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했던가. 박찬욱 ㆍ 박찬경 형제, 워쇼스키 자매, 악동뮤지션 남매 등 서로에게 예술적 영감을 불어 넣어주고 협업을 통해 개인의 작품 세계에 시너지 효과를 내는 이들이 있다. 열정적이고 내밀한 작품으로 대중에게 친숙한 최옥정 소설가와 주목받는 신진 아티스트 최영진 사진가도 남매지간이다. 소설가 누나와 사진작가 동생이 만든 작품은 어떤 것일까? 이들이 함께 만든 포토에세이, 『오후 세 시의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작품집의 사진의 소재가 ‘바다, 나무, 땅, 벽’ 등 몇 가지 주제에 집중해서 깊게 천착한 것 같다. 이런 소재에 매료된 이유가 있는가?
최영진 : 여백이 있는 동양적 느낌의 사진을 좋아하다 보니 여백활용이 쉬운 바다를 많이 찍게 된 것 같고, 나무도 같은 맥락으로 숲보다는 홀로 선 나무를 좋아한다. 땅, 벽 등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오래되지 않았다. 벽, 특히 낡은 벽에는 갖가지 형상이 들어있다. 처음에는 벽에서 나무 형상을 찾기 시작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추상적 이미지들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재미있는 보물찾기 같은 느낌이다.
최근 글쓰기에 관한 저서 출간 이후에 포토에세이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남동생인 최영진 사진작가와 함께이다. 이전에 출간한 포토에세이집 『On The Road』에서는 김문호 사진작가와 작업을 했었는데 그때와 다른 점은 무엇인가?
최옥정 : 첫 번째 포토에세이를 쓸 때는 사진에 대해 거의 무지한 상태였다. 함께 작업을 하자는 제안을 받았을 때 자신이 없어서 많이 망설였다. 김문호 사진작가를 통해 사진이란 어떤 예술장르인가, 하는 기초부터 기본적인 사진이론을 배웠다. 현장에서 사진 찍는 사람들의 다양한 사진 세계를 접하며 사진 보는 안목을 키웠다. 시간도 많이 걸렸고 힘도 들었다. 글이 사진과 걸맞지 않아서 퇴짜를 맞은 적도 있다. 그래도 새로운 분야를 배우고 거기에 작은 역할을 한다는 기쁨으로 열심히 작업했고 도전해보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이번 포토에세이는 전혀 다른 경험이었다. 동생이 찍은 사진을 보고 내 마음이 움직여서 내가 먼저 협업을 하자고 제안했다. 요즘 비주얼 시대 아닌가. 얼마나 많은 화려한 비주얼이 세상을 떠도는데 이런 미니멀한 사진을 오랫동안 혼자 조용히 찍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나는 17년 동안 글을 써온 소설가다. 단지 동생이라는 이유로 내 장르도 아닌 포토에세이를 할 수는 없다. 사진이 좋았고, 사진을 오래 들여다보고 있으면 내 안에 글이 서서히 고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과연 책 한권 분량을 쓴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 의심도 들고, 한 번에 작업할 자신은 없어서 우선 동생의 카카오 스토리에 연재를 해보기로 했다. 매주 한편씩 올리면서 탄력을 받았고 일 년이 다 돼가니까 이 작업에 대한 애정이 생겨서 책으로 묶는 단계까지 왔다. 말할 것도 없이 작가로서 나를 성숙하게 한 또 하나의 작업이었다.
최옥정 작가의 글은 사진과 잘 어울린다. 언뜻 보면 사진과 매칭이 안 되는 것 같은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사진의 깊이를 더하는 글도 있다. 이를테면 「승소」라는 글은 멀리서 바라보는 안개 낀 산의 사진과 함께 있는데, 마치 ‘누들로드의 기원’을 떠올리게도 하고 사진 속의 산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산 속에 꼭 있을 것 같은 절, 절에 있는 스님, 스님이 먹는 국수까지도 떠올리게 한다. 사진과 함께 실은 글은 어떻게 탄생한 것인가?
최옥정 : 나는 글이 꼭 사진과 맞아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최영진 작가의 사진은 선(禪)적인 이미지가 강해서 글을 수용하는 폭이 넓다. 어떤 것은 사진에서 영감을 받아 단박에 써내려간 글도 있고, 어떤 경우는 내가 먼저 글을 쓰고 동생이 거기 맞는 사진을 고른 적도 있다. 나는 소설이든 사진이든 고요하고 여백이 많은 것을 좋아한다. 대사가 많아 수다스럽거나 사건이 많이 일어나는 소설은 내 취향이 아닌 것처럼 사진도 특별한 피사체가 없는데 한참 들여다보면 내게 말을 걸어오는 그런 미니멀한 쪽을 선호한다. 내가 사진을 보고 글을 지었다기보다 사진을 보고 있으면 글이 내게로 왔다고 해야 할까. 이 말은 은유가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작업을 했다.
‘오후 세 시의 사람’이라는 제목에 담긴 특별한 의미가 있는가?
최옥정 : 처음에 생각한 제목은 ‘바다의 안부’, ‘바다는 아침마다 내게 안부를 물었다’ 였다. 최영진 작가가 바다 근처에 살고, 바다 사진이 많고, 사진 속 바다가 내게 ‘잘 있느냐’고 묻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사진이든 글이든 보는 사람의 마음에 잠시라도 평안이 찾아오길 바랐다. 일상을 넘어 자신을 만나는 진정한 휴식이 되는 사진, 안부를 묻는 글 말이다. 그런데 글을 다 써놓고 책을 구성하는 방식으로 글을 배치하고 나니까 또 다른 큰 그림이 보였다. 최영진 작가나 내가 이미 오후 세 시 같은 나이에 와 있어서인지 그런 내용을 담은 글이 많았다. 나는 이 작업을 통해 그런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고 있었던 거다. 그래서 제목을 바꿨다. 인생의 절정을 넘어서 우리와 같은 시기를 보내는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 같은 책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최영진 : 이 책에서 말하는 ‘오후 세 시’는 인생이라는 시계에서 위치한 어느 한 지점이다. 그러나 ‘오후 세 시’는 사진가에게도 특별한 시간이다. 꼭 세 시라고 단정하는 것은 무리지만, 한낮의 강한 빛이 점점 부드러워지고, 그림자가 서서히 길어지는 시간이 오후 세 시가 아닐까. 빛이 따뜻해지고, 왠지 모를 여운이 남겨지는 시간이다. 정확하게는 해가 지기 한 두 시간 전의 빛을 사진가들은 좋아할 것이다.
사진이 웅장하고 장대한 느낌을 주는 반면 글은 소박하고 자기 고백적인 느낌을 준다. 묘한 균형이 있다. 이를 염두에 두고 작업을 했는가?
최옥정 : 사진이 웅장하고 장대한 느낌을 준다면 아마도 극도로 생략되어 있는 이미지가 주는 힘일 것이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아주 연약하고 섬세한 느낌도 함께 가지고 있다. 내가 사진에서 받은 이 두 가지 느낌을 글에 그대로 가지고 오지는 않았다. 나는 내가 잘 모르는 것을 멋있게 쓸 수 있는 스타일의 작가는 아니다. 작든 크든 내가 온 마음으로 이해한 것, 내가 잘 아는 것을 딱 그만큼밖에 말할 줄 모른다. 이런 젠(Zen)스타일 사진에 거대담론의 글이 붙으면 공소(空疎)한 느낌을 줄 수도 있다. 나는 그냥 편안하게 떠오르는 것을 받아 적었을 뿐이다.
최영진 : 사진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면, 아마도 장노출 사진들 때문일 것 같다. 콘트라스트가 강하고, 구름의 역동적인 흐름이 웅장하게 느껴질 것이다. 연작인 바다 사진에서도 그런 느낌이 조금 묻어난다. 이런 사진들은 웅장하고 장대한 느낌을 주려고 의도한 것은 아니고, 정적인 요소와 함께 역동적인 모습을 대비하는데 중점을 두어 작업했다. 정적인 요소를 더 정적으로 만들고 싶었다.
남매로서 작업할 때의 장점이 있다면?
최옥정 : 우리 형제들은 서로 완전히 다른 개성을 가지고 있다. 외모도 성격도 스타일도 전혀 다르다. 그런데 작업 스타일은 비슷했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이야기하며 어떤 지점을 향해 부드럽게 나아갔다. 사람을 잘 아니까 사진을 찍는 배경이나 거기에 담고자 한 것들에 대해 굳이 일일이 설명을 안 해줘도 저절로 알아지는 것들이 있어서 그 점은 편했다.
최영진 : 서로의 생각과 감정을 스스럼없이 표현할 수 있었다는 것. 가족이 아니면 쉽지 않은 일이다.
‘오후 세 시의 사람’으로 상정되는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최옥정 : 오후 세 시가 되면 아무리 기다려도 한낮의 광영은 돌아오지 않는다. 이제 석양을 맞이해야 하고 밤이 기다리고 있다. 진짜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어쩌면 이때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으면 좋겠다. 내게 다가올 인생, 아직 경험하지 않았지만 기대를 갖고 기다릴 수 있는 인생. 도전이기도 하고 기회이기도 한, 위태롭지만 즐길 만한 인생이기를.
최영진 : 내 나이 때 전후의 앞만 보고 가쁘게 달려온 분들이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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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세 시의 사람최옥정 저/최영진 사진 | 도서출판삼인행
멈춤의 상태. 사진작가 최영진과 글작가 최옥정은 한번쯤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스스로에게 물어볼 시간을 갖자고 독자에게 조심스럽게 제안한다.
출판사 제공
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채널예스>에만 보내주시는 자료를 토대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