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없어서'가 핑계라면
조사해보면 상당수의 사람이 독서가 취미라고 여전히 답한다. 취미 리스트에서 독서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출판시장 규모는 성장하기는커녕 매해 축소되고 있다하니 기이한 일이다. 이 현상은 두 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첫 번째 가능성, 독서가 취미라는 대답이 거짓말인 경우이다. 사람들의 진짜 취미는 게임하기나 술 마시기인데, 이실직고하자니 뭔가 부끄럽다는 생각에 독서가 취미라고 꾸며 대서 나타난 결과일 수 있다. 다른 가능성도 있다. 독서는 실제의 취미가 아니라 언젠가는 하리라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취미일 수도 있다. 즉 취미로서의 독서가 희망 사항인 경우이다.
독서 행태 조사 결과도 의심하면서 해석해 볼 수 있다. 독서를 하지 않는 까닭을 물어보면, “시간이 없어서”라는 대답이 늘 1위를 차지한다. “시간이 없어서” 독서를 못한다는 대답이 많다 보니 사람들은 OECD국가 중 당당히 2위를 기록하고 있는 연간 평균노동시간이나 편도 1시간이 넘는 통근 시간이 독서를 방해하는 요인이라고 결론짓기도 한다.
긴 노동시간과 통근시간으로 인한 시간 부족이 독서를 하지 못하는 만드는 원인이라면, 노동시간 단축 없는 독서 진흥 캠페인은 밑빠진 독에 물 붓기에 다름없다. 사람들이 “시간이 없어서” 책을 읽지 못한다면, 독서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독서진흥켐페인에 앞서 시간 부족이 해결되어야 한다. 시간 부족을 해결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노동시간과 통근시간이 혁신적으로 줄어들 수 있는 정책을 도입하면 된다. 정책의 방향은 간단하지만 정책 목표에 도달하는 건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노동시간을 줄이려면 한국의 오래된 노동 관행을 근본적으로 수정해야 하고, 통근 시간을 줄이려면 부동산 문제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 “시간이 없어서” 연애를 못한다고 말하면 주변사람들은 보통 이렇게 대꾸한다. 좋아하는 사람만 있으면 없는 시간도 만들어내서 하는게 연애라고. 즉 시간이 없어서 연애를 못한다는 답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사실은 핑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시간이 없어서” 책을 못 읽는다는 대답은 시간이 없어서 연애를 못한다는 대답처럼 진실이 아니라 핑계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시간이 없어서”가 핑계라면 우리는 아직 사람들이 책을 안 읽는 진짜 이유를 모르는 셈이다.
사람들의 행동은 단순하게 설명될 수 있다. 좋아하는 일이라면 우리는 시간이 부족해도 해낸다. 좋아하지 않는 일은 시간이 남아돌아도 하지 않는다. 결국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는 진짜 이유는 핑계 거리로 내세우는 시간 부족이 아니라 독서를 좋아하지 않아서 일 가능성이 더 높다.
새로운 독서 체험의 기회를 제공하지 못하는 한
독서와 관련된 콜드 팩트를 외면하지 말고, 독서를 둘러싼 실제의 관행을 들여다 보자. 한국의 노인 세대는 교육받을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독서는 경험하지 못한 별세계에서나 벌어지는 일이다. 그래서 그들은 독서에 무관심하다. 젊은 세대는 교육받았기에 독서 자체를 낯설어 하지 않는다. 그런데 젊은 세대에게 독서와 대학 입시 준비는 같은 뜻이다. 청소년 시절 권장되는 독서는 입시에 도움이 되는 독서 뿐이다. 대학에 들어간다는 건 지긋지긋한 입시 공부를 하고 싶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고, 다른 말로 하면 독서를 하지 않을 자유를 얻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학창시절 많이 들었던 말 “책 좀 봐라!”는 입시 공부를 하라는 뜻에 다름 아니다. 독서의 경험이 입시와 관련된 책 읽기의 경험과 완전히 일치하는 한, 한국에서 교육을 오래 받은 사람은 독서를 좋아할 동기보다 독서를 좋아하지 않을 동기가 더 많은 환경 속에서 오랜 기간을 보낸 셈이다.
독서를 싫어하게 만들었던 경험이 쌓이고 쌓여 책과 담을 쌓고 지내는 사람이 책의 세계로 다시 진입 하려면 지난 부정적인 경험을 대체할 완전히 새로운 독서 경험이 필요하다. 책이 잘 팔려서가 아니라 책이 너무나 안 팔려서 궁리 끝에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는 표현이 등장했다는 출판계에 떠도는 ‘무서운 이야기’를 들으며, 늦은 가을 니은서점의 고민도 깊어만 간다. 서점이 새로운 독서 체험의 기회를 제공하지 못하는 한, 서점은 사양산업의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할테니까.
노명우(사회학자)
베를린 자유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아주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다. 이론이 이론을 낳고 이론에 대한 해석에 또 다른 해석이 덧칠되면서 사회로부터 고립되어 가는 폐쇄적인 학문보다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서 연구 동기를 찾는 사회학을 지향한다. 『세상물정의 사회학』, 『인생극장』 등을 썼다.
찻잎미경
2019.0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