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스플래쉬
나에게는 오래 전 참 친한 친구가 하나 있었다. 내가 스물일곱 살이었나, 하던 옛날 얘기다. 일찍 결혼한 친구는 네 살 아이를 데리고 남편과 함께 돼지갈비집을 했다. 아이를 맡길 데가 없으니 온돌방으로 꾸며진 식당 한켠에 조그만 전기방석 하나를 깔고 장난감이랑 과자 한 봉지 쥐여준 채 재우고 그랬다. 가끔 놀러가면 한구석에서 그렇게 잠든 녀석이 참 안쓰럽기도 했다. 네 살 그 녀석은 잔망스럽게도 이 가게 저 가게 동네를 돌아다니며 참견도 하고 그랬다. 옆집 커피숍에 들러선 문 빼꼼히 열고 주인에게 “이모야, 오늘 장사 좀 했나?” 묻기도 하고 공짜로 아이스크림도 얻어왔다. 식당 금고에 손을 대다 제 아빠에게 엉덩이를 잔뜩 맞기도 했다.
식당은 밤 열한 시가 되어야 마감을 시작했고 뒷정리를 끝내고 나면 열두 시 반, 한 시였다.
“우리 어디 가서 술 한 잔 하자. 스트레스 받아 죽겠다.”
친구의 말에 나는 주섬주섬 따라나섰다.
“니네 가게에 술도 있고 고기도 있는데 뭐하러 돈 주고 딴 델 가?”
“지랄한다, 가시나. 장사 해봐라. 내가 술 꺼내묵고 내가 안주 만들고 하는 게 제일 싫다. 나도 남이 채려주는 거 먹을란다.”
그러면 우리는 조개구이집엘 갔다. 친구는 잠든 아이를 들쳐업고 택시를 탔다. 조개구이집 의자가 편할 리 없어서 좁다란 벽쪽 붙박이 긴 의자에 아이를 누인 뒤 친구는 재킷을 벗어 아이를 덮어주었다. 소주 한 잔 한 잔 들어갈 때마다 그녀는 한숨도 쉬었고 때로 울기도 했고 욕도 했다.
“그 새끼가 그래 쫄랐다 아이가. 잠깐만 쉬었다 가자고. 내 스물한 살 때. 내 그 여관 이름 아직도 기억난다. 나도 알긴 알았지. 그게 무슨 말인지. 속았다는 게 아이라 괘씸하잖아. 지랑 내랑 아홉 살 차이 아이가. 지도 양심이 있으면 그래 어린 가시나는 건드리지 말아야지. 안 그나? 이기 뭐꼬, 사는 게 힘들어 죽겠다. 내보다 공부 몬하던 가시나들도 지금 다들 잘 사는데.”
네 살 아이는 종종 뒤척였고 그럴 때마다 옆 테이블에 앉은 남자들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도 니도 알겠지만 우리 수야 아빠가 잘 생깄다 아이가. 내 솔직히 그거 하나 땜에 산다. 그냥 보면 흐뭇한 기라. 아, 저 남자가 내 남편이구나, 하면 기분도 좋고. 옛날에 회사 댕길 때 가시나들이 수야 아빠만 보면 환장했었다.”
나는 친구의 남편이 그닥 잘생긴 얼굴이라 생각하지 않았지만 끄덕끄덕 동의해주었다. 그렇게 둘이서 소주 두 병쯤 비우고 친구는 다시 아이를 들쳐업었다. 택시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친구는 멀리 보이는 모텔 간판을 가리키며 막 소리를 쳤다.
“저기다! 저기 아이가, 수야 아빠가 내 끌고 갔던 데. 미친 새끼, 잠깐 쉬었다 가자고 해놓고서는.”
그 수야가 벌써 대학생이 된단다. 징글징글할 정도로 아빠랑 똑같이 자랐다. 그 시절, 내 친구는 아이를 들쳐업은 채 나와 같이 조개구이집에서 소주를 마시지 않았다면 그 때의 강물을 어찌 건넜을까. 새벽의 조개구이집에 아이를 뉘어놓고 재킷으로 덮어준 뒤 엉덩이를 토닥토닥 두들기며 차가운 소주 한 잔 들이켜는 시간마저 없었다면. 다들 견디고, 지키고, 도닥이는 시간인 것을.
새삼 꺼내보는 공선옥의 『내 생의 알리바이』 , 그 안의 단편 「술 먹고 담배 피우는 엄마」. 어느 지친 엄마가 아동일시보호소에 맡겨둔 아이들을 만나러 가는 기차 안에서 옆자리 남자가 건네는 술을 받아마시고 또 추근거리는 그의 손길을 애써 피하지도 않는다. 독자들 즐거우라고 대책 없이 해피엔딩으로 치닫는 소설을 써본 적 없는 나지만 실제의 나는, 고작 두 돌 지난 아기를 키우는 엄마인 나는, 부디 술 먹고 담배 피우던 공선옥 소설 속 엄마가 이제는 많이 편안해졌기를 밑도 끝도 없이 바라는 환상주의자이기도 하다.
-
내 생의 알리바이공선옥 저 | 창비
`나`는 태림과 무관한 사람이란 알리바이로 "나는 태림을 사랑하지 않았다"란 말을 반복해서 되뇝니다. 여기서 태림은 `나`의 또다른 모습으로 아픈 과거를 지우고 새롭게 살고 싶은 처절한 `나`의 모습을 봅니다.
김서령(소설가)
1974년생. 2003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소설집 『작은 토끼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 『어디로 갈까요』와 장편소설 『티타티타』, 그리고 산문집 『우리에겐 일요일이 필요해』를 출간했으며 번역한 책으로 『빨강 머리 앤』이 있다.
풀잎
2018.0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