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 제1장을 읽다 보면 마르크스가 "우리가 고찰하는 사회형태에서는" 등의 한정적 표현을 자주 쓴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물고기가 물을 보지 못하듯 우리는 우리가 사는 사회의 형태가 역사적으로 얼마나 특수한지, 다시 말해 우리가 얼마나 이상한 사회에 살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자본주의가 이상하게 보여야 자본주의가 제대로 보이는 겁니다. 정상적인 것의 기괴함을 보는 눈이 없으면 자기 시대를 비판할 수 없습니다. ( 『마르크스의 특별한 눈』 , 22~23쪽)
사실인지 모르겠지만 점점 더 두꺼운 책은 팔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래서 두 권 분량의 책은 한 권으로 내자고 하고, 한 권이라도 두꺼울 것 같으면 줄이자고 한다. 이런 시대에 고병권 저자는 ‘북클럽 『자본』’ 시리즈를 통해 칼 마르크스의 『자본』을 12권에 걸쳐 읽어내려고 시도했다. 격월마다 1권씩, 지금까지 총 3권이 나왔다. 중간에 인문 에세이 『묵묵』 도 출간됐다. 대단한 속도다. 이렇게 부지런하게 읽고 쓸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앎의 의지를 추동하는 것에 관해 들어봤다.
『자본』을 통해 우리 사회를 읽어내려는 시도
북클럽 자본 시리즈가 『다시 자본을 읽자』 , 『마르크스의 특별한 눈』 , 『화폐라는 짐승』 까지 3권 나왔습니다. 최근 칼럼집 『묵묵』 까지 펴내셨는데요. 어떻게 지내셨나요.
원래도 복잡하진 않았는데 이 책 덕분에 삶이 단순해졌어요. 딴 건 할 수가 없어요. 인간관계도 정리되고 있고요. 니체가 철학자가 된다는 건 군인같은 습관을 갖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철학자는 군인처럼 규칙적으로 해나가야 할 필요가 있죠.
그간 데이비드 하비라든지 이진경 등 여러 학자가 『자본』에 관한 책을 썼습니다. 고병권 선생님의 『자본』 읽기는 어떤 점에서 독특할까요?
이런 생각을 해요. 예수, 마르크스에 대해 누가 과연 새로운 말을 할 수 있을까요? 확인이 불가할 정도로 문헌이 많습니다. 그 자체가 1차 문헌처럼 느껴지는 2차 문헌도 있고요. 대부분은 『자본』을 요약해주는 책이죠. ‘북클럽 『자본』’ 시리즈는 요약이 아니라 오히려 부풀립니다. 12권이 쌓이면 자본 1권보다 더 두꺼울 거예요. 이렇게 쓰는 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자본』은 고상한 책이에요. 경제학의 시각으로 볼 수도 있지만, 근대적 주권이라든지 국가권력 문제로도 이 책을 볼 수 있어요. 상품 거래는 어떤 인간 관계를 전제하는지와 같은 사회학 주제도 담겨 있고요. 물신주의라는 우리 시대의 종교, 심리학을 다루기도 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가 속한 시대, 우리사회를 읽는 책으로서 저는 『자본』을 천천히 읽으려고 합니다. 『화폐라는 짐승』 에서 “상품은 스스로 시장에 갈 수 없고 스스로 자신을 교환할 수도 없다” 한 문장만으로도 몇 십 페이지씩 썼는데, 이렇게 한 구절을 이리 뜯고 저리 뜯고 천천히 되새기고 있어요.
두 번째는, 제가 관심이 가는 구절이 있어요. 이건 정말 마르크스다, 이렇게 느끼는 문장이 있는데요. 『자본』에 관해 이야기한 기존 책은 잉여가치, 이윤율 저하와 같은 개념을 읽는 건 많았어요. 노동력이 매매되는 장면에서의 슬픈 표정, 이런 구절에 주목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구절이야말로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해요. 『자본』이 과학적 책이라는 데 공감하지만, 또 한편에서는 과학을 넘어서는 책이 『자본』입니다. 『다시 자본을 읽자』 에서는 제가 역사성과 당파성을 이야기했죠. 앎, 앎의 질서가 있고, 그 앎을 떠받치는 영역이 있어요. 사회과학, 정치학에서는 법의 영역이라 할 텐데, 이걸 넘어서는 영역을 저는 읽어내려 했어요.
책 앞날개에는 북클럽 자본 시리즈가 ‘예리하지만 감성적인 비평’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자본』이 감성적인 책이라고는 생각해보지 못했는데요.
마르크스가 광학 이야기를 했고, 저도 조명 비유를 자주 사용하는데요. 『자본』 첫 문장의 동사가 ‘보인다’입니다. 우리 눈에 그렇게 보인다, 시각이 중요하다는 말이죠. 어떤 조명을 비추냐에 따라 다르게 와 닿아요. 거기서 앎의 의지가 드러나죠. 이게 당파성, 정서, 감성이겠죠.
제가 “두뇌는 심장의 내장”이라는 니체의 말을 인용하기도 했는데요. 니체가 자유정신에 관해 쓴 말입니다. 머리는 마음 가는 대로 가게 돼 있어요. 천재는 사기꾼일 수도 있고 과학자일 수도 있죠. 두뇌가 얼마나 논리적이고 방대하고 체계적인지도 중요하지만, 어디로 어느쪽 지식을 모았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마르크스에게 왜 잉여가치를 해명하는 게 그렇게 중요했을까요? 토마 피케티처럼 소득분배만 조사해도 양극화가 심하고 재분배를 강화해야 하고, 세금 정책을 쓰면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마르크스는 원천을 집요하게 좇을까요? 자본가에게 노동자가 얻어먹고 사는 게 아니라, 사실은 노동자가 자본을 먹여 살린다는 걸 밝히려는 의지가 있었던 거죠. 마르크스 마음이 여기에 가 있었던 거예요.
『묵묵』 문체가 차분하다면, 북클럽 '자본' 시리즈에서의 문체는 다정하고, 친절하고, 때로는 유머러스합니다.
쓴 시기 차이가 있어요. 『묵묵』 이 먼저 썼던 글이고, 북클럽 자본 시리즈는 지금 쓰고 있는데요. 유머러스한지는 모르겠어요. 그쪽이 목표이긴 하죠. 웃게 하지 않는 글이 우리를 좋게 만들 리 없다는 생각은 하거든요. 『모비 딕』 의 작가 허먼 멜빌이 충혈된 고래의 눈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어요. 고래가 표면에서 햇볕을 쐬는데, 눈이 충혈돼 있어요. 고래는 원래 표면에서도 숨 쉴 수 있으니까 햇볕을 쐬고 있구나,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 왜 충혈됐는지를 물어야 해요. 어쩌면 저 고래는 수압이 센 심해까지 갔다 왔기 때문에 눈이 충혈됐을 수 있어요. 심해까지 갔다 올 수 있는 존재와 내려갈 수 없기 때문에 표면에 있는 자는 다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밑에 갔다 왔다는 의미는 아니고요. (웃음) 다양한 문체를 조절할 수 있다면 대단한 거예요. 물론 제가 거기까진 못 갔을 테고, 『묵묵』 은 굳이 말하자면 아래 쪽에 있을 때 쓴 글이죠. 개인적으로는 필수 챕터에요. 여기를 통과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할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지금도 솔직히는 여기에 가깝죠. 사회가 어디로 갈지 모르겠고, 자본을 계속 써야 하니 눈 앞에 있는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계속 밑에 있으면 병들 거라 생각해요. 지금은 경쾌해졌다면 좋겠고, 쉽게 쓰려고 해요. 마르크스의 정신이기도 한데, 그가 『자본』을 쓸 때 어마어마하게 뜯어고치죠. 그 이유가 명확하게 독자를 의식했기 때문이에요. 독자를 위해 최대한 쉽게 쓰려고 했어요. 저도 가급적 제 생각이 쉽게 전해지면 좋겠어요. 글 쓸 때 마르크스 그림을 옆에 두고 보면서 “잘 쓸게요. 보채지 마세요.” 하며 쓰고 있어요. (웃음) 마르크스의 태도와 자세를 최대한 살리겠다는 마음이 있어요. 그건 마음이고, 실제로 잘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마르크스가 누구이며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
『묵묵』 에 실린 글의 주제 중 하나가 '앎이 삶을 구원할 수 있는가'인데요. 이 물음을 바꿔서 질문 드리겠습니다. 마르크스는 지금 현대인을 구원할 수 있을까요?
2008년에 쓴 그 글은 앎이 삶을 구원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앎이 어때야 구원할 수 있는지를 물었어요. 공부 많이 해봐야 인생 좋아지지 않거든요. 마르크스가 구원할 수 있을까, 이 물음 전에 우리가 어떤 감옥에 갇혀 있는지부터 알아야겠죠. 사람들은 마르크스가 그린 공산주의를 설명하라고 하는데요. 마르크스가 미래에 대해 언급하긴 했어요. 징후들. 그런데 이런 건 되게 모호합니다.
마르크스는 새로운 걸 창조한 사람이 아니라 기존의 것을 다르게 본 사람으로, 전복자지 창조자가 아닙니다. 혁명가라면 전복자로서 혁명가죠. 가치 평가 방식을 뒤집은 사람, 가치의 전복자죠. 자본, 잉여가치, 이런 용어가 마르크스가 만든 게 아니라 다 일상 용어였어요. 이걸 다시 보게 한 사람이 마르크스죠. 그는 우리가 얼마나 이상한 세계에 사는 것을 알게 해준 사람입니다. 마르크스에게 구원이 있다면 비판이라는 말과 통할 것 같아요. 구원의 고대 철학적 의미, 그러니까 초월적 메시아를 통해 날라가는 게 아니에요. 마르크스의 구원은 ‘깨어 있다’, ‘잠들지 않는’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우리 사회를 얼마나 낯설게 볼 수 있는가, 우리가 얼마나 역사적으로 특수한 시대에 살고 있는가, 자연스럽다 느꼈던 게 자연스러운 게 아니고 내 고통과 무관하지 않았다는 걸 깨닫는다면, 마르크스는 굉장히 좋은 논자라고 생각해요.
마르크스가 했던 말이 있어요. 글자 그대로 기억나진 않는데, 이런 맥락이었어요. 해방은 지배계급이 약해져서가 아니라 억압받는 자가 강해지는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고요. 고통이 없고 할 일 없는 세계가 구원이 아니라, 어리석은 짓을 깨닫게 되는 것이 구원이라 생각해요. 어떤 세계를 만들어 갈 것인지는 그 다음 문제겠죠.
마르스크가 『자본』 외에도 여러 저작을 냈고, 알튀세의 '인식론적 단절'이라는 개념에서 보듯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서 어떤 글을 계승하고 어떤 글을 버려야 한다, 이런 논의가 있었잖아요. 선생님이 생각하는 마르크스는 누구일까요?
루이 알튀세와 에리히 프롬은 같은 시기에 썼어요. 프롬은 인간주의적 독해를 하면서 『경제학 철학 초고』 텍스트를 많이 인용했고 알튀세는 거의 같은 시기에 인간주의적 독해와 단절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공산당 운동과 연관이 있어요. 흐루시초프의 인간화된 공산주의가 많이 퍼졌을 때죠. 알튀세는 마르크스가 포이에바흐를 비판한 텍스트를 인용하면서 형이상학적 태도를 반대하죠. 마르크스 텍스트에서 어느 시기부터 인간이 사라지고 세계에 대한 과학적 인식이 중요해진다고 말할 수도 있는데, 이런 독해가 당시 정세 속에서 수행한 역할이 있겠죠. 마르크스 자신의 단절로 볼 수도 있지만 저는 기본적으로는 알튀세가 행한 해석학적 단절이라 생각해요. 알튀세 스스로도 절단이라는 행위가 과도하게 독해되고 있다고 이후에 말했고요. 새로운 해석학적 프레임은 뭔가 새로 보여주기도 하지만, 못 보게 하기도 합니다. 알튀세처럼 읽으면, 마르크스의 초기 텍스트는 볼 필요가 없나요? 이런 문제가 당연히 제기되고, 소외 개념은 『자본』에서도 여전히 중요하게 나와요. 이런 점에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는 게 좋지만 어떤 해석 자체가 절대시될 필요는 없겠죠. 저는 프롬이나 알튀세 모두 중요한 독해를 했다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고병권의 마르크스는 뭐냐는 질문이 이어질 텐데요. 글쎄요. 딱 한 마디로 이거라고 프레임을 제시하고 싶진 않아요. 제게 그런 자격도 없고요. 제가 마르크스의 앎의 의지 이야기를 했는데, 앞서 니체 말도 인용했죠. 마음 가는 쪽으로 머리가 간다고요. 머리는 늦게 도달할 수 있어요. 이전 텍스트도 중요하다 생각하고, 저는 마르크스의 ‘당파성’, ‘앎의 의지’라는 개념을 중요하게 보려고 해요.
제가 부커진 R에 마르크스 전기에 관해 쓰면서, 귀족적 마르크스, 무자비한 마르크스, 공공연한 마르크스, 국적 없는 마르크스, 공부하는 마르크스, 이런 다양한 마르크스를 어떻게 봐야 하는가를 다룬 적이 있습니다. 결국은 다 통해요. 귀족적 마르크스는 따옴표를 쳐봐야겠지만요. 무자비한 마르크스는 법칙을 넘어서까지 보려 하는 태도, 공공연한 마르크스는 음모와 대비되는 면모, 공부하는 마르크스는 지식을 축적하는 수준에서가 아니라 우리가 지식을 쌓아온 근거까지 내려가는 모습, 무자비하다는 의미와도 통하죠. 마르크스에게 비판은 근거 자체를 깨부수는 다른 조명을 알려주는 그런 측면이 있어요. 한 마디로 뭐라고 부를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비판가’ 정도가 떠오르네요. 비판이 공부이기도 하고 혁명이기도 하니까요.
북클럽 『자본』시리즈를 읽으면 공부하는 마르크스가 떠오릅니다. 1852년에서 1864년에 이르기까지, 마르크스는 스스로 “공적 무대에서 서재로 물러났다.”는 글을 썼습니다. 정말 마르크스는 서재로 물러났을까요, 아니면 서재로 진격한 것일까요? 마르크스의 서재는 혁명으로부터 퇴각한 곳인가요, 혁명이 일어난 곳일까요? 서재의 마르크스, 대영박물관의 마르크스, 늦은 새벽까지 레모네이드 한 잔을 들고 밤을 하얗게 태우곤 하던 마르크스. 그의 삶은 우리에게 익숙한 혁명가의 이미지를 수정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요? 혁명과 공부는 어떤 관계일까요.
공부하는 마르크스를 이야기하면서 공부란 새벽 4시라는 표현을 썼어요. 제가 주로 글쓰는 시간이기도 한데요. 1857~1858년 대공황이 닥쳤어요. 사람들이 혁명이 일어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죠. 그렇다면 무기를 찾고, 말을 몰아야 하는데 마르크스는 서재로 갔단 말이에요. 당시 프루동을 비롯해 사회에 비판적 목소리를 내는 많은 이데올로기가 마르크스가 보기엔 유해했습니다. 대타협, 이런 식의 주장이 많았어요. 마르크스는 이런 조화론자를 향한 분노가 컸죠. 빨리 팜플릿이라도 써서, 급하게 스케치라도 해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혁명이 어때야 하는가로 접근할 때, 마르크스는 기본적으로는 글 쓰는 사람이에요. 부인의 증언에 따르면, 마르크스가 시거 물고 레모네이드 한 잔 든 채로 어마하게 글을 쓰다 새벽 4시에 잠들었다고 합니다. 노동자는 9시나 10시에 나오겠죠? 다시 말하면, 어떤 의미에서는 앞선다는 거죠. 공부란 도래할 걸 미리 읽는 거예요. 여기서 어폐가 있을 수 있습니다. ‘미리’라는 말에서 잘못하면 점쟁이가 계시하는 것처럼 받아들일 수도 있는데, 공부란 이미 와 있는 걸 예견하는 거예요. 니체를 염두에 두면, 저는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사건이 방황하고 있다는 표현을 씁니다. 이미 만연하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포착되고 있지 않는 걸 읽어낸다, 이게 공부입니다. 헤겔과는 반대죠. 헤겔은 늦게 와요. 일어난 뒤에 성찰하고 반추합니다.
뒤에 4권에 쓰겠지만, 마르크스와 헤겔이 여러 모로 대비되죠. 둘은 똑같은 구절을 갖다 쓰면서도 다르게 써요. 대표적인 게 “여기가 로도스섬이다, 여기서 뛰어봐라”입니다. 헤겔은 『법철학』 에서 시대의 높은 장벽을 환기시키면서 시대에 갇혀 있다는 의미로 썼어요. 마르크스는 야유하는 말로 쓴 게 아니라 돌파의 지점, 입증해야 할 지점으로 씁니다. 혁명이 계속 패퇴하면서 정세가 반동화될 때, 이 정세를 도약하기 위해 한 걸음 물러난 때로 본 거죠. 여기가 로고스의 섬이고 이제 넘어서야 할 때라고요. 정말 다르죠.
공부란 뒤로 물러설 때조차도 도움닫기라는 걸 알고, 공부란 그게 어떤 가능성이 있는지를 읽어내는 시도입니다. 어떤 분야든,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시대를 넘어서는 사람이죠. 학문하는 노동자라고 니체가 썼지만, 사상가는 아인슈타인이든 다윈이든 마르크스이든 그들이 위대한 건 잘 정리해서가 아니라 새롭게 도약해서에요. 앞서 가는 건 지도한다는 뜻이 아니에요. 내 말 따르라, 이게 아니라 이미 와 있는 걸 읽어내는 것뿐이죠.
가상화폐, AI, 최저임금 여전히 유효한 마르크스의 지적
3권 주요 주제가 화폐입니다. 화폐의 출현은 공동체 해체와 관련 있다는 게 마르크스의 입장이고, 선생님께서는 오래 전에 내신 『화폐, 마법의 사중주』 에서도 설명했습니다. 비트코인을 비롯한 가상화폐를 보시는 선생님의 관점이 궁금했습니다.
솔직히 잘 몰라서 함부로 말할 수 없는데요. 화폐 공부한 지도 오래 됐고요. 예전에 가상화폐 관련 토론자로 초대받아서 발제문을 쭉 읽었던 적이 있습니다. 발표하는 분이 새롭다고 말한 게 제게는 전혀 새롭지 않았어요. 그 분이 새롭다고 이야기한 첫째가, 국가 통제를 받지 않는 사적 화폐라는 점이었는데요. 원래 사적 화폐는 많았어요. 오히려 화폐주권을 말하면서 국가가 통일해야 한다고 나온 게 얼마 안 됐죠. 심지어 오늘날에도 중앙 화폐 아닌 화폐가 많죠. 각종 페이부터 시작해서, 게임 머니, 공동체 화폐가 그렇죠. 두 번째가 가상화폐라는 점인데요. 역시 새롭지 않아요. 16~17세기에 사용한 리브로화는 없어진 화폐였어요. 실제 사물은 없고 환전 대상으로, 계정으로만 썼죠. IMF의 SDR이라는 특별인출권도 추상적 화폐거든요. 그리고 원래 화폐가 가상적이에요. 사물성과 혼동되면 안 되죠. 마지막으로 한 가지가 암호화폐라는 건데, 이건 좀 새로웠어요. 화폐는 금본위라든지, 국가 권력이 보장하든지 하는데 수학적 모델을 써서 가치를 담보한 게 그나마 새로웠어요. 나머지 기능적 측면에선 거의 새롭지 않았어요.
예전에 JTBC에서 가상화폐 관련 토론을 한 적이 있었죠. 저는 방송을 다 보진 않았고 예고만 봤는데요. 반대하는 분의 주장 중에서 그런 표현이 있더라고요. 이건 화폐가 아니라 금융상품이라고. 그 말도 좀 웃겼어요. 그 분은 화폐를 뭐라고 생각하기에 화폐가 아니라 할까… 화폐의 화폐성이라는 말이 있는데, 국제금융시장에서 결재수단으로서 한국 화폐는 화폐성이 미국 재무부 채권보다 낮죠. 금이라든지 구리가 어떤 나라의 중앙은행 화폐보다 화폐성이 높을 수 있고요. 물론 안정적인 척도가 불안정하니까 그런 표현을 썼겠지만, 화폐 자체가 불안정해요. 국제 환시장만 가봐도 알죠. 유로화 통합되기 이전 파운드화조차 투기 대상이 되어서 가치가 급락한 적이 최근에 있었죠. 금융상품과 화폐는 반대말이 아니에요. 화폐가 금융투기 상품이 될 수 있어요. 물론 비트코인 불확실성이 크고, 그런 점에서 투기성이 크죠.
정리하자면 가상화폐는 기능에서 새로운 게 없고요. 화폐로서 과연 절실하게 필요했는지 모르겠고, 새로운 것은 블록체인 기술인데 요건 흥미로워요. 그런데 비트코인이 아니면 블록체인 기술을 개발하지 못하나, 하는 생각도 들어요. 블록체인 기술에 과문해서 모르겠는데, 모든 거래 기록이 남는다더라고요. 근거 없는 상상을 해봤어요. 남태평양의 쿨라 시스템에서 썼던 화폐 시스템이 생각났어요. 여기서는 여러 번 돌수록 가치가 올라갑니다. 왜 올라가냐 하면, 여러 부족을 관통할수록 연대의 상징이 되거든요. 그래서 경찰관이 공안적 시각에서 기록하는 것 말고, 신원이 아니라 사연을 화폐에 기록해보면 어떨까 하는 상상은 해봤어요. 블록체인 기술이 거래에 사연을 담을 수 있다면, 화폐가 갖지 못하는 성격을 블록체인이 입혀줄 수 있다면, 공동체 화폐에 유용할 수 있을 듯해요. 지금은 가상화폐가 소란스러운 거에 비하면 대단해 보이진 않습니다. 기술을 발전시키면 새로운 여지는 있을 거 같은데, 왜 그쪽으로 안 가는지는 모르겠네요.
9권에서 등장할 것 화제인데, 질문 드리겠습니다. 최저임금 관련한 논쟁이 뜨겁습니다. 임금에 관해서 마르크스는 어떻게 이야기했나요?
마르크스에게 임금은 노동력 가치에 대한 지불로, 상품값을 치르는 거죠. 그런데 실제로 노동자가 받는 임금은 일에 대한 대가가 아니라고 말해요. 노동력을 임대업에 비유하죠. 우리가 집을 살아보고 나서 값을 정하지 않죠. 계약서를 쓰고, 마음에 들든 안 들든 지불합니다. 똑같아요. 원래는 자본이 제품 만들 때 기계, 원료 살 때처럼 그날 지불했어야 하죠. 그런데 마음 좋은 노동자가 그렇게 못하고 일한 다음에 받기로 해요. 이렇게 하다 보니 체불 임금이라는 게 생기죠. 체불 임금을 마르크스가 재밌게 표현하는데, 노동자 입장에서는 어음만 받고 떼이는 거예요. 우리나라도 체불 규모가 몇 조 단위라고 하죠. 어마어마합니다. 노동자가 부도난 거예요. 이점만 봐도 일한 거에 대한 대가가 아니라는 게 맞죠.
당연히 줘야 하는 거고 얼마를 줘야 하는가가 문제인데, 렌터카를 생각해봅시다. 사용한 만큼 쓰고 원상태로 복구해야 하죠. 노동력도 썼으니까 복구해줘야 합니다. 복잡한 계산이 아니라, 이 사람이 먹고 살 만큼이겠죠. 마르크스는 계속 노동력을 유지할 수 있는 비용이라 했습니다. 여기에는 먹을 거, 입을 거, 집 살 거, 그리고 기술 익히려면 교육비도 필요하고, 자본주의가 한 세대만 하고 망할 게 아니니까 다음 세대 자식 교육비도 필요할 거고, 정신적 능력도 중요하니까 여행이라든지 독서에 쓸 돈도 필요하고, 이런 게 포함되겠죠. 그렇다면 이게 한도 없을 텐데 어떻게 계산하느냐? 여기에 대해서 마르크스는 사회마다 대체로 정해져 있다고 평가합니다.
최저임금 발상에는 양면이 있습니다. 첫째로는 복지적 측면이 있죠. 또 한 편에서는 미니멈이라는 의미가 있어요. 최저임금위원회가 기초 생계 조사를 합니다. 하위 40퍼센트를 염두에 두고 산정하거든요. 정상적 노동자 품질 아니라 최소라는 의미인데요. 우리는 최저임금을 준다고 자랑하잖아요. 편의점 같은 데서 ‘임금 협의 가능’이라고 하면 안 줄 수도 있다는 의미라면서요? 최저임금 기준으로 주면 150~200만 원이고, 점주는 그 만큼 못 받는다고 말하는데 그렇게 계산하면 안 된다고 마르크스가 실제로 말했어요. 파트타이머가 30일 일하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하루에 짧게는 한 시간에서 네 시간 일하는데, 이 돈으로 살 수 없거든요. 그러니 두 탕, 세 탕 뛰어야 할 수도 있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마르크스는 시급은 훨씬 높아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연장 근로도 더 줘야 하는 게 당연해요. 실제로 150% 주잖아요. 과로하면 어느 시점부터는 복구가 안 되거든요. 비용이 훨씬 올라가요. 연장근로가 150%이듯 최저임금도 시급이기 때문에 더 줘야 합니다.
최저임금 관련해서는 다른 문제가 있어요. 시급, 성과급으로 계산하면 사람이 한시간짜리 두시간짜리, 물건 100개짜리 이런 식으로 말 그대로 인간이 파트 타이머가 되어버립니다. 시간 존재로 돌변하죠. 이게 사물화인데요. 사물화되면 막 쓸 수가 있어요. 최저임금을 바라볼 때 어떤 존재가 어떻게 삶을 살고 능력을 발휘하는지 시각으로 볼지, 자본주의에서 원료 쓰고 기계 쓰듯 얼마나 지불해야 하는지로 볼지는 완전히 시각이 달라요. 지금 논의는 잘못하면, 얼마짜리로 갈 수 있어요. 이렇게 되면 하청 부리기 너무 좋은 사회가 되어버리죠. 최저임금 관련해서 기업이 한국에서 버틸 수 있을지 논란이 있는데, 그런 조명으로 보는 것과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이고 어떤 사회이고 어떤 생산 양식으로 인간이 살아갈지를 고민하는 게 필요하다고 봅니다.
노동력 상품화는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지만요.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게, 최저임금이 아니라 정상임금을 줘야 하는 거예요. 마르크스는 최저임금이 감성적 차원에서 주는 게 아니라, 정상 가격을 지불하라는 의미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물건에 지불하듯, 노동자에게도 제대로 지불하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최저임금을 통상임금처럼 이해하는 면이 있는데, 말 그대로 최저임금은 더는 내려가지 말라고 있는 거거든요.
AI, 자동화, 일자리 소멸에 관해서도 마르크스가 이미 말하지 않았나요. 기계화가 이윤율 저하로 이어진다고 설명한 게 마르크스 위기론의 독특한 점인 듯합니다.
위기는 바깥에서 올 수 있어요. 공룡이 행성에 의해 멸망한 게 사실이라면, 이건 외부에서 온 위기인데요. 이런 위기는 천문학의 대상일 수 있지만 마르크스의 관심사는 아닙니다. 『자본』이 관심 있는 위기는 내재하는 위기에요.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위기는 강화됩니다. 산업 공황, 화폐 공황, 이윤율 저하, 여러 공황이 있죠.
자동화와도 관계 있는 건 이윤율 저하인데요. 가변자본에 대한 투자가 줄고 자동화가 일어나는 걸 마르크스적 용어로는 유기적 구성이 증대한다고 표현합니다. 이렇게 되면 이윤양은 증대하지만 이윤율은 떨어진다고 보죠. 마르크스는 이윤율 저하를 상쇄하는 요인도 말했어요. 그래서 기계화 때문에 자본주의가 망할 거라 이야기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런 식의 주장은 리카도나 멜서스죠. 멜서스의 경제적 버전이 리카도입니다. 마르크스는 두가지 방향을 다 보여줬어요. 마르크스는 자본이 위기를 극복하면서 위기를 창출한다는 말을 썼어요. 더 큰 위기를 낳는 방식으로 위기를 극복한다, 이상한 말이죠. 위기가 있는데 망한다는 건지 아닌지 모르겠죠?
실업률이 계속 높아지고 AI가 노동을 대체하면 어떻게 할까요? 대다수가 구매력이 없어지겠죠. 제가 대학 시절 김수행 교수님에게 던졌던 질문이, 완전 기계화가 되면 어떻게 되는지였는데요. “간단하지, 물건을 공짜로 나눠주거나 그게 하기 싫으면 문 닫아야지.”라고 답하셨어요. 물론 그렇게까지 가진 않겠죠.
마르크스는 기계가 가진 가능성을 봤어요. 노동 시간의 단축이라는 가능성을 봤죠. 더 나아가서,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에서는 노동 안 하는 사회로 풍요로운지를 정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썼습니다.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은 얼마나 열심히 일하느냐가 부자이냐 아니냐인데, 마르크스는 기계화되면 다른 가능성도 생긴다고 본 거죠. 노동하지 않는 시간으로 부를 잴 수 있고, 이렇게 됐을 때는 노동 시간 자체의 의미도 달라질 겁니다. 지금은 자유시간을 누리기 위해 노동하지만, 나중에는 타자를 위한 가치 창출이 아니라 나를 훈련하는 의미가 중요해질 수 있어요. 이렇듯, 기계의 다른 용법이 있을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런 점에서 공유경제, 공유라는 가치가 나쁘진 않아요. 문제는 어떻게 비자본주의로 전유할까인데, 앞서 말한 블록체인 기술도 왜 그렇게만 쓰는지 모르겠어요. 인터넷이 군사용으로 개발됐지만, 촛불혁명을 가능케 하듯이, 아직도 우리는 기계와 사귀는 법을 잘 모르는 듯해요. 지금 AI가 어떤 가능성이 있을까? 아마 마르크스는 기계의 다른 용법을 물었을 거예요. 기계화되면 자본주의가 망한다고 마르크스가 선언하지 않았어요. 공산주의로 이행 경로가 정해져 있지 않듯, 자본주의도 영원하라는 법이 없고, 잠재성을 얼마나 읽어내고, 어떻게 만들어가느냐 따라 역사는 달라집니다. 기계의 어떤 용법을 발명해느냐가 중요하겠죠.
『언더그라운드 니체』 , 『다이너마이트 니체』 등 이전 책에서는 니체를 다뤘습니다. 니체와 마르크스는 선생님께서 자주 인용하는 두 거장인데요. 흥미로운 지점이라면, 니체가 마르크스를 비판했고 실제로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지점이 약간은 다릅니다. 두 사람이 실제로 만나 세기의 대토론을 했다면, 선생님은 누구 편에 설까요?
니체가 마르크스에 관해 언급했다는 구절이 『나의 누이와 나』에 있다는데, 전혀 근거가 없습니다. 그 책은 니체가 죽고 나서 어떤 사람이 니체 원고라고 주장하여 내놓은 건데, 문헌학적 근거가 없고 저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니체가 사회주의자를 비판한 대목은 많아요. 대표적인 인물이 듀링인데, 듀링은 마르크스도 비판했어요. 저는 오히려 보면 볼수록 니체와 마르크스가 통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아요. 두 사람이 영역은 다르지만 모두 근대적 가치를 비판했죠.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을, 니체는 도덕을 비판했어요. 두 사람이 경멸하고 극복해야 할 존재를 노예로 봤다는 점에서도 같았고요. 마르크스는 부르주아를 돈의 노예라 생각하고, 임금인상만을 요구하는 노동자도 노예라고 봤어요. 쇠사슬을 황금사슬로 바꿀 뿐이라는 거죠. 기질이 마르크스는 다혈질이고, 니체는 세게 말하는 거에 비해서는 조금 소심한 듯한데 그래서 한 방 쓰기는 쉽지 않았겠다는 생각은 들어요. (웃음) 그렇지만 조금 거리 두고 편지 주고 받았으면 두 사람이 동시대를 비판하면서 낄낄댔을지도 모릅니다. 펜팔 하면 좋았을 사이?
책을 내면서 독자와 직접 만나고 계신데요. 선생님께서 처음 대학생 시절 『자본』을 읽었을 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어떤 점이 같고 어떤 점이 다를까요?
두 가지 생각이 함께 떠올라요. 하나는, 2008년쯤 일입니다. 수유너머에서 한 대학생이 『경제학 철학 초고』를 읽고 있더라고요. 그때도 마르크스를 읽는 일은 이상한 일이었어요. 사회주의가 망한 지가 언제인데, 화석화된 책을 읽는 느낌? 물론 그때 약간 붐이 불었어요. 『게 공선』 이라는 일본 프롤레타리아 문학과 세계 금융위기 때문에 『자본』이 다시 조명되는 시점이었는데, 여하튼 신기했어요. 제가 재밌냐고 물으니까 재밌대요. 뭐가 재밌냐니까, “노동자는 빵을 위장으로만 느낀다. 빵의 향기도, 촉감도 못 느끼고 배고픔으로만 먹는다.”는 구절이 있는데, 이게 소외 개념이거든요. 마르크스는 자본가도 똑같다고 썼어요. 보석의 광채에는 관심 없고 가격에만 관심있다고요. 자본주의가 인간을 이렇게 만든다는 건데요. 노동은 동물이 아니라 인간이 하고, 그런 점에서 인간의 우월성을 보여주는 것 같은데, 왜 인간은 노동할 때 슬프고 힘들고 동물로 돌아갔을 때, 그러니까 먹고 자고 놀 때가 행복할까, 이게 소외입니다. 그 대학생이 자기도 그렇대요. 편의점에서 일할 때 너무 힘들고, 식사할 때도 위장으로 먹었다고요. 깜짝 놀랐죠. 오히려 마르크스를 못 느낀 건 내가 아닐까? 저는 대학 때 읽었지만 이념으로 읽은 거죠. 니체가 “피로 쓴 건 피로 읽어야 한다”고 했는데, 어쩌면 요즘 젊은 사람들이 이렇게 읽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하나는 사회 전체적인 틀에서는 『자본』과 사람 사이의 긴장 관계가 예전 같지는 않은 거 같아요. 아무리 좋게 봐도, 『자본』은 좋은 책 중 하나이고, 더 심하게는 그마저도 안 되는 책이죠. 예전에는 불온했다가 이제는 낡아버렸다고 해야 할까요. 최대한 잘 봐줘야 고전인데, 고전이라는 말에는 더는 우리 시대의 책은 아니라는 의미가 있죠. 제가 대학 다닐 때의 긴장감은 없어졌죠. 그때는 아직 읽지도 않았는데, 드는 긴장감이 있었어요. 예감을 하는 거죠. 결별 통보할 때, 아직 상대방이 말 안 했는데 알 것 같은, 공기에서 느껴지는 그런 예감이라는 게 있잖아요.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읽을 때 저 책에 뭔가 있을 것 같은 예감, 이런 게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자본』 접할 때도, 어떤 긴장감이 있었어요. 이 책을 읽으면, 물들지도 모른다, 의식화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요. 그럼 안 읽으면 되는데, 이 책에 묘하게 끌리고 계속 알고 싶은 매력이 있었어요. 자본이 가졌던 매력은, 좋아하게 만드는 쾌락만 있는 게 아니라 두려움도 함께 있어요.
저희 때는 독서회 사건이 많았습니다. 『역사란 무엇인가』 를 읽고 잡혀가기도 했죠. 지금도 독서 클럽이 많고, 그중에서는 책을 읽으면 인생역전 할 수 있다고 하는데, 예전에는 진짜 책이 사람을 바꿨나 봐요. 독서가 공안 사건인 시대였죠. 운동권만이 아니라 안기부도 책을 신뢰했고, 책에 대한 신뢰가 이렇게까지 있었던 시대가 있을 정도였는데 지금은 좀 변했죠. 지금 우리 시대 책읽기, 과연 주체성의 생산이 될까요? 주체성의 생산은 꿈이 바뀌는 건데요. 『자본』은 한때 주체성을 생산했던 책이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있을 순 있지만 우리 시대 그걸 기대하기에는 어렵다는 생각은 들어요. 또, 모르죠. 언제 누가 어떤 책을 읽어서 바뀔지는요. 근로기준법이 한국 노동 운동에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리라고는 법 만드는 사람은 생각도 못했을 거예요. 마찬가지로 헌법, 성경, 그밖에 어떤 책을 읽고 뒤집어질지는 몰라요. 어떤 열망 속에서 읽힐지, 책 읽는 배치가 중요하겠죠. 다만 지금은 그리 좋은 배치가 아니라는 느낌은 들어요.
독립서점, 독립출판물 등 개인의 경험을 책으로 펴내는 진입 장벽이 많이 낮아졌습니다. 굳이 책을 내지 않더라도 다양한 플랫폼에서 쓴 글이 유명해져서 유명 작가가 되기도 하고요. 여러 해, 다양하게 책을 내신 저술가 입장에서 저술 환경의 변화, 어떻게 느끼시나요.
중요한 질문이라곤 생각하는데, 답하기에 저는 안 좋은 작가입니다. 페이스북도 안 하고, 어떻게 내세우고 어떻게 글이 퍼져 나가는지 잘 알지 못해요. 글쓰기 일반에 관해서 많이 생각합니다. 한때는 사회학, 인문학, 철학 한다는 말 많이 했는데 요즘은 문학한다는 말을 많이 써요. 『묵묵』 도 문학, 에세이로 낸 책이고 이제는 사회과학 철학보다는 생각을 글로 쓰는 존재, 생각을 그림으로 그리는 사람인가 보다 하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쓰고 어떤 매체에 쓸지에 관해서 고민은 깊은데, 해오던 방식이 책 쓰기라 새로운 형식의 글쓰기에 관해서는 잘 몰라요. 내 영역, 하던 것에서라도 잘해야 하지 않을까요? (웃음)
건강 상태 때문인지 고립되고 싶은 마음은 있어요. 글을 쓰거나 읽을 때도, 적정 규모의 사람이 좋아요. 제가 선포할 게 아니니까요. 생각이 멀리 퍼지는 건 좋지만, 제게 5천 만이 알아야 할 생각이 있지 않아요. 그러면 소명의식을 갖고 사도가 되어서 퍼뜨리겠죠. 그렇게까지 아는 게 없고, 작은 몇 가지 떠올린 게 있고 몇 사람과 이야기 나누고 싶은 정도예요.
지금 두고 있는 다른 관심사나, 다른 책 출간 계획은 있을까요?
북클럽 『자본』 때문에 생계도 접은 판에 딴 책을 쓸 수는 없죠. 마르크스에 대해 뭔가 해보겠다 해서 쓴 것도 있지만, 한편에서는 이 책이 훌륭한 도약대가 되어줄 거라 생각해요. 공부하는 습관과 관련해서 군인 같은 삶이 붙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작업을 마치면 마침 50세가 됩니다. 새롭게 시작하기 좋을 것 같아요. 죽을 때까지 공부할 건 많이 있어요. 공부할 주제가 떨어진 적은 없고, 다 못하고 죽을 게 뻔한데 마음 속에 둔 주제는 몇 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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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자본을 읽자고병권 저 | 천년의상상
역사학자 홉스봄 역시 마르크스의 『자본』이 나오면서 우리 시대를 자본주의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다시 자본을 읽자』의 저자 고병권에게 마르크스의 『자본』이 흥미로웠던 것은 이런 개념적 사항보다는 문제를 바라보는 ‘마르크스의 눈’ 때문이었다.
손민규(인문 PD)
티끌 모아 태산.
튜브
2019.01.22
저를 바꿀 독서를 해본 적이 있었나 생각해보게 되네요. 기사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