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를 무대로 옮길 경우 분명히 다른 장르인데도 관객들은 자연스레 원작과 비교하게 됩니다. 제작사는 별개의 작품으로 봐달라고 하지만 어차피 원작의 인지도를 빌려 쓴 셈이니 비교라는 대가 정도는 치러야겠지요. 그런 차원에서 지난 1월 30일 개막한 연극 <네버 더 시너> 는 올해 가장 기대되는 무대 중 하나면서 한편으로 가장 신랄한 비교를 받을 수 있는 공연이 아닐까 합니다. 원작이 따로 있는 건 아니지만, 1920년대 미국 시카고에서 벌어진 동일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뮤지컬 <쓰릴 미> 와 떼래야 뗄 수 없는 작품이니까요. 그래서 <네버 더 시너> 의 캐스팅이 발표됐을 때 인터뷰할 배우도 고민 없이 결정할 수 있었습니다. <쓰릴 미> 로 데뷔한 배우 이율 씨요!
“또 리차드를 하겠구나 생각했어요(웃음). 배경을 아는 작품이고, 그런데 다른 장르니까 표현을 다르게 할 수 있어서 재밌겠다는 생각도 했죠. 궁금했고요.”
<네버 더 시너> 첫공을 본 기자는 이틀 뒤 공연이 시작되기 전 이율 씨를 다시 만났습니다. 초반인데 공연 전에 인터뷰를 한다는 것이 좀 의외였는데, 그만큼 탄탄하게 준비했고 리차드 롭 역에 있어서만은 마음의 여유가 있는 게 아닐까 생각되더군요.
“그렇지는 않아요. 노래가 없다는 건 있죠. 뮤지컬은 감정이 안 와도 반주가 들어가면 노래를 해야 하는데, 연극은 감정이 안 온다 싶으면 한 번 더 리마인드할 수 있거든요. 그래서 미세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연극이 좀 더 편해요.”
동일 사건을 다룬 작품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뮤지컬 <쓰릴 미> 가 자꾸 떠올랐습니다. <쓰릴 미> 가 지난 10년간 많은 인기를 얻었던 작품인 만큼 대다수 관객들도 비슷한 생각일 텐데, 이율 씨가 두 작품을 가장 잘 비교할 수 있는 분이 아닐까요(웃음).
“가장 큰 차이는 ‘포커스를 어디에 맞췄나’라고 생각해요. <쓰릴 미> 가 네이슨과 리차드 두 사람의 관계를 보여주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면 <네버 더 시너> 는 관객 분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게 강해요. 사형제에 대한 찬성과 반대 등 많은 질문이 곳곳에 숨겨져 있어요. 결론 역시 열려 있죠, 판단은 관객들의 몫이라고. 연극은 또 다른 매력이 있으니까 음악에 기대지 않고 배우들의 힘으로 어떻게 끌고 가는지 봐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그런데 무엇을 판단해야 할까요? 초연 첫공인데도 매끄럽게 잘 흘러간 반면 무엇을 얘기하고 싶은지는 잘 모르겠더라고요. 혹시 내용이 원작에서 많이 수정됐나요? 오늘 인터뷰는 관객들을 대신해 이것저것 여쭤보게 될 것 같아요(웃음).
“저희가 더 분발해야겠네요(웃음). 모든 배우들이 첫 연습 때부터 번역 작업을 다시 했어요. 우리에게 맞는 말로 고쳤지만, 내용은 대본대로 가고 있어요. 연출의 의도는 사형제를 반대한다는 쪽으로 잡았고, 배우들도 그렇게 연습했어요. 그래서 등장인물이 인간적이고 안타까워 보이는 부분도 더 부각했고요. ‘이들이 왜 아이를 죽였느냐’보다는 ‘이런 일을 저지른 이들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 그 법정싸움에 중점을 뒀어요.”
제목을 생각하면 확실히 비교가 되겠군요.
“그러네요. 클라렌스 대로우는 자기 신념대로 가는 변호사죠. 시대를 앞서 나간 사람으로 해석했고 그렇게 표현하고 계세요. 명예욕이나 정치에 욕심이 있었던 사람이 아니라, 당시 인권 변호사로 가장 유명했대요. 죄가 있을 뿐 나쁜 사람은 없다고 변론하죠. 검사는 정의에 불타는 사람으로 표현하고 있고요.”
그 부분이 무대에서 제대로 드러나지 않은 게 아쉽네요. 사건의 실제 배경을 모르면 대로우 변호사도 두 사람과 같은 부류인가 싶거든요. 어쨌든 이율 씨는 <쓰릴 미> 와 <네버 더 시너> 에서 동일 인물을 연기하는데, 대본상으로는 캐릭터가 꽤 다를 것 같습니다.
“다르죠. <쓰릴 미> 는 대본상에 19살이라고 적혔지만 10대로 보기에는 애매해요. 좀 더 스타일리시하고 멋있는 남자로 표현된다면, <네버 더 시너> 에서는 완벽하게 10대 후반의 청소년 느낌이에요. 매력적이고 위트 있지만, 악동스럽고 고양이 같기도 해요. 리차드 롭은 유괴와 살인도 하나의 게임으로 생각했고, 이슈화 되는 것도 즐겼고요. 그래서 동일 사건이고 같은 인물이지만 표현이 달라질 수밖에 없죠. 좀 더 편하게 접근한 건 <네버 더 시너> 예요. <쓰릴 미> 가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규격화된 면이 있다면 이 작품에서는 더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캐릭터거든요.”
그런데 <쓰릴 미> 를 관람하지 않았다면 스토리를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초연 때부터 봐서 애써 부인해도 스토리가 너무 잘 이해됐지만요(웃음).
“그래요? <쓰릴 미> 보다는 이 작품이 더 설명적일 거예요. 저도 사실 <쓰릴 미> 를 했기 때문에 쉽게 받아들여졌는데, 다른 배우들이 궁금한 점을 물어보기는 했어요. <쓰릴 미> 는 어떻게 했느냐고, 이런 부분은 왜 그랬냐고(웃음). 저는 알고 있으니까 객관적일 수는 없더라고요.”
그래서 이율 씨 연기는 무대에서 자연스럽고 더 풍성했던 것 같아요. 배우들을 몇 년 간격으로 만나보면 나이가 들수록 리차드를 담아내는 게 많이 다르다고 하더라고요. 게다가 이율 씨는 2007년 <쓰릴 미> 초연 때 데뷔했잖아요(웃음).
“초연 때는 좀 더 동물적으로, 본능적으로 한 것 같아요, 매번 느껴지는 대로. 다듬지 못해서 기복이 심했죠. 지금은 사실상 계산을 하고 들어가는 부분이 예전보다는 많은데, 반면 매번 다이내믹하게 공연하지는 못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예전의 느낌을 살리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리차드는 그런 캐릭터니까.”
배우로서 노련해져서 오히려 ‘날 것’의 느낌이 덜한 건가요?
“네, 그게 제 안에서도 자꾸 부딪혀요.”
<네버 더 시너> 에서 리차드 롭에게 레오폴드 네이슨은 어떤 존재인가요?
“저도 <쓰릴 미> 얘기가 자꾸 나오는데, <쓰릴 미> 를 할 때도 일관됐어요. 어쩔 수 없이 의지하는 존재라고. 표면적으로는 하나의 도구로 생각하지만, 내적으로는 유일하게 의지하는 대상이라고 생각해요.”
네이슨은 사랑하는 거고, 리차드는 의지하는... 빛깔이 다르죠?
“그렇죠.”
동일 사건을 다루고 있는 만큼 <쓰릴 미> 와 <네버 더 시너> 모두 동성애를 언급한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장면과 관련해 이율 씨와 기자 누군가의 기억 장치에 오류가 생긴 것 같습니다. <쓰릴 미> 초연 때 키스신이 있었나요? 아래 영상을 확인하고 답해 주세요(웃음)!
이제 데뷔한 지 10년이 넘었잖아요. 요즘도 이른바 겹치기는 안 하시던데, 그럴수록 작품을 선택할 때 고민이 많을 것 같아요. 요즘은 어떤 작품에 끌리나요?
“요즘은 좀 진한 멜로 작품을 하고 싶어요. 예를 들어 <만추> 같은. 제 또래 배우들도 그런 생각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요즘 그런 작품이 많이 없기도 하죠. 저는 멀티플레이어가 안 돼서 여러 작품을 한꺼번에 하면 아마 과부하가 걸릴 거예요. 원래도 급하지 않게 가고자 했고 그런 부분은 지난 10년을 돌아봤을 때 스스로 마음에 들어요. 앞으로도 느긋하게 가고 싶은데, 대신 마음은 안 늙었으면 좋겠어요. 배우는 신선해야 하는데, 마음이 좀 더 젊어졌으면 좋겠어요(웃음).”
2007년 <쓰릴 미> 의 리차드로 데뷔해서 2018년 <네버 더 시너> 의 리차드까지 연기하고 있는데, 마지막으로 나에게 리차드 롭은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쓰릴 미>에서 또 손을 내민다면 어떻게 할 건지 여쭤볼게요.
“섭외 오면 하죠. 그런데 나이가(웃음). 대신 네이슨으로 해보고 싶어요. 그리고 리차드는 친구 같아요. 그 동안 많은 캐릭터를 연기했지만 캐릭터로서 가장 친한 친구. 친구들은 닮아간다는데 절대 닮아가서는 안 되겠죠(웃음).”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Hate the sin, never the sinner)’는 당시 이 사건을 맡은 클라렌스 대로우 변호사가 네이슨 레오폴드와 리차드 롭의 죄는 인정하지만, 인간으로서 존엄성은 보장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했던 말입니다. 시대를 앞서간 이 엄청난 말이 나오기까지 법정에서의 팽팽한 다툼이, 대로우 변호사의 면모가 무대 위에서 좀 더 깊게 다뤄지지 못한 게 아쉽습니다. <네버 더 시너> 라는 제목이 더 빛났을 텐데 말이죠. 하긴 이건 극작가에게 할 말인가요(웃음). 하지만 <쓰릴 미> 에서와는 또 다른 리차드 롭을 보여준 이율 씨의 노련한 연기는 <네버 더 시너> 를 챙겨봐야 할 이유일 겁니다. 무대 위에서 리차드와 함께 커온 배우니까요!
윤하정
"공연 보느라 영화 볼 시간이 없다.."는 공연 칼럼니스트, 문화전문기자. 저서로는 <지금 당신의 무대는 어디입니까?>,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공연을 보러 떠나는 유럽> ,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축제를 즐기러 떠나는 유럽>,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예술이 좋아 떠나는 유럽>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