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 뭐예요?”
과거의 나는 이 질문에 ‘직업에서 성공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그러나 꿈이라는 게 직업적 성취가 아님을, 열정도 언젠가는 소모되는 자원임을 깨닫기 시작한 20대 끝자락에서 꿈을 놓치고 오히려 안도했다. 꿈꾸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진작 알았다면 더 행복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꿈 없음에 만족하던 어느 날, 우연히 ‘벳푸 온천 명인’을 알게 되었다. 이 이상한 단어를 해석하자면 다음과 같다. 먼저, ‘벳푸’. 일본 규슈 지방에 위치한 도시인 벳푸는 끓고 있는 온천탕에 비유될 만큼 수많은 온천이 솟아나는 도시다. 그리고 ‘온천 명인’. 각기 다른 88곳의 온천에 다녀와 도장을 모은 사람이다. 즉, ‘벳푸 온천 명인’은 벳푸의 88곳 온천을 다녀와 도장을 모은 사람인 것이다. 온천 명인이 되면 뭐가 있냐고? ‘온천 명인’이라는 단어가 금빛으로 수놓아진 검은 수건과 얼마간의 입욕할인권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저 온천 명인은 온천 명인으로서 존재할 뿐이다.
온천에 다녀오기만 하면 명인이 된다니. 게다가, 온천 명인이 되어도 특별할 것이 없다니. 좋아하는 것에 몰두하는 기쁨 이외에는 아무것도 필요 없는 일. 이렇게 완벽한 일이 있을까? 나는 이미 온천 명인이 되고 싶어졌다. 온천 명인의 세계에 급속도로 매료되었다. 결심했다. 온천 명인이 되겠노라고. 그렇게 벳푸 온천 명인을 향한 도전이 시작되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나만의 행복을 발견한 것이다.
한 번 행복을 맛보자 온천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아침 먹고 땡, 점심 먹고 땡, 저녁 먹고 땡. 먼동이 터오면 비몽사몽 잠결에도 온천으로 달려갔다. 그것도 모자라, 5일간 42.195곳(온천 42곳 손만 담그는 온천 0.195곳)의 온천에 들어가는 온천 마라톤도 완주했다. 비를 맞는 온천도, 내리쬐는 햇볕 아래에서의 온천도 좋았다. 낡고 낡아 세월이 느껴지는 허름한 공동 온천도, 한껏 멋들어진 호텔 온천도 저마다 매력이 있었다. 알몸으로 만난 사람들은 온천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만으로 금세 친구가 되었다. 온천이 일상인 ‘프로 온천러’인 벳푸 사람들은 어설픈 온천 초보인 이방인에게 한없이 친절했다. 온천 자체로도 행복이었지만, 그 행복에 윤기를 더해준 것은 사람들이었다.
낯선 골목길 어디선가 은은한 비누냄새가 느껴지면 어김없이 나타나던 온천들. 과자 조각을 따라 숲길을 걸어가던 헨젤과 그레텔처럼 콧구멍을 한껏 열고 온천 내음을 따라 착실히 온천 수행을 실천했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벳푸 온천 명인이 되었다. 꿈은 아직도 찾지 못했지만, 상관없었다. 꿈 없이, 성취 없이도 행복에 이르는 길을 찾았으니까. 그래서 널리 알리고 싶었다. 세상에서 가장 작고 확실한 행복, 벳푸 온천으로 떠나는 길을. 언제나처럼 더운물을 채우고 기다리고 있을 낯선 동네의 온천을 상상하며 오늘도 행복에 잠긴다.
제7843대 벳푸 온천 명인
안소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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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천 명인이 되었습니다안소정 저 | 앨리스
평범한 회사원이 우연히 온천의 매력에 빠져 ‘벳푸 온천 명인’에 도전하는 여정의 기록이자 온천에서 마주한 현지의 풍경, 벳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안소정(작가)
보통의 회사원. 볕 좋은 가을날 온천에 들어갔다가 뒤늦게 적성을 발견했다. 이후 한국과 일본의 목욕탕을 여행하고 기록해왔다. 내친김에 목욕 가방 들고 일본의 소도시 벳푸를 거닐다 제7843대 벳푸 온천 명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