 글을 쓰고 또 쓰고 또 고쳐도 맘에 들지 않을 때 찾아오는 자괴감과 마주쳐야 하고, 완성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잠 못이루는 밤도 수없이 보내야 한다.
천하의 하루키에게도 글쓰기는 괴롭다. 하루키는 글쓰기의 괴로움을 이렇게 비유했다.
“고독한 작업, 이라고 하면 너무도 범속한 표현이지만 소설을 쓴다는 것은 - 특히 긴 소설을 쓰는 경우에는 - 실제로 상당히 고독한 작업입니다. 때때로 깊은 우물 밑바닥에 혼자 앉아 있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아무도 구해주러 오지 않고 아무도 오늘 아주 잘했어라고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해주지도 않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중)
번역은 글쓰기보다 더 외로우면 외롭지 결코 덜하지 않은 과정이다. 번역가 노승영과 박산호는 심지어 외로움을 견디는 힘이 번역가에게 필요한 자질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사람을 그리워하는 사람은 번역에 적합하지 않다. 외로움이 병인 사람은 번역가가 되어서는 안 된다. 번역은 누군가와 같은 공간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북적거리는 카페나 공동 작업실에서 일할 수도 있지만 그 때도 남들이 침범할 수 없는 자기만의 영역을 확보해야 한다.”
(노승영, 박산호, 『번역가 모모씨의 일일』 중).
짧든 길든 그 “우물 밑바닥”에서의 고독의 시간을 통과해야만, 오웰이 “고통스러운 병을 오래 앓는 것처럼 끔찍하고 힘겨운 싸움”(조지 오웰, 『나는 왜 쓰는가』 중)이라고 표현했던 과정을 거쳐야만, 헤밍웨이가 『무기여 잘있거라』 를 쓸 때 “마지막 페이지는 서른아홉 번을 다시 쓰고야 만족”(헤밍웨이, 『헤밍웨이의 말』 중) 했다는 시지푸스의 고통을 넘어서야만 원고가 완성된다. 서점에 입고된 모든 책의 저자와 번역자는 그런 의미에서 이미 각자 마라톤 우승자나 마찬가지다. 그들은 자신을 충분히 자랑스러워 해도 괜찮다.
작가마다 글쓰는 고통의 과정을 견뎌내는 나름의 비법이 있다고 한다. 물론 부코스키처럼 자신의 독자에 대해서도 험담 늘어놓기를 겁내지 않는 작가도 있지만, 어떤 작가는 글쓰는 고독한 순간을 독자와 만나게 될 그 어떤 순간을 상상하며 버틴다고 한다. 책이 마침내 출간되었을 때, “우물 밑바닥”에서 고군분투하던 작가는 독자 앞에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드문 기회를 맞이한다. 보통 ‘저자와의 만남’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행사를 통해서만, 작가는 자신이 “우물 밑바닥”에서 상상했던 관념의 구성체인 독자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얼굴을 가진 독자를 비로소 만날 수 있다. 그래서 독자와의 만남을 앞둔 모든 저자와 역자는 설레는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니은서점>에선 적어도 1주일에 한 번은 독자는 저자를, 저자는 독자를 만날 수 있는 모임이 열린다. <니은서점>은 그 모임을 ‘니은 하이엔드 북토크’라 부른다. 작가의 페르소나가 문장에서 묻어나는 경우도 있지만, 모든 작가가 그렇지는 않다. 독자는 “서른아홉 번을 다시 쓰고야 만족”했기에 출판된 문장만을 읽을 수 있을 뿐이다. 독자는 결코 자신이 읽은 책을 만든 사람의 “우물 밑바닥”을 알 수 없다. 저자의 페르소나와 대면할 때 비로소 독자는 “우물 밑바닥”을 상상할 수 있게 된다.
독자는 저자의 얼굴을 실물로 확인하고, 책에 사인을 받기 위해 저자를 만나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저자 역시 단순히 책을 홍보하고 책 판매만을 위해 독자를 만나고 싶어하지 않는다. 독자와 저자가 그저 책 판매라는 상거래 촉진을 위해 만나는 것이 아니라면, 독자와 저자가 만났을 때 실제의 물리적 거리는 가까울수록 좋다. 물리적 거리가 가까워야만 독자와 저자라는 일반명사를 벗어던진 각자의 페르소나를 지닌 인간과 인간의 만남이 가능해진다. 작은 서점은 그래서 독자와 작가가 만나기에 제격인 장소다. <니은서점>은 인간과 인간이 만남이 가능해지는 그 순간을 ‘하이엔드’라 부른다.
『여자전쟁』 을 번역한 JTBC 심수미 기자를 ‘니은 하이엔드 북토크’에 모셨다. 북토크가 시작될 때 심수미 기자는 여전히 ‘기자’이자 ‘번역자’였고, 독자도 그냥 ‘독자’이기만 했지만 이야기를 나눌수록 모두 일반명사를 벗어던지고 페르소나를 가진 개인과 개인의 만남으로 변했다. 그랬기에 북토크가 끝났을 때 그 ‘하이엔드’의 순간을 기억하기 위한 단체사진 촬영에 모두가 기꺼이 응했다. 그 날 페르소나를 가진 개인과 개인이 함께 찍은 단체사진은 절대 촌스럽지 않았다.
노명우(사회학자)
베를린 자유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아주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다. 이론이 이론을 낳고 이론에 대한 해석에 또 다른 해석이 덧칠되면서 사회로부터 고립되어 가는 폐쇄적인 학문보다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서 연구 동기를 찾는 사회학을 지향한다. 『세상물정의 사회학』, 『인생극장』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