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편집자에게도 영감을 준다
국내 서적뿐 아니라 해외의 다양한 책과 글을 늘 살피고 주시해야 하는 운명이지만, 다른 나라의 서점을 둘러보는 일만큼 진하게 흥미를 돋우고 새로운 발견과 만남의 계기를 제공하는 일도 없다.
글ㆍ사진 유상훈 (편집자)
2018.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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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라고는 단언할 수 없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여행은 일종의 영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일단 일상에서 벗어난다는 것 자체가 삶에 색다른 원근감을 제공한다. 마땅한 것들이 당연하지 않게 변하기도 하고, 뜻밖의 일들이 예상할 수 없는 규모와 속도로 밀려들기도 한다. 이방인이 되어 본다는 것, 그 독특한 경험은 여행자들에게 무수히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해 준다. 도로의 방향이 뒤바뀌고, 낯선 풍미를 지닌 식재료가 눈앞의 모든 음식 속에 꼭꼭 숨어 있고, 익숙지 않은 언어의 세계로 들어간다면 이런 기묘한 체험은 아예 모험이 된다.

 

물론 노동자인 편집자에게 여행은 일단 ‘휴식의 시간’이다. 정말로 쉬기 위해, 잠시 동안 업무로 주어진 문자로부터 떨어져 나와 눈을 쉬게 하고, 생각을 비우고,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매일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겐 느닷없이 생긴 여유, 긴긴 휴식이야말로 낯선 세계로 진입하는 여행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비슷비슷한 공기, 익숙한 풍경에서 잠시 멀어지고 싶을 땐 결연하게 다른 세계로 여행을 떠나야 한다. 이번엔 완전하게 휴식하는 거야, 라는 다짐이 무색하게 공항에 들어선 순간부터 작은 책방에 들어가 책장을 뒤적이곤 하지만 말이다. 직업병. 애초에 책을 좋아했으니, 편집자가 된 것이겠지. 그런 자신의 모습을 피식 비웃으며, 다시 일상을 밀어내고 낯선 세계로 간다.

 

여행은 편집자에게도 영감을 준다. 국내 서적뿐 아니라 해외의 다양한 책과 글을 늘 살피고 주시해야 하는 운명이지만, 다른 나라의 서점을 둘러보는 일만큼 진하게 흥미를 돋우고 새로운 발견과 만남의 계기를 제공하는 일도 없다. 가끔은 전혀 읽을 수 없는 언어로 된 책을 마주하기도 하지만(도대체 왜 태국, 미얀마에 와서도 서점에 가느냐고, 일행들은 난리다.) 책 표지, 본문의 생경한 문자들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무언가 매혹적인 말을 거는 듯싶다. 익숙한 외국어로 쓰인 책들을 볼 때도 예외는 아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맥락 속에 ‘그 책’이 놓여 있는 것만으로도 재미가 동한다. 어떤 때에는 서점 전체를 다 둘러보기라도 할 것처럼, 나의 눈과 발은 스스로 미로 속에 갇히기도 한다. 이런 재미에 ‘중독’되어(매우 건전한 중독이 아닐까 싶다!), 가까이 일본에 다녀올 때면 언제나 새로운 서점 한 군데를 꼭 찾아내서 들르곤 한다. 책상머리에선 도무지 체험할 수 없는 생생한 현장감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큰 공부가 된다. 몇 년 전, 교토에 갔을 적에도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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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토 게이분샤 이치조지 점의 풍경

 

원래는 슈가쿠인리큐(아름다운 정원으로 유명한 별궁이다.)에 다녀오려고 했으나, 당시만 해도 예약하고 방문하는 절차가 상당히 까다로워서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이 실패를 기회로 삼아 그 근처에 위치한 ‘이치조지’라는, 정말 ‘아는 사람들만 아는’ 작은 동네를 돌아보기로 결심했다. 물론 ‘게이분샤’라는 동네 서점이 아주 볼만하다고 소문나 있긴 했지만, 유명한 라멘집도 많고 해서 단칼에 발길을 돌렸다. 요즘 서울도 번화가에서 벗어난 작은 동네, 골목 상권이 크게 부흥하고 있다는데(한때는 패밀리 레스토랑, 프랜차이즈 음식점에서 외식을 하는 게 큰 이벤트였는데, 요즘에는 다 옛말이 되었다.), 처음 본 이치조지의 풍경에서 (곧 서울에 나타날) 어떤 미래를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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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이코샤에서 업무를 보는 저자 호리베 아쓰시 씨

 

교토 이치조지는 그야말로 작은 가게의 별천지였다. 그 중심에 동네 서점 ‘게이분샤 이치조지 점’이 자리해 있었고, 이 모든 것은 『거리를 바꾸는 작은 가게』 의 저자 호리베 아쓰시와 동료, 이치조지의 소상인들이 일궈 낸 결실이었다. 나는 그 현장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작은 가게’의 가치를 설득당하고 말았다. 여행이 선사하는 우연과 영감, 결국 『거리를 바꾸는 작은 가게』 를 우리나라에 선보이는 계기가 되었다. 앞으로 이 책이 천편일률적으로 변해 가는 우리 거리와 도시의 풍경에, 새로운 생명력과 즐거움을 제공할 수 있는 단서가 되었으면 한다. 내가 교토 이치조지에서 발견했던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거리를 바꾸는 작은 가게』 속에 오롯이 담겨 있기에.

 


 

 

거리를 바꾸는 작은 가게호리베 아쓰시 저/정문주 역 | 민음사
우리가 익히 알면서도 ‘가성비’와 ‘빠른 유행만을 좇는 세태’ 탓에 잊어버린 상업의 진정한 가치와 ‘작은 가게’가 살아남는 데에 필요한 소중한 단서들이 총망라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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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를 바꾸는 작은 가게 #여행 #휴식의 시간 #교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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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상훈 (편집자)

책을 읽고, 책을 만들고, 좋은 책을 찾아다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