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의 주제는 모순이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가 다시 한 번 무대에 올랐다. 지난 달 20일부터 국립극단이 선보이고 있는 이번 작품은 영국의 차세대 극작가 겸 연출가인 로버트 아이크와 던컨 맥밀런이 각색한 희곡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1984』는 이미 수 차례 연극과 영화, 드라마, 발레, 오페라 등으로 재해석된 바 있는데, 본 각색본은 ‘부록’에 초점을 맞춰 원작 소설을 재해석했다. 『1984』의 각주와 부록이 과거 시제로 쓰여 있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그 의도와 의미가 무엇인지 질문한 것이다.
연극 <1984>의 번역과 드라마투르기 작업을 맡은 손원정에 따르면, 부록을 소설의 일부로 해석할 경우 “명시되어 있지 않은 또 다른 화자가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 “혹시 그자가 1984년에 기록된 글을 읽고 부록을 작성했을 가능성”도 간과할 수 없으며, 이 때 『1984』는 “미래에 대한 예언”이 아닌 “과거에 대한 회고”로, 전혀 다르게 읽힌다. 이번 희곡은 원작의 부록’부분을 포함시킨 최초의 각색본으로, ‘2014년 올리비에 연극상’ 희곡부문에 노미네이트된 바 있다. 2013년 영국 노팅험 플레이하우스에서 초연된 후 지금까지 영국, 미국, 호주 등에서 공연되고 있다.
연극 <1984>는 관객들이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작품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길 주문하면서, 이야기를 입체적으로 되살려낸다. 소설에는 없었던 미래의 ‘북클럽’과 ‘호스트’가 등장해 액자구조를 이루는 것도 그 중 하나다. 작품은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 인물 사이를 매끄럽게 넘나들고 관객은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에 질문을 던지게 된다. 끊임없이 혼란과 모호함을 유발하는 이러한 설정은 작품의 주제와 밀접하게 닿아 있다. 연극 <1984>를 연출한 한태숙 연출가는 “이 작품의 주제는 인생의 모순, 삶의 모순”이라며 “진실과 모순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물에 이입하기 바라는 것이 나의 계산이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디스토피아 문학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1984』는 1949년에 발표됐다. 당시 조지 오웰은 스탈린주의 체제의 소련을 모델 삼아 소설을 집필했고, 전체주의 체제 하에서의 삶과 그에 반기를 든 개인의 최후를 생생하게 그려냈다.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는 가상의 통제사회인 오세아니아의 국민으로 ‘진리부’에서 뉴스를 조작하는 업무를 맡고 있다. 당은 사상경찰과 텔레스크린 기술을 이용해 국민들을 감시하고, 윈스턴은 점차 당을 향해 의심과 불신을 품게 된다. 연극 <1984>는 윈스턴이 일기 속에 진실을 기록하는 순간과, 미래의 북클럽에 모인 사람들이 한 권의 책을 두고 진실과 거짓을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지금 『1984』를 말하는 이유
1949년, 조지 오웰이 전망한 것은 35년 후의 미래가 아니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그것은 낡고 오래된 과거가 아니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는 더더욱 아니다. 소설에 등장한 텔레스크린 기술은 일상 속의 CCTV와 블랙박스를 떠올리게 하고, 오세아니아의 공용어로 고안됐다는 ‘새말(신어, Newspeak)’은 단어 하나로 대상의 이미지를 규정해버리는 ‘프레임 전쟁’을 상기시킨다. 『1984』에서 당원들을 감시하고 억압하는 존재로 등장했던 ‘빅브라더’는 “절대 권력의 독재자를 지칭하는 대명사”가 된 지 오래다. 한 연구에 따르면, 소설에서 조지 오웰이 예언한 197가지 중 100가지 이상이 이미 실현됐다고 한다.
이번 작품에서 윈스턴 스미스를 연기하는 배우 이승헌은 “처음 <1984> 출연 제의를 받았을 때 두 번 생각도 안 하고 흔쾌히 하겠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적절한 시의성이었다. 이 이야기는 지금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고 말한 바 있다. 그의 말처럼 조지 오웰이 남긴 메시지는 과거가 아닌 현재와 미래를 비춘다. 한태숙 연출가의 말을 빌리자면 “세상이 끊임없이 변해도 독재란 수단은 존재한다는 메시지”라고 할 수 있을 터. 연극 <1984>를 통해 다시 만난 오웰의 목소리는 섬찟한 의구심으로 남는다. 공연장을 나서는 순간, 어쩌면 독재의 수단은 더욱 더 교묘해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한태숙 연출가는 ‘왠지 모르게, 윈스턴 역할을 떠올렸을 때 제일 먼저 배우 이승헌의 얼굴이 생각났다’고 했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그가 왜 ‘이승헌의 윈스턴’을 상기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을 것 같다. “의지가 강해 보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좀 피폐한 느낌도 어울린다”는 연출가의 예민한 촉은 조금도 엇나가지 않았다. 무엇도 확신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혼돈에 휩싸이면서도 그에 잠식되지 않으려는 한 개인의 불안한 내면을, 배우 이승헌은 예민한 감각으로 되살려낸다. 그와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 ‘오브라이언’을 연기한 배우 이문수는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내며 극의 균형추 역할을 한다.
대본, 연출, 연기, 어느 것 하나 빈 구석이 없는 연극 <1984>는 ‘다시 보고 싶은 작품’으로 꼽는 데 주저함이 없는 작품이다. 첫 번째 이유는 한 번의 관람으로 이야기를 전부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따르기 때문이고, 두 번째 이유는 그 혼란 속에서 발견되는 메시지를 곱씹는 묘미가 있기 때문이다. 연극 <1984>는 오는 19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만날 수 있다.
ⓒ장제훈
임나리
그저 우리 사는 이야기면 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