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거대한 인쇄기 앞에서

월간 채널예스 11월호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출판이라는 건 두려운 일이었다. 물성을 가진 책에 내가 쓴 글이 인쇄되는 이상 이 물건은 빼도 박도 못하게 내 책임이었다. (2018. 11. 07)

캡션_일러스트 손은경.JPG

                        일러스트 손은경

 

 

두 권의 책을 만들며 가을을 보냈다. 그동안 내 글과 그림은 디지털 데이터로만 존재했는데 이제 드디어 물성을 가지는 것이다. 데뷔한 지 5년 만에 책 제목과 함께 나를 소개할 수 있게 되었다. 


한 권은 출판사와 함께 만들었다. 예전에 그린 모녀 만화를 글과 함께 엮은 책이다. 『나는 울 때마다 엄마 얼굴이 된다』 라는 제목으로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다. 서로를 선택할 수 없었던 두 사람의 우정에 관한 이야기다.


다른 한 권은 내가 직접 독립 출판한 책이다. 지난 반년간 이메일로만 연재한 <일간 이슬아>의 글들을 묶어 『일간 이슬아 수필집』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만들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관여하고 책임지는 독립 출판이었으므로 이 과정을 조금 말해보고 싶다.


『일간 이슬아 수필집』은 제작하는 데 한 달이 걸렸다. 한 달 전 제작을 시작할 때 처음으로 한 일은 교정 교열자를 구하는 일이었다. 나에겐 6개월간 매일 쓴 글 뭉텅이가 있었다. 이 많은 양의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읽어보고 오탈자를 찾고 윤문을 도와줄 전문가를 고용하고 싶었다. 내가 스스로 발견하지 못하는 아주 많은 문제를 교정 교열자가 찾아내줄 것이기 때문이다.


몇 번의 통화 끝에 충청북도 옥천에서 포도밭 출판사를 운영하시는 최진규 선생님께 내 책의 교정 교열을 맡기기로 결정했다. 나는 최 선생님을 만난 적이 없으나 그분이 만든 책을 몇 권 알고 있었다. 15년간 출판계에서 일해온 최 선생님은 <일간 이슬아>의 구독자이기도 했다. 그는 나를 이슬아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서로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일했다. 최 선생님께 작업비를 보내드리고 원고지 매수로 2,000매에 가까운 글 뭉텅이를 전송했다. 이후 3주간 최 선생님과 나 사이에 여러 번 원고 파일이 오갔다. 그가 어떤 문장에 어떤 표시를 해놓았는지 유심히 보았다. 이 단어 말고 또 어떤 단어로 고칠 수 있는지 같이 고민해보는 시간이었다. 최 선생님은 늘 최종 선택권이 나에게 있음을 상기해주었다. 조심스럽고 섬세하게 내 문장을 다듬는 분이었다. 오랫동안 글을 읽고 다듬고 책을 만들어온 편집자에게 내 문장을 수정 받는 동안 즐거웠다. 그와 함께 다시 써본 문장이 훨씬 좋은 문장으로 읽혔기 때문이다. 덜어내도 좋을 습관과 군더더기를 깨달을 때마다 속이 시원했다. 문장을 쓸 때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은 실수들을 몇 가지 기억했다. 창피하지만 재미있는 배움이었다. 교정교열이라는 일이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했다.


최 선생님이 교정을 보며 본문을 다듬는 동안 나는 책을 감싸는 디자인을 구상하고 표지를 만들었다. 동료 작가인 이다울과 류한경이 표지 사진과 프로필 사진을 촬영해주었다. 한편 나는 외부 원고를 청탁하기도 했다. 책 후반부에 추천사와 작가론을 싣기 위해서였다. 요조, 이랑을 비롯한 동료 창작자들이 <일간 이슬아>와 이슬아에 관한 각자의 해석을 적어주었다. 그들이 덧붙인 글과 만화 덕분에 이 책의 후반부가 든든해졌다. 수필을 읽는 방식을 풍부하게 제시하는 글들이었다. 그들에게도 원고료를 송금했다.


백 편에 가까운 내 글과 동료 작가들의 헌사까지 모으자 이 책의 분량은 500쪽이 훌쩍 넘었다. 최 선생님과 여러 가지를 상의했다. 본문과 표지 종이의 재질, 인쇄 방식, 표지의 타이포그래피, 주요 색감, 가격과 유통 방법 등 결정할 내용이 많았다. 편집자이자 교정 교열자인 최 선생님께 물어볼 것투성이였다. 그가 옥천에서 교정지를 들고 서울에 오실 때마다 내가 질문하고 그가 대답하느라 한나절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나 혼자서도 어떻게든 책을 완성하긴 했겠지만 그랬다면 훨씬 더 많은 품이 들었을 것이다.


10월 첫 주에는 최 선생님과 함께 경기 파주에 갔다. 완성된 책의 데이터 파일이 본격 인쇄에 들어가기 직전에 표지 감리를 보기 위해서였다. 처음 가본 출판단지의 인쇄소에서 나는 너무나 놀라고 말았다. 인쇄기가 무지막지하게 웅장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큰 기계에서 내 책이 아주 빨리 아주 많이 인쇄되는 걸 보고 무서움을 느꼈다. 출판이라는 건 두려운 일이었다. 물성을 가진 책에 내가 쓴 글이 인쇄되는 이상 이 물건은 빼도 박도 못하게 내 책임이었다.


거대한 인쇄기 앞에서 내가 무엇을 썼는지 다시 기억했다. 본문 안에 있는 타인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과슬이가 글쓰기로 죄를 짓지 않았는지 돌아보았다. 하지만 과슬이는 미슬이만큼이나 못 미더운 구석이 많았다. 이 가을에 만든 수필집이 누구에게 어떻게 읽힐지, 과슬이도 현슬이도 미슬이도 아직 아는 바가 없었다. 진한 잉크 냄새로 가득한 인쇄 공장에서 나와 최 선생님이랑 담배를 피웠다. 하늘에 철새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울 때마다 엄마 얼굴이 된다이슬아 저 | 문학동네
문득 나의 유년기와 내 등 뒤에서 조용히 서 있는 엄마를 돌아보게 한다. 연필로 그린 듯 슥슥 그린 만화와 함께, 자신의 범상치 않은 가족사를 빼어난 문장으로 묘사한 이슬아 작가의 필력이 빛나게 해준다.

 

 

배너_책읽아웃-띠배너.jpg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1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글 | 이슬아(작가)

연재노동자 (1992~). 서울에서 태어나 살아가고 있다. <이슬아 수필집>, <나는 울 때마다 엄마 얼굴이 된다>를 썼다.

오늘의 책

수학 좋아하는 아이로 키우는 엄마표 유아수학 공부

국내 최대 유아수학 커뮤니티 '달콤수학 프로젝트'를 이끄는 꿀쌤의 첫 책! '보고 만지는 경험'과 '엄마의 발문'을 통해 체계적인 유아수학 로드맵을 제시한다. 집에서 할 수 있는 쉽고 재미있는 수학 활동을 따라하다보면 어느새 우리 아이도 '수학을 좋아하는 아이'로 자랄 것이다.

나를 바꾸는 사소함의 힘

멈추면 뒤처질 것 같고 열심히 살아도 제자리인 시대. 불안과 번아웃이 일상인 이들에게 사소한 습관으로 회복하는 21가지 방법을 담았다. 100미터 구간을 2-3분 이내로 걷는 마이크로 산책부터 하루 한 장 필사, 독서 등 간단한 습관으로 조금씩 변화하는 내 모습을 느끼시길.

지금이 바로, 경제 교육 골든타임

80만 독자들이 선택한 『돈의 속성』이 어린이들을 위한 경제 금융 동화로 돌아왔다. 돈의 기본적인 ‘쓰임’과 ‘역할’부터 책상 서랍 정리하기, 용돈 기입장 쓰기까지, 어린이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소재로 자연스럽게 올바른 경제관념을 키울 수 있다.

삶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야

저마다 삶의 궤적이 조금씩 다르지만 인간은 비슷한 생애 주기를 거친다. 미숙한 유아동기와 질풍노동의 청년기를 거쳐 누군가를 열렬하게 사랑하고 늙어간다. 이를 관장하는 건 호르몬. 이 책은 시기별 중요한 호르몬을 설명하고 비만과 우울, 노화에 맞서는 법도 함께 공개한다.


문화지원프로젝트
PYCHYESWEB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