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스플래쉬
좀 짠돌이였던 할아버지는 내 필통에서 몽당연필을 보면 다 쓴 모나미 볼펜을 가져왔다. 짤막해진 연필의 몸체에 모나미 펜대를 끼우며 “여봐라, 순식간에 꺽다리가 됐지!” 뿌듯해 했다. 나는 할아버지에게 들키기 전에 몽당연필을 버리지 못한 걸 후회하며, 원수를 보듯 몽당연필을 째려봤다. 필통에도 들어가지 못할 만큼 ‘가짜 키’로 꺽다리가 된 몽당연필이 싫었다. 옷을 기워 입은 것처럼 창피했다. 몽당연필에 비해 새 연필의 길쭉한 느낌, 손에 쥐고도 한참이나 위로 뻗어있는 나무의 곧은 모양새는 얼마나 좋았던가. 필통에 넣어놓으면 몸통에 그려진 그림이나 무늬가 오롯해서 폼이 났다. 나는 할아버지 몰래 몽당연필을 내다버리곤, 잃어버렸다고 곧잘 거짓말을 했다. 무엇이 귀하고 무엇이 흔한지 구별할 줄 몰라 그랬다.
지금은 몽당연필을 보면 무조건 감탄한다! ‘몽당연필이네! 귀여워!’ 탄성과 함께 손이 먼저 연필을 잡는다. 새끼손가락만큼 작아지기까지, 이 연필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종이 위에서 걷고 달렸을까. 누군가의 손아귀에서 스케이트를 타듯 종이 위를 긁적이던 숱한 밤, 그리고 낮이 필요했으리라. 그 시간을 충분히 보낸 연필들만 ‘몽당’이라는 작위를 받을 수 있다. ‘몽당’이란 누군가의 품이 들고, 시간이 깃든 후에 붙여지는 말이다.
그런데 누가 처음으로 “물건의 끝이 닳아서 뭉툭하게 몽그라지거나 몽그라지게 하는 모양”을 두고 ‘몽당’이라 불렀을까? 말과 뜻이 이렇게나 알맞다니. ‘몽당’이란 말을 쓸 수 있는 사물이 더 궁금해 사전을 뒤적인다.
“몽당비, 몽당붓, 몽당치마, 몽당머리, 몽당손, 몽당수염, 몽당숟가락…”
찾아 놓은 낱말을 공책에 써놓고 읽어본다. 이건 정말 소리 내어 발음해 보지 않으면 모른다(부디 소리내어 발음해 보세요!). 이 사랑스러움을! 정말 끝내주게 귀여운 소리가 나는 말들, 이 어여쁨에 발을 동동 구르게 된다. 한번 발음해 보는 것만으로도 시가 되는 말들이 있다. 가만 보니 ‘몽당’ 뒤에 오는 낱말은 죄다 순한 것들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뭉툭해지거나 짤막해지는 것, 무뎌지고 순해지는 것들. 이 몽당이들! 이 못난이들!
요새는 이상하게도 낡고 닳은 물건에 더 마음이 간다. 멀쩡한 물건은 아무렇지도 않게 휙휙 잘도 버리면서, 구멍이 난 청바지는 버리지 못하고 옷장에 모셔 둔다. 헤진 속옷이나 구멍 난 양말, 닳고 닳은 냄비, 나와 오랜 시간을 보내 상태가 안 좋아진 것들에게 마음이 약해진다. 버리더라도 충분한 ‘숙려 기간’을 거친 뒤에 버린다. 최근에는 좀 우스운 버릇도 생겼다. 다 쓴 공책을 새 공책으로 바로 바꾸지 못하고, 한 달 가량 새 공책과 헌 공책을 같이 들고 다니는 버릇이다. 그 한 달의 시간을 나 혼자서는 ‘공책의 장례를 지내는 일’이라 부른다. 오랜 시간 내 복잡한 생각과 투정을 받아내며, 제 할 일을 다 한 공책에게 나름의 예를 갖추는 일이랄까.
제 존재를 다 쓰이고, 오도카니 누워있는 몽당연필 앞에서 생각이 많아진다. 사람 역시 ‘몽당이’로 태어나 ‘몽당이’로 죽는 게 아닐까. 나 역시 날마다 몽당이가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나이 들면서 키가 조금씩 줄어드니까. 그러니까 할머니 할아버지는 ‘몽당사람’이라 부를 수도 있겠지. 그게 뭐든 조금씩은 닳고 있다. 시간도, 몸도, 즐거움의 한계치도. 사랑도 그런 게 있을지 몰라. 흘리고 퍼주고 부비고 쏟아내다, ‘몽당사랑’이 되는 일. 아, 몽당사랑이라니―. 왠지 싫다. ‘몽땅 사랑’이라 바꿔 말할까. 나쁘지 않네. ‘몽당’과 ‘몽땅’은 친족관계일지 모르니까.
박연준(시인)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나 동덕여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4년 중앙신인문학상에 시 '얼음을 주세요'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속눈썹이 지르는 비명』『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가 있고, 산문집『소란』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