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88km.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달리는 거리다. 56개 역을 지나고 16개의 강을 건너는 동안 7시간 시차가 생긴다. 어림잡아 북극에서 적도까지 거리라고 하니, 지구의 크기를 온몸으로 느끼려면 비행기로 훌쩍 날아가는 것보다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지르는 기차를 타보는 게 좋겠다.
22년차 철도 기관사가 쓴 『시베리아 시간여행』 은 횡단철도의 종착지이자 러시아 제국 동진정책의 기점인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작한다. 머나먼 북쪽 나라의 낯선 도시라는 고정관념이 있지만, 사실 한반도 국경과는 매우 가깝기에 1916년 10월 개통 초기부터 한민족과 깊은 연관을 맺는다. 저자는 동에서 서로 이동하면서 철도와 얽히고설킨 우리 민족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안중근의 길을 따라갔다가, 연해주 거리를 거닐고, 그들이 마주한 역사의 질곡 앞에 머물기도 한다. 혁명가이자 항일 운동으로 삶을 불태웠던 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러시아 혁명의 뜨거운 열기와 장엄한 문학 세계로 열차를 갈아타기도 한다. 기차는 마치 100년 전 시공간으로 독자를 이끄는 듯하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3년간 외화벌이에 나선 북한 노동자들과 같은 열차를 타면서 경험한 일화다. 음식을 나눠 먹고, 함께 담배를 태우고, 같은 말과 글을 쓰고, 같은 음식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경계심의 장벽이 스르르 무너지는 걸 경험했다. 여행 중 우연히 열린 작은 틈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을 저자 자신도 대단한 행운이었다고 기록한다. 18박 19일 시베리아 횡단 여행은 쉽지 않았다. 여행에 함께한 친구가 “책을 보시라, 우리가 저자의 계략에 빠져 얼마나 고생을 하는지!”라고 쓸 정도. 그런데 이상하게도 저자와 친구들은 시베리아 앓이 증상이 심해진다고 한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니, 나 또한 이 여행이 몹시 궁금했다. 열차에 몸을 실을 날이 곧 올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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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시간여행박흥수 저 | 후마니타스
철도를 사랑하는 현직 철도 기관사가 달리는 열차에 제 몸을 싣고, 어디에서도 다 찾아볼 수 없던 놀라운 이야기들, 보석 같은 사람들을 찾아간다.
김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