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책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언제나 망설이다가, 어, 그러니까, 요즘 좋았던 책은, 이라고 간신히 말을 잇게 된다. 독서 취향에 별로 일관성이 없고 자주 변하기 때문이다. 사자마자 몇 장 안 읽고 덮어두었던 책을 오랜만에 다시 펼쳤다가 밤을 꼬박 새우곤 왜 내 인생에 이제야 이 책이 등장한 것인가 하고 통탄한 적이 여러 번이다. 그 사이 변한 것은 책이 아니라 나일 것이다.
그에 비해 수십 년 동안 취향이 굳건히 변치 않은 분야도 있다. 운동(하는 것). 어릴 때부터 최근까지 나는 운동에 대해서라면, 되도록 피하자는 마음 말고는 다른 신념을 지녀본 적이 없다. 가까운 이들은 자주 말한다. “너도 이제 운동해야지?!.........” 문장 부호는 정말로 저렇다. 물음표와 느낌표와 말줄임표가 오묘하게 한데 섞여 있어 의문문 같기도 하고 청유문 같기도 하고 혼잣말 같기도 하다. 그 안에는 숨길 수 없는 의구심과 냉소의 기미가 배어 있다. 그들이 나라는 인간에 대해 꽤 잘 알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아무리 궁금해 하고 권하고 타박해도 운동에 대한 내 마음이 쉽게 변할 리 없다는 사실도.
30대까지만 해도 주위에 나 같은 운동거부자의 숫자가 꽤 되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달라졌다. 이제는 모두가 운동을 하거나 운동을 계획하는 시대인 것만 같다. 작가들도 마찬가지다. 생각보다 많은 수의 작가들이 규칙적으로 열심히 운동을 한다. 작가들이 운동을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겠지만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고 생각한다. 체력을 기르기 위해서. 그리하여 건강하게, 더 오래 쓰기 위해서.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직업 윤리적 차원의 급격한 죄책감에 휩싸인다.
최근 들어 나는 운동을 왜 안 하느냐는 물음 앞에서 “그러게요, 언젠가 하기는 해야 될 텐데”라고 얼버무리게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크나큰 변화다. 다른 작가들이 하고 있다는 운동을 종이에 쭉 적어보았다. 요가, 테니스, 배드민턴, 야구, 축구, 탁구, 사이클, 발레, 탁구........달리기. 나는 연필을 멈추었다.
달리기라니. 평생 단 한 번도 달리고 싶다는 자발적 의지를 품어보지 않았다. 물론 외부에 공표하지는 않았다. 횡단보도의 파란불이 깜빡일 때 질주해 건너려는 친구의 손을 짐짓 차분히 잡아끌며 ‘기다리자’고 말하는 방식으로 은밀하게 내 의사를 표명해왔을 뿐이다. 초등학교 1학년 운동회의 달리기 경주에서 아슬아슬한 차이로 꼴등을 한 이래로 줄곧 그래왔다. 어쩌면 모든 일의 근원일지도 모를, 오래 잊고 있었던 그 운동회 날의 악몽이 되살아난 건 아이의 운동회를 앞두고서다. 나는 아이를 붙잡고서 ‘달리기 좀 못한다고 부끄러운 게 아니야, 싫어도 재미있게 하면 돼’라고 반복했다. 내 유전자를 공유한 이 아이가 분명히 달리기를 못할 것이며 싫어할 거라고 확신한 자의 언행이었다. 그런데 그날의 결과, 아이는 4명 중에 (무려!) 2등을 했고 심지어 언젠가는 꼭 1등을 하고 싶다는 꿈을 수줍게 피력하여 나를 혼란에 빠뜨렸다.
소설을 쓰는 것이 마라톤 풀코스를 뛰는 것과 비슷하다고 말한 사람은 무라카미 하루키다. 그 동기가 내면에 조용히 존재할 뿐 외부에서 찾을 일이 아니라는 측면에서다.
달린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 유익한 운동인 동시에 유효한 메타포이기도 하다. 나는 매일매일 달리면서 또는 마라톤경기를 거듭하면서 목표달성의 기준치를 조금씩 높여가며 그것을 달성하는 데 따라 나 자신의 향상을 도모해 나갔다. 적어도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두고, 그 목표의 달성을 위해 매일매일 노력해왔다...어제의 자신이 지닌 약점을 조금이라도 극복해가는 것, 그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이겨내야 할 상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과거의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중에서)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위대한 작가가 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나를 이기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모든 것에 승부를 결정짓는 이 세계가 너무나 지긋지긋했기 때문에 가능하면 나 자신(들)끼리라도 승부 없는 세계에 머물게 하고 싶었다. 구태여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까지 싸우게 하고 싶지 않았다. 오늘의 내 소설이 매번 어제의 내 소설을 갱신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냥 어제는 어제의 최선을 다했듯이 오늘은 오늘의 최선을 다 하면 된다고 여겼다.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졌다. 어쩌면 나도 비로소 필생의 운동을 발견하게 될는지도 몰랐다.
새 런닝화를 샀다. 에어쿠션이 두툼한 것으로 골랐다. 마침 우리집은 한강에서 가까웠다. 준비는 끝났다. 나가서 달리기만 하면 되었다. 결심의 첫 날, 서울시내의 미세먼지 농도가 ‘매우 나쁨’을 가리켰다. 다음날은 ‘상당히 나쁨’이었다. 그 다음날엔 비가 왔다. 런닝화를 신고 우산을 쓰고 나는 한강으로 가는 대신 서점으로 갔다. 거기서 이런 제목의 책을 홀린 듯 집어 들었다. 『마라톤에서 지는 법』 .
저자 조엘 H 코언은 애니메이션 <심슨가족>의 작가다. 그리고 2013년 뉴욕마라톤에서 26,782등을 했던 아마추어 마라토너이다. 책날개에 저자 사진 대신 몹시 게을러 보이는 고래 한 마리가 무성의하게 그려져 있다. ‘나의 영혼의 동물-해변에 너부러진 고래’ 그 설명이 거울 보듯 정겹다. 그는 뛰어보고 싶지만 결코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어서 이 책을 썼다고 한다. 나 같은 사람도 했으니 당신도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어서. 맨 마지막 페이지를 먼저 펼쳐 본다.
“마라톤에서 질 도리가 없는 것이, 마라톤을 뛰는 사람은 다 이기기 때문이다.(...) 비록 이튿날의 신문이 나의 개인적 승리를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런 것들이 내가 이기지 못했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읽기 전부터 사랑에 빠질 것 같은 예감이다. 내일은 부디 이 도시의 하늘에 비가 그치기를 바라고 또 바라지 않으면서 나는 책을 읽어 내려갔다.
정이현(소설가)
1972년 서울 출생으로 단편 「낭만적 사랑과 사회」로 2002년 제1회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나왔다. 이후 단편 「타인의 고독」으로 제5회 이효석문학상(2004)을, 단편 「삼풍백화점」으로 제51회 현대문학상(2006)을 수상했다. 작품집으로 『낭만적 사랑과 사회』『타인의 고독』(수상작품집) 『삼풍백화점』(수상작품집) 『달콤한 나의 도시』『오늘의 거짓말』『풍선』『작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