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일찌감치 불을 끄고 잠자리에 누웠다. 여기가 끝인가? 이제 시작인데, 왜 끝인 것만 같지? 대학 입학을 앞두고 서울로 갈 때는 미지의 세계가 열리는, 이제 막 그 속으로 발을 디디는 실감이 있었다.
흥미진진하고 완전히 새로운 부분은 모르는 사이에 이미 훅 지나온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오은의 옹기종기’ 오은입니다. 소설가 김세희의 첫 소설집, 『가만한 나날』 에 수록된 단편 「감정 연습」의 한 대목이었습니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 상미는 3개월의 인턴기간 동안 경쟁자인 태영을 제치고 정규직 직원으로 채용돼 이제 막 직장생활을 시작한 사회초년생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죠. 분명히 시작인데 어쩐지 끝인 것 같으니 말입니다. 『가만한 나날』 에 수록된 김세희의 단편들은 상미처럼 처음이 어색하고 불안한, 두렵기도 하고 막막하기도 한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자연히 나의 처음과 지나온 어떤 시절을 돌아보게 하는 이야기들이죠. 오늘 ‘책읽아웃’ <오은의 옹기종기>는요. 김세희 작가님을 모시고, 처음과 청춘을 이야기해볼까 해요. 많은 기대, 부탁드립니다!
<인터뷰- 김세희 편>
오은 : 먼저 김세희 작가님께 드리는 ‘deep & slow’는 이것입니다. "김세희에게 청춘이란?" 어떤 답변 해주실지 기대가 되네요.
김세희 : (웃음)네.
오은 : 작가님 소개를 할 차례입니다. 재미있게 들어주세요. “소설가. 변화를 두려워하고, 겁이 많지만 소설을 써서 용기를 얻는 사람. 중학교 때 꿈은 무려 대통령이었다. 꽤 정치적인 학생이었다. 고등학교 때는 GT의 팬이었는데, GT는 고 김근태 전 의원의 알파벳 머리글자를 딴 별칭이다. 'GT클럽 희망'이라는 팬클럽 사이트에 쓴 편지에 "세희 양과 같은 청춘들의 힘으로 세상은 조금씩 바뀝니다."라는 답장을 받은 적이 있다.
김세희의 서울 생활은 2006년 이른 봄에 시작되었다. 청량리역에 내려 마주한 풍경을 보고 서울도 다 똑같은 서울은 아니구나, 생각했다. 만약 학교가 청량리가 아니라 강남이나 신촌 정도에 있었다면, 대학 생활이 더 힘겨웠을지도 모른다. 2015년 제9회 <세계의 문학>에 「얕은 잠」이 당선되어 등단했고 더 이상 돈을 지불하는 것이 아니라 받고, 머리와 손끝을 써서 뭔가를 생산해내는 느낌이 너무 좋았다.
「얕은 잠」의 미려처럼 길을 못 찾고 헤매기 일쑤이며 서핑을 하다가 떠내려간 경험이 있다. 「감정 연습」의 상미처럼 파주에 있는 회사에 취직해 근처 원룸에서 살았고 「우리가 물나들이에 갔을 때」의 커플처럼 오직 주거 문제를 고민하다가 혼인신고를 생각한 적도 있다.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작가는 안톤 체호프와 제임스 설터, 그리고 버지니아 울프. 진실된 여성의 목소리를 만날 때 완전히 무장 해제되곤 한다. 왠지 모르게 마음에 남아 있는 장면 같은 것이 소설이 된다. 버스에서 우연히 들은 대화, 누군가를 만나고 오는 길에 느낀 오묘한 감정 같은 것들.
글도 사람도 점점 더 담백한 것이 좋다. 겁이 많지만 소설과 관련해서는 그러고 싶지 않다. 대담하고 자유롭게, 아주 멀리 가보고 싶다. 지금은 남편과 막 세상을 만나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 딸 금순이와 금순이를 안고 있으면 다가와 자기도 안아달라고 기다리는 치즈냥 금교와 살고 있다.”
김세희 : (웃음)너무 당황스럽네요. 이런 흑역사를 여기서 마주칠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어요.
오은 : 어떤 부분이 제일 당황스러우셨어요?(웃음)
김세희 : 학창시절 GT 팬클럽 활동했던 내용을(웃음) 어떻게 알게 되셨는지 모르겠어요.
오은 : 꿈이 대통령이셨다고요.
김세희 : 정치에 뜻이 있었던 건 사실이에요. 지금도 관심이 있는 것도 맞고요. 그런데 제가 깨달은 것은 사람마다 자기 기질이 있다는 거예요. 제가 기질적으로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고요. 사람들을 많이 만나면 힘들어지더라고요. 기질적으로 정치가 저와 잘 맞지는 않는 것 같아요. 아주 오래 전에 품었던 생각입니다.(웃음)
오은 : 영향 받은 작가로 제임스 설터와 안톤 체호프, 그리고 버지니아 울프를 꼽으셨는데요. 이 작가들의 어떤 면을 좋아하시는지 궁금해요.
김세희 : 안톤 체호프가 인간을 바라보는 따뜻하지만 절대 감상적이지 않은 시선을 좋아해요. 거꾸로 말하면 냉정하면서도 결코 냉소적이지 않은 시선이 있잖아요. 그걸 좋아하고요. 제임스 설터의 경우는 세련된 문체를 좋아해요. 버지니아 울프는 문체나 직접적인 작품이라기보다 그의 가치관,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
오은 : 첫 책을 낸 기분이 어떠신지 궁금해요. 저도 첫 책을 민음사에서 냈는데요. 그때 저는 그 책이 내 것이 아닌 것 같더라고요.
김세희 : 저는 책이 나왔는데 정말 마음에 쏙 드는 거예요. 이렇게 예쁜 책이 나의 첫 책이라니 믿어지지 않는다, 그런 느낌이 있어요.
오은 : 표지에 옷도 있고 커피, 토스트, 양말, 서류봉투 같은 것들이 있어요. 저는 보자마자 끌렸거든요. 책을 바로 구입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친 것 중 하나가 표지였는데요. 작가님은 표지를 보고 어떠셨어요?
김세희 : 저는 시각적인 데에 조예가 있진 않아서요. 제 표지가 어땠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는 없었어요. 막연하게 제목처럼 가만한 느낌의 표지가 나오지 않을까, 이렇게만 생각을 하고 있었죠. 그러다 처음 시안을 받았는데요. 예상과 너무 다른 거예요. 명랑한 느낌이라 이게 소설의 톤과 맞을까 싶어서 처음에는 의아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볼수록 매력적이었어요. 게다가 제목이 커피나 식빵 같은 오브제와 같이 붙으니까 상상력을 자극시키는 것 같더라고요.
오은 : 소설의 정조에 명랑함이 또 있잖아요. 표지의 노란색이 바로 그 명랑함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싶고, 참 좋았어요.
김세희 : 맞아요, 색감이 볼수록 예뻐서 책으로 나온 게 정말 마음에 쏙 들었어요.
오은 : 등단 4년 만에 첫 소설집이에요. 시기적으로는 빠른 편이라고 생각하세요? 아니면 좀 늦었다고 생각하세요?
김세희 : 빠른 건 아닌 것 같고요. 평균적인 정도 같아요. 친구 작가들, 김봉곤 작가나 박상영 작가가 워낙 책을 빨리 냈기 때문에 그에 비하면 조금 걸렸다는 느낌도 드는데요. 일반적인 편인 것 같고요. 책이 나오니까 생각보다 훨씬 좋더라고요. 책 나오기 전에는 전에 발표했던 작품 묶어서 낸다는 정도로만 생각했고, 누가 물어볼 때도 이런 식으로 얘기를 했는데요. 정작 책이 나오니까 많이 기쁘고 되게 소중하게 여겨졌어요. 이제 진짜 작가가 된 듯한 느낌이에요.
오은 : 고백하자면 저도 첫 책 나오고 리뷰 검색도 많이 하고 그랬거든요.(웃음) 김세희 작가님도 그런 시기를 보내고 계신지 궁금해요.
김세희 : 정확히 그런 시기를 보내고 있어요.(웃음) 사실 저는 안 그럴 줄 알았어요. 주변에서 그러더라고요. 첫 책 나오고 나면 날마다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서 판매지수를 보게 된다고요. 그 얘기를 듣고도 그럴 거라고 생각 못했는데요. 정확히 그 행동을 하고 있죠.
오은 : 인상적인 리뷰가 있었나요?
김세희 : 감사하게도 지금까지는 정말 공감했다는 리뷰가 많았는데요. 꼭 듣고 싶었던 이야기였어요.
오은 : 수록작 대부분이 사회초년생, 입사를 하거나 결혼을 생각하거나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라서 그런 것 같아요. 그런데 작가님이 여기에 집중한 이유가 있나요?
김세희 : 실은 쓰면서는 제가 사회초년생 이야기를 많이 쓰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했어요. 나중에 이 책의 리뷰나 책에 수록된 신샛별 평론가의 해설을 보고 깨닫게 됐는데요. 아마도 지금까지 소설을 많이 쓰지 않았으니까 제가 경험한 것들, 제가 보고 관찰한 것들 중에 인상 깊었던 장면이나 인상 깊었던 인간 관계를 썼기 때문일 것 같아요. 그 중에서도 처음 입사를 하고, 사회생활을 할 때가 제게는 인상적이었던가 봐요. 그 장면들이 자꾸만 제 단편에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더라고요. 제 경험뿐 아니라 그때 만난 사람들, 선배들, 상사들이나 그들의 관계 같은 것들이 저한테는 인상적이어서 자꾸 소설에 등장하고 있는 것 같아요.
오은 : 책에 수록된 신샛별 평론가의 해설 중 이 부분이 기억에 남았어요. “이 서사들은 피상적 청년 관련 담론의 사각지대를 비추면서, 그들 삶의 진상을 다각도로 조명하고 그들 고유의 심리적, 윤리적 중핵을 가리켜 보인다.”(299쪽)라는 문장인데요. 사회초년생 시기를 관통한 김세희 작가님이 지금 청년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 수 있는 거죠. 그래서 많은 분들의 공감을 받는 것이 아닐까 하고요.
김세희 : 공감해주신다는 것을 보면서 한편 안도하게 되는 것 같은데요. 제가 체험하고, 제가 보았던 것이 사회의 어떤 일부분에 불과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다행히 그렇게 보이지 않고, 저와 다른 경험을 하고 다른 일을 하셨을 분들도 공감을 해주신다는 게 저한테는 다행스럽고, 안도가 되는 부분이에요.
오은 : 수록된 여덟 편의 단편 중 가장 마음이 가는 단편이 있다면 어떤 걸까요?
김세희 : 고르자면 「현기증」이 가장 마음이 가요. 제일 최근에 쓴 작품이기도 한데요. 제 이야기가 제일 많이 들어갔으면서도 소설화가 비교적 잘 되었다고 느끼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 같아요. 소설화되었다는 것은, 내 경험이기는 하지만 거리 두기가 어느 정도 성공했다는 의미이기도 해요. 그래서 특별히 아끼는 마음이 있습니다.
오은 : 「현기증」에서 어떤 장면을 가장 좋아하세요?
김세희 : 상률과 원희가 중고 가전 제품을 사기 위해 매장에 다녀와요. 그 과정에서 원희가 비로소 지금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깨닫고요. 그래서 상률과 다툼을 하는데요. 상률이 원희에게 왜 그렇게 상황 판단을 못하느냐, 우리 상황이 이것밖에 안 되는데 왜 인정하지 않느냐고 힐난을 하고, 상처를 주거든요. 그 후 원희가 혼자 생각하는 장면이 있는데요. 그 부분을 좋아해요.
그녀도 알고 있었다. 형편에 맞게 살아야 한다는 걸. 사는 일이 바라는 대로 흘러가 주지 않는다는 것을. 그렇지만...... 난 대단한 걸 꿈꾼 게 아닌데. 대단한 것들은 언감생심 꿈꿔 본 적도 없는데. 내가 바란 건, 아주 작은 것이야. 그게 그렇게 허황된 바람인가? 내가 이 정도도 바라지 못해? 이걸 바란다고 이렇게 분수도 모르는 사람 취급을 당해야 해?(「현기증」, 83쪽)
오은 : 소설집 제목을 고를 때 보통 수록작 중 하나의 제목을 고르잖아요. 「가만한 나날」을 표제작으로 고른 이유가 있을까요?
김세희 : 표제작을 고를 때는 내용에 구애 받지는 않았어요. 여덟 편의 작품 중에서 이 여덟 편의 이야기를 포괄할 수 있을 만한 제목이 뭐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제일 처음 했었고요. 표제작을 읽지 않은 분들도 『가만한 나날』 이라는 제목을 처음에 보시면 호기심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그래서 그렇게 결정했습니다.
오은 : 「가만한 나날」은 블로그 마케팅에 관한 이야기예요. 이 이야기는 어떻게 시작하신 거예요?
김세희 : 대학 졸업할 무렵인 것 같아요. 동기인 친구 중 한 명이 인턴 프로그램을 한다는 얘기를 했었어요. 그 내용이 블로그에 후기를 올리는 일인데 회의에서 상사 분이 말하기를 “우리 이번에는 어떤 인물을 만들어볼까?”라고 했다는 거예요. 블로그를 위해서 허구의 인물을 만든다는 사실을 저는 생각지 못했던 일이어서 놀랐죠. 그렇지만 그때는 그냥 넘어갔었는데요. 작가가 되고 나서 <릿터>로부터 ‘플래시 픽션’ 청탁을 받았는데 주제가 ‘사칭’이었어요. 그 주제를 듣자마자 친구가 말했던 내용이 떠올랐어요. 검색을 해보니까 관련 업계의 이야기들도 많았고요. 그걸 읽다가 어떤 사회초년생은 이런 일을 하다가 이런 경험을 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쓰게 된 소설이에요.
오은 : 이 책이 나오고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이 작가님의 동료들의 응원이었어요. 동료들의 반응, 적극적인 홍보, 어떠셨어요?
김세희 : 첫 책이 나오니까 이렇게 많은 응원을 받는구나, 했어요. 심지어 잘 모르는 선배 작가 분들도 메시지를 보내주시고, 격려를 해주셔서 많이 놀랐거든요. 한예종에서 대학원을 나왔잖아요. 동기도 있지만 선배들도, 후배들도 있어서 학교를 다닐 때는 항상 소설을 같이 얘기하고, 서로 작품을 읽어줬어요. 그런 동료들이 늘 있는 게 저한테는 자연스럽게 여겨졌는데요. 대학원을 졸업하고 나니까 일상적으로 만나는 동료가 없는 거예요. 그러다가 첫 책이 나오고, 많이 응원을 받아서 나도 이 마음을 잊지 않고 나중에 동료들을 똑같이 응원해줘야겠다 생각하고 있어요.
오은 : 박상영 작가님은 저희 프랑소와 엄님한테 부탁도 하셨대요. 작가님 잘 부탁드린다고요.(웃음) 작가님의 첫 책을 이렇게 환호해주는 동료들을 보니까 저도 너무 좋았어요. 누군가 첫 책을 냈을 때 이렇게 환호해주고, 축복해준다는 건 정말 기쁜 일이구나 싶더라고요. 그런 것들 보고 소설 쓰기 잘했다고 생각하지 않으셨어요?
김세희 : 맞아요, 정말 큰 힘을 얻었어요. 남편은 직장 생활을 하는데요. 모든 일을 팀으로 해요. 때로는 그게 부러울 때가 있거든요. 신뢰할 수 있는, 경험 많은 팀장이 있고 일에 대해 조언 받을 수 있고 항상 같이 다닐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되게 부러웠어요. 소설 쓰는 일의 슬픈 점 중 하나가 동료가 없다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소설 쓰기는 개인작업인 거라고 생각을 했으니까요. 그런데 책이 나오고 주변에서 그렇게 많이 응원해주시고, 격려해주시는 걸 보면서 나에게도 동료가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항상 남편을 부러워하고, 나는 동료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다는 걸 최근에 깨닫고 있어요.
오은 : 마지막으로 deep & slow, “김세희에게 청춘이란?”에 대한 답을 들어볼게요.
김세희 : 저한테 청춘은 이미 지나갔다는 사실에 안도하게 되는 것, 입니다.
오은 : 와, 소설가 분들은 늘 마지막에 이렇게 묵직하게 남기고 가시는 것 같아요. 청춘을 잘 견뎌왔구나, 여기까지 와서 다행이구나, 생각하신다는 거죠?
김세희 : 네, 그런 마음 같아요.
오은 : 정말 즐거웠어요. 출연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김세희 : 이 소설집에 실린 여덟 편의 소설을 쓰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이었는지 비로소 조금 깨달았어요. 이제 조금 알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요. 『가만한 나날』 을 읽고, 재미있다고 느끼는 분들이 계시다면 앞으로도 제가 쓰는 글들을 같이 읽어주셨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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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시인)
2002년 봄 『현대시』를 통해 등단했다.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너랑 나랑 노랑』 『유에서 유』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등을 썼으며, 현재 강남대학교 한영문화콘텐츠학과 특임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