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햇살이 흘러드는 고요한 필사실 안에서 수도사 하나가 기다란 탁자 앞에 앉아 끈질기게 작업하고 있다. 탁자에는 군청과 남청, 백연과 녹청, 선홍, 심홍, 진홍 등의 갖가지 물감 통, 그리고 귀한 금박?은박용 안료 상자들이 놓여 있다. 그가 작업하고 있던 페이지의 글자는 반짝이는 금색으로 채식되어 모양을 뽐내고 있다. 물감을 머금은 이 종이는 몇 시간만 지나면 수백 년 동안 찬란히 빛날 그림이 될 것이다.
흐릿한 기억의 렌즈를 닦아 다음 장면을 떠올려 보라. 15세기 중반 유럽의 중심지 부근 수도원이라기보다는 작업장이라고 할 수 있는 곳에서 사람들이 간단한 나무 기계 주위에 몰려 있다. 한 사람이 촉촉한 종이 위로 평평한 판이 내려와 누르도록 두툼한 나사를 돌리는 긴 손잡이를 당기고 있다. 잠시 뒤 나사를 반대로 돌려 종이를 고정시킨 틀을 들어내면 활자로 정돈되어 완벽하게 인쇄된 『구텐베르크 성경』 의 한 페이지가 눈앞에 펼쳐진다.
앞에 묘사한 장면은 18세기 부잣집 대저택 서재 속 책에 등장하는 이야기다. 천장까지 들어선 책꽂이 선반에는 가죽으로 장정한 책들이 빼곡히 꽂혀 있다. 그 목록을 보면, 지난 세기에 출간된 듯한 최초의 영어소설들, 여행기, 동식물을 아름다운 삽화로 묘사한 작품들, 로버트 훅의 귀한 『마이크로그라피아』 부터 새뮤얼 존슨 박사의 『영어 사전』 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책들이 다 들어 있다. 호메로스와 헤로도토스에서 오비디우스, 베르길리우스에 이르기까지 고전도 망라되어 있을 것이다.
그 뒤 1백년이 지나자, 책은 일반 가정에까지 보급되는 길이 열렸다. 아마도 사람들은 찰스 디킨스나 윌키 콜린스의 새로 나온 소설이나 다윈의 『종의 기원』 을 구할 수 있는 무디 도서대여점에서 빌렸을 것이다. 다윈도 고객 가운데 한 사람이었는데, 무디 도서대여점에서는 『종의 기원』 이 출간되기도 전에 사전 예약으로 5백 부나 주문했다. 빅토리아 시대의 응접실 피아노 옆에는 책들이 구비되어 있었다. 누군가의 머릿속에서는 향후 대량 판매시장이 될 아이디어가 불현듯 떠오르기도 했다.
문학은 물론이고 정치학, 역사, 여행기, 자연과학에 대한 책들도 모든 사람들이 읽을 수 있게 되었다. 1930년대에 교양서의 상징이 된 오렌지색 표지의 펭귄북스를 처음으로 출판한 앨런 레인은 창의력으로 승부하는 시대를 열었다. 페이퍼백 시대가 열리자 누구나 19세기 소설부터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 엘리엇의 시, 온갖 종류의 이야기와 스릴러 작품까지 두루 섭렵하며 배우고 과거를 탐구하고 끝없는 상상의 세계를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20세기 말이 되자 첨단시대에 어울리지 않게, 어린이뿐 아니라 어른까지 사로잡은 마법 이야기 시리즈가 전 세계를 강타했다.
사실 이는 유럽에 국한한 이야기이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고대 그리스?로마 예술과 르네상스 문학에 대한 숭배, 강력한 그리스도교 전통 때문에 다른 문명의 기록 유산들에 대해서는 깜깜했다. 가장 오래된 서사시로 꼽히는 인도의 『마하바라타』 와 중국의 철학서부터 수작업으로 제작한 아랍의 의학서, 천문학서, 수학서에 이르기까지 알려지지 않은 책들이 수두룩했다. 탁월한 중세 유럽의 시도서時禱書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문헌에 드러난 예술성은 끝없는 상상력을 시각적 이미지로 영원히 남기려 했던 인간의 소망을 보여 준다. 그것은 끝없는 탐구심이다. 이러한 초기 책들에 담긴 서체와 삽화의 아름다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배어 나오는 순수한 자신감과 힘을 알아보는 사람은 소설이든, 역사서든, 과학이론서든, 종교 문헌이든, 논쟁거리든 모든 책은 그 자체로 창조 행위라고 여긴다.
이 책에는 옛 책이든 최신 책이든 사람들의 삶을 바꾸고 인류의 정체성을 일깨운 작품들을 선정해 실었다. 이 작품들은 거울인 동시에 등불이기도 하다. 책을 통해 우리는 자신을 솔직하게 되돌아볼 수도 있고, 어두운 무지에서 깨어나 새로운 것을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책에서 위안과 현실도피를 찾는 만큼 지식에 대한 두려움을 깨닫기도 한다.
책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헤어지지 않을 친구를 사귀는 것과 같다. 누구나 어릴 때 바닥에 떨어진 책의 우연히 펼쳐진 페이지가 하필 제일 좋아하는 부분이었다거나, 어떤 소설은 하도 읽어서 책장이 너덜너덜해진 경험이 있을 것이다. 유구한 책의 역사에서 이제 전자책이라는 또 다른 장이 열렸지만, 많은 독자들은 책의 외형적 아름다움을 다시 발견하기도 한다. 그것은 책에서 얻는 여러 즐거움 중에서도 결코 사라지지 않을 즐거움이다.
현대에도 외형적으로 아름다운 책들을 펴내려는 현명한 출판인들이 등장했는데, 그 일에 열심히 매진하기를 바란다.
이 책에는 오늘날의 세계를 이룩한 많은 책들이 소개되어 있다. 이 책들은 현명하고 계시적이며 급진적이기도 하고 심지어 파격적이기까지 한데, 그 중에는 놀랄 정도로 세상에 영향을 미친 책도 있고, 여전히 귀감이 되는 책도 많다. 우리 인간을 적절히 대변한다는 점에서 보면, 물론 책마다 편차가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책이야말로 절대로 떠나보낼 수 없는 친구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책을 그토록 소중히 생각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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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서 77마이클 콜린스, 알렉산드라 블랙, 토머스 커산즈, 존 판던, 필립 파커 공저 외 2명 | 도서출판그림씨
인류를 이해할 수 있고, 나를 이해할 수 있고,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 사회문화적 맥락을 이해하고, 인류 문명의 성장 원인을 알 수 있다.
마이클 콜린스(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