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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쓰느냐 물으시면 혼자니까 쓴다고 대답하겠어요

<월간 채널예스> 2019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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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마시고 썼을 것 같은 야심찬 문장 하나를 발견하고는 피식 웃었다. (2019. 03.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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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어디를 여행 중이었다. 기차로 국경을 통과 중이어서 그곳이 어디인지는 내 기억에 명확하지 않다. 나라 안은 마침 국정농단 사건으로 한창 시끄러울 무렵, 나는 유럽의 시골 기차 안에서 멀뚱대다가 한 사람을 보았다. 국가의 기밀을 누설한 죄목으로 지금 교도소에 있어야 할 사람이 나와 같은 기차를 타고 있었다.

 

물론이다. 내가 잘못 본 것이다. 그저 연일 신문에 오르는 사람과 비슷하게 생긴 동양인이 창가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것이 점화되어 내 정신은, 내 의지는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하나의 소설 같은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이야기의 물살은 굉장했다.

 

이야기 속으로 살짝 들어가보기로 하자. 일단은 주인공이 필요하니 얼른 이름 하나를 끌어와야겠다. 후배 시인 이름을 따서 남자 주인공을 우선 ‘박준’이라고 하자.

 

그러니까, 주인공 박준은 정부 조직의 요직에 몸담게 되는데, 거기까진 좋았지만 인생의 밧줄을 아주아주 잘못 잡은 탓으로 크게 잘못한 일 없이 감옥에서 10년을 넘게 썩어야 할 운명에 처하게 된다. 하지만 새 정부는 실제 그의 죄가 크지 않다는 걸 덮어주고 배려하는 차원에서 그를 유럽의 한 나라로 보낸다. 나라가 잠잠해지면 그를 불러들여 충분히 보상까지 해주겠다는 약속까지 받았다. 한 달에 한 번씩 정해진 날짜에 송금을 받으며 일주일에 한 번씩 보고서를 써서 이메일로 제출해야 하는 것이 달랑 그에게 주어진 일이다. 하지만 그의 정성들여 써서 보내는 보고서는 사실 언젠가부터 읽어보는 사람이 없다.

 

겨울이 긴 유럽의 어느 시골 마을에서 사는 삶은 아주 단조롭다. 집에만 있는 할 일없는 사람으로 인한 주변의 오해를 피하기 위해 아침 아홉시에 정장을 차려 입고 저녁 5시에 집에 돌아오는 모습을 일부러 보여주라는 지시를 받았고, 밤 열시 넘어 불을 켜놓는 모습까지도 보여서는 안 되는 철저하면서도 비밀스러운 삶을 유지하라는 것이 사법부의 한 담당 인사의 요구사항이었다. 마을 사람들과는 적당히 잘 지냈지만 그것도 그저 인사만 나누는 정도였고, 서로의 집을 오가는 것도 안 되었다. 눈속임으로 감옥에 있는 것으로 하되 그렇게 몇 년만 밖에서 지내다 들어오라는 요구였으니 말하나마나 좁은 감옥의 방 한 칸 보다는 낫긴 했다.

 

박준이 보낸 메일을 확인하지 않는 경우가 늘어나더니 그나마 연락이 통했던 단 하나의 라인조차 연락이 끊어지게 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송금만 두절되지 않을 뿐. 박준은 한국에 들어갈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한다. 국외로 나올 때는 사법부의 보호 속에 몰래 나왔다 하더라도 들어갈 때는 혼자의 힘으로 들어가는 길이라 어떻게든 특별한 입국심사를 받게 될 것이 두려웠다. 입국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이라는 가정과 입국과 동시에 공항에서 체포되면서 세상에 알려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 그 불안으로 박준은 보고서를 쓰는 대신 매일매일 긴 편지를 쓴다. 그 편지는 오래전 알고 지냈던 한 여성을 향한 것이지만 그것을 부칠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하지 못한다.     

 

이것이 이야기의 초반부. 이야기는 빵반죽처럼 부풀어 갔지만 여기까지만 들려주기로 한다. 그때 그 여행을 하면서 나는 이상하게 야위어 갔다. 마치 소설의 주인공 박준처럼, 아니면 박준과 동행하면서 기차를 타고 눈길을 걷느라, 그리고 마음껏 이야기의 부피를 늘이고 상상하느라 초저녁부터 녹초가 되었다.

그리고 얼마 전이었다. 이 이야기 속에 푹 빠져 지내던 시기의 메모들을 들춰볼 일이 있었는데, 아마도 술을 마시고 썼을 것 같은 야심찬 문장 하나를 발견하고는 피식 웃었다.

 

‘나는 꿈틀거림에 대해 쓰려고 한다, 인간의 인간적인 꿈틀거림에 대해.’


그리고 또 다른 페이지에는 할아버지의 목소리를 빌어 이런 대사를 적어 놓은 것 역시도 볼 수 있었다. 

 

“사람이 한 사람의 힘만으로 저 큰 나무를 뽑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그럴 수 없네. 그건 나무보다 적게 살아서라네. 나무만큼 열심히 살지 않아서 그런 거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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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나는 이 소설을 완성하지 않을 테지만, 그렇다면 이 문장은 어디에 써먹어야 할지는 좀더 생각해보기로 하자. 

 

나는 왜 이야기를 끊지 못하고 계속 꼬리에 꼬리를 물고 따라가면서 며칠을 살았던 걸까. 아마도 그것은 내가 그저 사소한 것에 끌려 다니기를 즐겨하는 사람이어서, 그저 사소한 것에 취해 사는 유형의 사람이어서였을까. 이제는, 여행을 한다는 것이 시시해지고 육체적으로 이길 수 없는 것들이 늘어나고 있으니 마음이라도 어떻게든 수다를 떨어야 되겠다는 것은 아니었을까. 아무튼 나는 그 이야기를 다 여미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쓰기를 시작하지도 않았고, 그러므로 나 혼자서라도 읽어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나는 말하려고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형태가 없는, 내 머리 속에 들어 있는 한 권의 이야기.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 소설은 그 바람의 반대를, 그런 일이 생기게끔 쓴다. ‘마음 쓰지 않기를 바라지만’ 소설은 마음을 쓰고 쓰느라 그렇게 세세히 몇 장이 넘어간다. 사람이 많은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 몸을 실은 사람들은 인생의 쓴맛을 행복의 단맛으로 덮어보려는 상상으로 그 시간을 견디지만 소설가는 그 ‘쓴맛’을 잘 쓰고 싶어 탐닉한다. 그것이 소설의 세계 혹은 소설가의 세계. 

 

그러니까 나는 써야 하는 시는 안 쓰고 왜 소설을 기웃거렸을까. 그렇게 혼자 추운 겨울을 여행하는 동안 몰두할 뭔가가 필요해서였을까. 아니면 해독 불가능한 내면의 욕망이 모르게 나를 비집고 나와서는 나를 포박해서 끌고 가는 형편이었던 걸까.

 

다만 이 정도의 윤곽은 잡힌다. ‘우리는 생각할 것이 필요해서 그 사람을 사랑해버리는지도 모른다. 고로 나는 그 사람을 생각한다’라는 식. 그러니까 내가 지금 의미를 두어 생각하는 모든 것들은 그 무엇 하나를 받치고 있는 자동적이며 반사적인 필요조건인 셈.

 

나는 지금 강렬하게 갇히고 싶은 상태에 놓인 것이다. 그 누구와도 연락이 닿지 않는 상태, 모든 관계라든지 의무로부터 나를 숨기고 더 깊이 혼자 있고 싶은 마음. 그러려면 ‘그곳’에 갇히는 일이 최선일 텐데 그러기엔 아직 내겐 세상이 들춰낼 만한 그럴싸한 죄가 없다.

 

그럼 갇혀서 뭘 하려는 건데? 그 고립된 방 한 칸에서 늘어지게 잠을 자고 일어나 아무 할 일이 없는 상태에서, 커다란 캔버스 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거나 ABC부터 스페인어를 시작한다거나 하는, 뭐 그런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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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이병률(시인)

1967년 충북 제천에서 태어났다.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 「좋은 사람들」,「그날엔」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저서로는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바람의 사생활』,『찬란』 등과 여행산문집 『끌림』(2005) 등이 있으며 현재 '시힘'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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