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력하게 다가올 정도로 불분명한 사운드가 작품 전체를 지배하나 아티스트의 자율성은 도리어 대담하고 명확하다.
첫 번째로, 은 길다. 물론 커트 바일에게 한 시간을 넘는 작품 길이, 10분에 쉽게 달하는 곡 길이는 어색한 존재가 아니다. 커트 바일의 레코드들은 지속적으로 길어져 왔다. 아티스트를 스타덤에 올린 작품 이후, 오프닝과 클로징 트랙이 각각 10분 내외로 구성되고 상당한 길이의 곡들이 작품 곳곳에 들어선 가 등장했으며 4분 미만의 곡으로는 인스트루멘탈 트랙 'Bad Omens' 하나에 그쳤던 이 이어 나타났다. 그러나 은 그런 경향 가운데서도 재생 시간이 가장 긴 작품이다. 79분의 시간 내에 10분 안팎의 곡이 셋이나 들어서 있으며 대다수의 곡 역시 5분 내외로 구성됐다. 이 앨범은 분명 긴 음반이다. 두 번째로, 작품은 모호하다. 물론 모호함 또한 커트 바일에게 친숙한 속성이다. 커트 바일의 음악은 자주 몽롱한 사이키델리아 속에서 불명확한 모습을 보여왔다. 그러나 그 사이키델리아 안에서도 선율의 존재를 명확하게 구성하고 컨트리, 포크의 정형을 갖추었던 전작들과 비교해 의 형상은 어수선하다 싶을 정도로 모호하다. 트랙의 전면에서 곡을 적극적으로 주도하는 요소가 많지 않을 뿐 아니라 대개 에너지를 상실한 채로 몽환의 공간을 횡행하며 흐리멍덩한 형상을 내비친다.
그렇기에 앨범을 마주하고서 갖는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 은 왜 유달리 길고 모호한가. 그리고 이 긴 러닝타임을 커트 바일은 어떠한 방식으로 모호하게 채웠는가. 일단 '왜'에 대한 답은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하며 살피는 것으로 하자. 먼저 건너고자 하는 지점은 '어떻게'라는 구성 방식을 향한 의문이다. 우선, 에도 커트 바일의 음악을 상징하는 발화들은 모두 자리한다. 새 시대 아메리카나의 대표주자답게 커트 바일은 포크, 컨트리의 전형적인 요소들을 작품에 담아낸다. 아메리카나의 푸근한 선율은 커트 바일의 목소리를, 쟁글거리는 기타를, 밴조와 랩 스틸 기타 등의 전통적인 악기들을 매개로 삼아 작품의 전반에 다양하게 등장한다. 그리고 새 시대 아메리카나의 괴짜답게 커트 바일은 여러 독특한 터치들을 트랙들 위에 다수 늘여놓는다. 'Loading zones'에 나타나는 토크 박스 풍의 기타와 'Bassackwards'에 흐르는 리버스 이펙트 기타, 'Bottle it in'을 어지럽게 헤집는 드론과 앰비언트 신시사이저, 'Check baby'의 밑바닥에서 거칠게 진동하는 신시사이저 베이스, 'Cold was the wind', 'Mutinies'의 거친 몽환을 부각하는 갖은 소리들을 그러한 예로 꼽을 수 있겠다. 또한 앨범 전반에 덧입힌 몽롱한 리버브 톤, 이따금씩 청각을 자극하는 노이즈, 사운드 부피를 키우는 레이어링과 같은 성분 역시 마찬가지라 하겠다. 나른하고 무기력하며 때로는 익살스러운 가사가 앨범 전체를 관통함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멜로디와 구성 요소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하나 강한 완력으로 음악을 이끄는 인자를 보기 힘들다. '어떻게'를 조망함에 있어 중요하게 살펴야 할 특징이 여기 놓여있다. 곡을 주도해야 하는 선율과 리듬은 간편하게 축소되고 루핑 식으로 단순하게 엮여 모양이 간소하다. 여기에 다채로운 진행이나 과격한 리프의 뒷받침을 받는 것도 아닌 데다, 널찍한 공간 속에서 주변 갖은 장치들의 간섭을 꾸준히 받아 그 존재가 유약하다. 'Hysteria', 'One trick ponies'의 메인 리프는 악기들의 긴 잔향과 몽롱한 공기로 인해 형태가 흐트러지며, 'Check baby'의 고전적인 포크 록 리프는 지저분하게 웅웅거리는 신시사이저 베이스에게 방해받는다. 커트 바일의 보컬도 종잡을 수 없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걸음으로 앞장서다 뒤로 물러나거나, 애초부터 대강 읊어대는 식이니 그조차 음악을 견고하게 지휘하기에는 부족해 보인다. 재미있게도, 모티프와 같은 요소들이 곡을 끌고 나가지 않는다고 해서 여타 특이한 장치들이 주도권을 가져나가는 것도 아니다. 이들도 어느 순간 무대 위에 모습을 비추고는 잔영 흐르듯 서서히 희미해진다. 'Loading zones'의 토크 박스 식 기타는 슬그머니 등장했다가 퇴장하고 'Yeah bones'의 키보드 라인과 'Bassackwards'의 리버스 이펙트 기타는 곡의 분위기를 돋우는 정도로 사용된다. 'Skinny mini'의 비정형적인 기타와 'Mutinies' 어쿠스틱 기타 디스토션 역시 후경을 잠시 조성하고서는 스러지니 이들의 비중도 그리 대단하진 않은 셈이다.
을 모호하게 만드는 성질들을 이 지점에서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기타 리프에서든 보컬 라인에서든 선율의 형태와 세기가 분명했던 전작들에 비해 이 앨범이 가진 모티프들은 그 구성과 강조가 소극적이다. 또한 정형화된 형식의 비중 역시 상당수 축소돼 음악 곳곳에 여백이 생긴다. 커트니 바넷과의 합작 , 연속하는 두 전작 , 이 연이어 자랑한 선율의 담백한 노출과 2011년의 에서 은근하게 보여주었던 치밀한 구성은 이번 앨범과는 거리가 있다. 다시 말해, 은 멜로디와 리듬은 물론, 여러 장치에게서도 곡을 이끌어야한다는 강박을 제거하며 모호함을 표출하게 한 작품이다. 커트 바일은 선율의 움직임을 절제함과 함께 편곡 구성의 여지를 넓혀 느슨하게 움직인다. 루프에 묶인 포크, 컨트리 선율과 드럼 비트가 여리게 견인해나가는 곡 위에 약간의 변주와 뿌연 신시사이저, 둔중한 드론, 몽롱한 기타들, 의미를 알 수 없는 음성을 아무렇게나 흘리는 'Bottle it in', 'Cold was the wind', 'Skinny mini'와 같은 곡들은 아티스트의 자유로움에 기인한 모호성을 가장 잘 담아낸 결과물들에 해당한다. 또한 찰리 리치의 원곡에게서 단정한 스트링과 코러스를 벗겨내고서는 아득한 사운드스케이프와 다소 휘청이는 기타를 덧댄 'Rollin with the flow'도 마찬가지로 그 모호함을 근사하게 품은 트랙이다.
무력하게 다가올 정도로 불분명한 사운드가 작품 전체를 지배하나 아티스트의 자율성은 도리어 대담하고 명확하다. 그렇기에 에서 보이는 커트 바일의 창작은 최근의 여러 작품보다는 비정형적인 소리들이 맹목적으로, 마구잡이로 음장을 방행했던 초창기와 다수 닮아있다. 사운드의 운용을 한정하지 않는 아티스트의 본성이 다시금 폭넓은 시도와 접근을 수면 위로 떠올린 셈이다. 이 앨범에서의 커트 바일의 창작이 그래서 빛난다. 음악의 기본적인 요체들을 최소화하길 꺼리지 않고, 그 위에 많은 장치가 올라와 서로를 훼방하길 꺼리지 않으며, 이를 위해 러닝 타임을 대폭 늘이길 꺼리지 않는다. 작품에서 아티스트는 재차 좋은 곡을 써내고 인상적인 연주를 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것을 넘어, 사운드를 어떻게 뭉개고 뒤섞어 직전의 형식으로부터 멋지게 탈피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오로지 창작자의 정념만을 뒤쫓는 'Bassackwards'와 'Bottle it in', 'Skinny mini', 여러 요소의 간섭이 일어나는 'Yeah bones', 'One trick ponies', 조악한 만화경을 거친 아메리카나 'Check baby' 등 온갖 불확실함과 모호함이 에 모여있으나 이들을 결코 가볍게 취급해서는 안 된다. 모두 자율성의 확장과 사운드 메이킹의 변혁이 맺은 훌륭한 우연성, 전위성의 결실들이다.
최근 몇 년간 커트 바일이 쌓아 올린 디스코그래피 가운데에서 은 여러모로 이질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커트니 바넷과 함께한 지난해의 에 이르기까지, 커트 바일이 대중과의 성공적인 합의를 연속해서 이끌어내왔던 점을 상기해보면 이번 앨범은 어쩌면 대단한 환영을 받지 못 할 수도 있겠다. 'Loading zones'와 'Yeah bones', 'One trick ponies', 'Rollin with the flow'를 비롯해 즐기기 좋은 훌륭한 아메리카나들이 어느 정도 포진돼있다 해도 유장한 러닝 타임과 이리저리 부옇게 흐르는 사운드에게서 강한 접근성을 기대하기는 역시 힘들다. 그러나 그 연유만으로 이 앨범을 유야무야하게 흘려보내기에 작품에는 담대한 창작력의 산물이 가득하다. 또한 독특하고도 유머러스한 제 음악의 원천을 다시 마주하는 유장한 여정이 실재하며, 현시대 아메리카나의 대표적인 이인이 행하는 조심스러운 실험과 인디 록 계의 베테랑이 된 음악가의 자기 회복과 자기 해방이 위치한다. 그리고 긴 여정을 걸어온 한 개체의 실존 자체도 놓여있다. 마지막으로, 이제 '왜'에 대한 답을 정리할 차례다. 커트 바일은 자유롭다. 마치 마타도어와 계약하기 전, 그리고 인디 록 계의 차세대 거물이 되기 전, 앳된 창작관으로 무장한 그 자신과 닮았다. 그런 점에 있어 이 낳은 긴 러닝 타임, 그 위에 놓인 모호한 음악은 창작자가 자신의 본능에 다시금 가까이 다가가며 일으킨 변화의 흔적들로 해석할 수 있겠다. 이 작용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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