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효서는 ‘나는 이쪽저쪽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지난 30년 동안 그가 오고 간 세계의 끝에는 서사와 비서사, 익숙함과 낯섦, 대중적 소설과 실험적 소설이 있었다. 소설집 『아닌 계절』은 후자의 세계와 더 가깝다.
모호한 공간과 뒤틀린 시간 속에 알 수 없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이름조차 가지지 못했거나 아무런 의미도 없어 보이는 이름으로 호명된다.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이렇다 할 관심을 가지지도 않고, 물론 영향을 받지도 않는다.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오직 하나. 그들이 피부로 감지하는 온도와 감촉, 그리고 소리다. 의심의 여지없이 말할 수 있는 ‘현실’이 있다면 겨우 그 정도일 지도 몰랐다. 숱한 감정들로 인지한 현실은 실제와 얼마나 같은 걸까. 이 의문에서 『아닌 계절』은 태동했다.
독자는 이야기가 서서히 부풀어 올랐다가 일순간에 꺼지는 ‘익숙한’ 구조를 기대하지만 작가는 의도적으로 맥락의 마디마디를 끊어놓았다. 덕분에 독자들은 작품 속에서 길을 잃는 생경한 경험을 한다. 왜 이런 소설을 썼을까, 의문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소설가는 이러한 궁금증이 길게 이어지기를, 바라고 있다.
예술가의 짓궂은 장난
지난 4년간 발표하신 작품을 묶으셨어요. 계절의 감각이 살아있는 소설들인데요. 집필하실 때부터 계절을 염두에 두고 쓰셨나요?
처음부터 계절과 관련해서 쓰자고 생각했어요. 우리는 오감을 통해서 세상을 느끼잖아요. 그런데 소설들은 다 ‘오감이라는 건 사실 믿을 수 없다’는 것에서 출발해요. 우리가 감각을 터무니없이 믿어온 것에 대한 반성이죠. 감각이란 뭘까를 생각해 보면, 정말 우리가 믿어도 좋거나 믿을만한 감각이라고는 뜨겁거나 차갑거나, 이런 것밖에 없는 것 같아요. 가령 여름은 덥고 겨울은 춥다고 말하는 건 조금 분명해 보이는데 나머지는 이야기할 수 없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계절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었죠.
인물들은 외부세계에 큰 관심도 없고 영향을 받지도 않아요. 온도나 촉감, 소리 같은 방식으로 지각할 뿐이죠.
우리가 날씨를 보면서 느끼는 감정이 있잖아요. 그 느낌도 나한테서 나와서 대상에 투영되는 거거든요. 날씨가 좋아도 그 날 기분 나쁜 일이 있었다면 짜증나는 날씨라고 느끼는 것과 같은 거예요. 세상이나 내가 보는 모든 대상들은 이미 내 안에 구성돼 있는 것이고, 그것의 투영에 불과한 거죠. 그런데 정말 세상이 그럴까, 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인물들로 하여금) 내 안에서 나가는 것을 묶어버리고, 바깥에 있는 세계나 대상을 피동적으로 받아들이게 한 거죠. 인물들은 마치 블랙박스처럼 그냥 보이는 것들을 계속 저장하면서 움직여요. 어떤 의지나 의도, 생각, 사념이 없어요. 그런 게 있으면 (외부의 것이) 들어오지 않고 튕겨 나가겠죠. 아니면 자기 안의 것이 나가기 바쁠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인물들이 다 맹하죠(웃음). 일종의 살아있는 인간 메모리처럼 돌아다녀요. 그 사람을 중심으로 사계절이 돌아가는 거고요.
또한 무심하게 현실을 관망하면서 감각으로 인지한 것에 대해서만 이야기합니다.
대표적인 게 춥다, 덥다, 그거죠(웃음). 그 외에도 뭔가 보이기도 하고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것들이 어떤 맥락을 형성하지 않아요. 맥락을 형성한다는 자체가 벌써 내가 작동한다는 거거든요. 내 사유, 내 관점으로 맥락을 형성하는 거잖아요. 화자들의 눈에 보이는 것들은 다 맥락을 형성하지 않아요. 그냥 이유가 없어요. 왜 그걸 보고 있는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별 이유가 없이 벌어지는 일들이에요. 기존의 소설은 그것들을 잘 구성하고 맥락을 연결해서 의미를 추구했죠.
소설집의 끝에는 안경수 화가와 주고받은 이메일의 내용이 실려 있어요. ‘오류’를 주제로 대화를 나누셨죠?
‘잠 못 이루는 사람들’이라는 전시회를 같이 준비했는데, 그때 주제가 ‘오류’였어요.
안경수 화가에게 보내신 메일에서 “양식화되어 이미 방향 지어진 독자의 감각에 ‘오류를 발생’시키고 싶은 짓궂은 의도”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소설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데 있어서 오류를 발생시키자는 생각은 없었어요. 그런데 오류를 키워드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까 ‘우리가 하는 일이 오류를 발생시키는 일이 아닐 것도 없잖아?’ 하는 생각이 든 거예요. 오류라는 건 어떤 원리나 원칙, 혹은 질서를 어기는 거잖아요. 세상은 의미와 질서로 가득 차있고 우리는 그걸 의심하는 건데, 그러면 나올 게 오류밖에 더 있겠어요? 하지만 ‘질서 밖이라고 해서 다 오류인가’ 싶기도 하죠. ‘질서 바깥에 있는 진짜를 오류라고 하면서 지키고자하는 질서라는 건 도대체 뭔가’, ‘그 질서를 스스로 인정하면서 살아야만 하나’, ‘그런 세계 속에서 우리가 살기를 원하나’라는 질문도 던지게 되고요. 그러다 보니까 내 작품이 아주 기꺼운 오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안경수 작가도 거기에 동의를 한 거죠.
두 분이 ‘선입견’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셨는데요. 『아닌 계절』에는 인물과 배경에 대한 친절한 설명이 없습니다. 독자의 선입견을 가능한 배제하고 싶으셨나요?
그렇죠. 인물의 이름까지도 밝히지 않은 소설이 있잖아요. 이름에 묻어 있는 선입견이 얼마나 많아요. 기존의 서사 중심의 소설들은 그런 걸 오히려 적극 활용하기도 하죠. 이름만 갖고도 인물 묘사를 반 이상 할 수 있는 건데, 저는 오히려 반대로 안 해버리는 거예요. 뿐만 아니라 여기가 한국인지 프랑스인지 영국인지 모르는 거죠. 공간과 연결시킬 수 있는 선입견이 있잖아요. 예를 들면 진도라고 했을 때 세월호, 진도 아리랑, 남도, 홍주, 이런 선입견이 있는 건데요. 그런 걸 배제하면서 가야 될 필요가 있었던 거죠.
그런 낯선 부분들로 인해서 독자들은 혼란을 경험하기도 할 텐데요.
이 소설을 어떻게 읽어야 될지 모르는 사람에게는 매우 답답하고 짜증나는 일일 수도 있어요. 그런데 그들의 당혹감이 이 소설에 접근할 수 있는 일종의 이유도 될 수 있고, 그게 하나의 동기가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어쩌면 우리 모두는, 그것이 좋건 나쁘건, 다 자기가 구성해버린 세계에 빠져서 사는 것 아닐까 싶기도 한데요. 이런 생각을 하는 데에는 일종의 충격요법이 필요하잖아요. 사람을 당황하게 만들어서 ‘왜 이러지?’ 하고 질문하게끔 하지 않으면, 자기가 갖고 있는 생각이나 느낌을 계속 강화시키고 재생산하게 돼요. 그럴수록 더 깊이 빠지게 되고요. 예술이 할 일이 뭐겠어요. 그렇게 생각하는 흐름과 방향을 막아보고 훼방 놓는 거죠. 약간 짓궂은 장난 같은 거라고 할까요. 뒤에서 딱 때리고 도망가는(웃음). 그런 걸 예술가들이 하지 누가 하겠어요(웃음).
내가 ‘이상’인 것처럼 상상하면서 써요
한 독자는 「바다, 夏日」이 가장 엽기적인 내용이었다고 리뷰를 남겼더라고요(웃음).
중세에는 예술이 신앙이고 종교였죠. 거룩함의 표현이었어요. 그런 방식의 예술 활동을 승화라고 하는데, 승화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숭고하고 거룩하게 떠받들어 올려서 표현하는 거거든요. 위로 올라가는 거라고 할 수 있는데, 현대에 와서는 승화 예술 이론에 대한 반발이 생기죠. 거꾸로 내려오는 거예요. 승화하고 거룩하고 이상적이어야 했던 예술이 이제 더럽고 웃기고 엽기적인 것으로 내려오고 있는 거예요. 그게 일종의 충격요법이겠죠. 우리가 말하는 거룩함이란 무엇이며, 숭고함이란 무엇이며, 승화란 무엇이냐에 대해서 탈승화식으로 질문을 던지는 거예요.
말씀하신 ‘충격요법’은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요?
충격적으로 우리 삶의 진면목을 바라봐야 되는 거죠. 그동안 ‘예술이란 곧 아름다움이다’라는 식으로 숭고의 미학을 이야기했는데, 물론 지금도 숭고의 미학을 씁니다만, 지금의 숭고는 ‘탈승화의 숭고’예요. 「봄 나무의 말」 같은 작품도 굉장히 끔찍하잖아요. 저는 그걸 더 끔찍하게 장편으로 쓸 건데요. 끔찍한 걸 거룩하고 멋있고 세련되게 보여주는 게 아니라 말도 안 되게 막 보여주는 거예요. 극단적인 탈승화 방식이죠.
「바다, 夏日」의 ‘미음’이라는 인물이 엽기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뭘까요?
‘문학은 숭고해야 된다’는 전제가 깔리면 그런 것들이 엽기적으로 보이는 거죠. 그런데 우리 앞에는 거룩하거나 숭고한 것 빼고 무슨 일이든 다 일어날 수 있어요. 그렇게 생각하면 하나도 엽기적이지도 않고 ‘내 이야기는 아니지만 저쪽에 그런 이야기가 있을 수 있어’라고 생각하게 되죠. ‘꼭 행위의 근거가 있어야 돼?’ 싶기도 하고요.
근거가 있다고 해서 이해 가능한 일이 되는 건 아니니까요.
그렇죠. 근거 자체가 허무맹랑하거나 악랄할 수도 있잖아요. 저는 아무 이유 없이, 근거 없이, 대책 없이, 한 인물을 ‘엽기적인 것 같으면서도 아닌 것 같은’ 모습으로 그린 거예요. ‘미음’이 선생이면서도 이상한 행동을 보이잖아요. 도대체 뭐하는 사람인지 알 수 없는 인물인데, 저한테도 낯설어요(웃음). 「12월 12일-이상에게」의 ‘이응’도 낯설고, 다 낯설죠.
「12월 12일-이상에게」은 이상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입니다. 이 소설은 어떻게 쓰게 되셨어요?
우선 저는 이상을 좋아했고, 이상 때문에 글을 쓰겠다고 생각한 거였어요. 그리고 문청 시절에는 정말 이상처럼 썼거든요(웃음). 그래서 애들한테 엄청 욕먹었죠. 아무것도 모르면서 흉내만 낸다고(웃음). 그런데 그런 기질이 계속 살아있어요. 제가 등단한 80년대에는 이상적이거나 실험적이거나 모던한 소설을 용납을 안했어요. 등단도 할 수 없었고요. 그리고 저 또한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시대에 저항할 수밖에 없잖아요. 몸으로든 정신으로든 저항하다 보니까 소설이 리얼리즘 방식일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시작을 했죠. 또 시골 태생이고 없는 집 자식이니까 얼마나 잘 맞아요? 쓸 것도 많고(웃음). 한편으로는 이상을 품고 있었지만 시대적으로 태생적으로 이쪽(리얼리즘)과 친근했어요. 그래서 나는 이쪽저쪽 왔다 갔다 해요.
「12월 12일-이상에게」에는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이 혼재되어 있는 느낌이에요.
‘이응’이라는 인물이 매일 걸어 다니는 코스가 있어요. 그런데 출발할 때는 현재였다가 저만치 가면 과거가 돼요. 한 사람이 하루에 겪은 일인데도 불구하고요. 그러다가 다시 현실로 돌아오죠. 질서라는 걸 흔들거나 깨기 위해서는 시간, 공간, 인간이라는 세 가지를 흔들어야 돼요. 그것들이 이 세계를 구성하는 최소 요소거든요. 셋 중에 하나를 흔들거나 셋을 다 흔들어 버리면 세계가 흔들리는 거예요. 「12월 12일」에서도 ‘이응’이 걸어 다니면서 시간이 달라짐에 따라 공간도 달라지죠. 주의 깊게 보면 그런 것들이 다른 소설에서도 나타나요. 한 시간에 두 개의 공간이 있거나, 한 공간에 두 개의 시간이 있죠. 그렇게 되면 내가 여기 있기도 하고 저기 있기도 하고요.
「하이눈, August」에서 그런 순간을 볼 수 있었어요.
그 소설에 보면 내가 여기 있는데 저기에도 내가 있죠. 시간 공간 인간이라는 것을 뒤흔들면 과거와 현재, 이 공간과 저 공간, 나와 또 다른 내가 겹쳐요. 이를테면 시간을 달리하면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거고요. 공간을 달리하면 내가 여기와 저기에 동시에 있을 수 있는 거예요. 사실은 이런 것들이 소설 속에 전략적으로 들어가 있어요. 「12월 12일-이상에게」에서도 그런 게 보이는 거고요. 왜냐하면 아주 철저한 질서를 구축하고 있는 세계를 흔드는 방법은 시간, 공간, 인간 세 가지를 몽땅 흔들거나 그 중에 하나를 흔드는 거거든요. 독자들은 그렇게까지 읽을 수도 없거니와 읽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요. ‘왜 이렇게 낯설고 헷갈리게 썼지?’ 하고 이유를 한 번 생각해 보는 것, 거기까지만 가면 된다고 생각해요.
「12월 12일-이상에게」를 읽으면서 ‘이상도 이런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봤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상은 사람 자체가 다른 사람들하고 달랐잖아요. 그 사람은 원래 천재예요. 세상이 다 이상하게 보이는데, 다른 사람 눈에는 그런 이상이 이상하게 보이는 거죠. 그런데 제가 생각할 때 저는 천재도 아니고 이상한 놈이 아니거든요(웃음). 이상 같은 사람은 그냥 자기가 보고 느끼고 쓰면 작품이 돼요. 그런데 저는 이상으로 빙의를 해서, 내가 이상인 것처럼 생각하고 상상하면서 써야 겨우 원하는 작품이 돼요.
예술가들은 ‘희생적 모성애’가 있는 것 같아요
천재들의 삶은 순탄치 않잖아요. 이상도 예외가 아니었고요. 그런 점에서는 천재가 아닌 편이 더 나은 것 같기도 해요(웃음).
이상은 사는 게 정말 힘들었죠. 저는 천재가 아니니까 안 힘들잖아요(웃음). 세상이 다 멀쩡해 보이거든요. 그러니까 멀쩡하게 보이는 세계를 어떻게 하면 안 멀쩡해 보이게 쓸까를 고민하죠. 글 쓰는 순간만큼은 이상의 눈으로 봐야 되니까 굉장히 힘들어요. 나머지 시간은 안 괴롭고요. 그런데 천재들은 쓰는 시간만 안 괴롭고 나머지 시간은 다 괴로울 거예요(웃음). 그러나 예술에 순교하는 예술가들은 그런 예술가들이 부럽죠. 고흐도 그랬고, 얼마 전에 <에곤 쉴레>라는 영화를 봤는데 에곤 쉴레도 여간 힘든 삶을 산 게 아니에요. 모든 유명한 예술가들을 보면 삶이 순탄치가 않아요. 예술혼이라는 게 짓궂잖아요. 쉽게 내주지 않죠. 어느 한 인간에게 정말 좋은 재능을 주면, 그것과 더불어 몇 배 더 힘든 삶을 줘요.
고흐는 생전에 한 점의 그림도 팔지 못했다고 하죠. 보통 사람의 눈으로 보면 ‘죽은 후에 영광을 얻은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해요.
고흐는 남이 내 작품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하여 작품을 포기하지 않았죠. 더욱이 ‘그러면 너희들이 좋아하는 그림을 그려주겠어’라고 하지도 않았잖아요. 저주 받은 천재인 거죠. 남들이 알아주는 않는 걸 고통스러워하고, 돈이 없어서 맨날 동생한테 아쉬운 소리를 하잖아요. 그런데도 그림은 여전히 그리고 있죠.
예술가로서 부럽다는 생각이 드세요?
예술가들은 그런 게 있잖아요. ‘나는 어떻게 돼도 좋으니 예술만 잘 살았으면 좋겠다’라고 하는, 그런 묘한 ‘희생적 모성애’ 같은 게 있잖아요. 내가 죽더라도 내 자식은 잘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그런 게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나를 고스란히 희생했는데도 불구하고 작품이 실패할 수가 있잖아요. 그걸 견디기 힘들죠. 그게 무섭고 두렵죠. 내 작품이 정말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예요. 만약에 내 작품이 좋은 작품으로 인정받고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면, 당장 내일 죽는다고 해도 나는 그리로 갈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확신을 못하니까 고민하는 거죠(웃음). 그런데 나는 왔다 갔다 하니까, 그게 좋은 것 같아요. 아마 2년 정도 뒤에는 멀쩡하게 서사 중심의 소설을 쓸 거예요. 심지어는 드라마 같은 소설도 쓰게 될 거고요. 내가 좋으니까, 즐거우니까 하는 거예요.
「봄 나무의 말」은 굉장히 기이한 시도를 한 작품입니다. 왼손으로 쓰셨다고 알고 있는데요. 확실히 오른손으로 쓰실 때와는 다르던가요?
다름의 정도가 아니고, 저도 깜짝 놀랐어요. 머리가 하나이고 손은 두 개니까, 오른손으로 쓰나 왼손으로 쓰나 쓰기가 불편할 뿐 별 차이가 없을 것 같잖아요. 그런데 완전히 달라요. 왼손으로 쓰면 문장이 아이가 써놓은 것 같다니까요. 아이 아니면 바보가 쓴 것 같아요. 희한하지 않아요?
우뇌를 사용하느냐 좌뇌를 사용하느냐의 차이일까요?
정말 이상한 체험을 한 적이 있어요.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에서 양심수들이 사는 독방을 하루 동안 체험하는 행사를 했었는데, 거기 참여했었거든요. 24시간도 아니고 8시간 정도 독방에 있는 건데, 저도 처음에는 ‘그걸 못하겠어? 하루 종일 소설 쓰느라 꼼짝도 안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 가서 오래간만에 소설구상이나 하지’하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몸을 가둬놓으니까 사고가 안 돌아가더라고요. 내일 원고 쓸 일이나 친구랑 술 먹을 일을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게 안 되더라고요. 마찬가지로 왼손으로 쓰는 것도 ‘글씨만 삐뚤빼뚤하지 문장이 다르겠어?’ 했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글씨도 반전된 상태로 써져요. 나중에 장편으로 쓸 때는 반전된 글씨로 출간을 해볼까, 하는 생각도 있어요.
「봄 나무의 말」는 화자가 독특한 작품이기도 해요. 나무의 시선에서 이야기를 들려주셨는데요. 작가님께도 색다른 경험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인간사를 나무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 인간이 본 것과는 다를 거라고 생각했어요. 인간에 의해서 질서화 된 세계가 아닌 것이 보여질 거라고요. 그래서 나무를 택했지만 한계가 있죠. 내가 완전히 나무에 빙의될 수 없고, 나도 인간이니까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잖아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글을 쓰면서 계속 ‘화자가 나무야’라고 생각하게 되잖아요. 그 효과만이라도 조금 가져가 보자고 생각했고요. 한 번 연습은 했었죠. 황순원문학상을 탔던 「명두」에서 나무가 화자였어요. 그때 효과가 좋아서, 한 번 해봤죠(웃음).
장편 소설로 탄생할 「봄 나무의 말」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합니다.
실제로 쓰여질 작품은 더 참혹합니다. 전쟁으로 한 마을이 완전히 쑥대밭이 되고 몰살되는 이야기이고, 실제로 그런 경우가 많이 있었어요. 그런데 아직 우리 체제에서 그 말을 누구도 잘 못 꺼내거든요. 그 모든 금기를 걷어내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이 있어요. 아마 굉장히 잔혹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인상이 찌그러지면서 ‘도대체 이런 작품은 왜 쓰는 거야?’라는 반응이 올 거예요. 사실 저는 그런 이유 때문에 쓰려고 하는 거죠. ‘그러면 안 돼? 나는 그러고 싶다’라는 건데요. 예술은 항상 뭔가를 아련하게 하는, 혹은 미학적으로 포장된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니까 그 참혹한 사실에 대해서 말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계속 쓰기 위해서 계속 딴짓을 합니다
올해 등단 30주년을 맞으셨습니다. 이제는 관성에 의해 편하게 작품을 쓰실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여전히 어려운 시도를 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노하우나 스킬에 의해서 대량생산되거나 갈수록 쉬워지는 건 사실 예술이 아니죠. 그리고 예술가들은 그렇게 되는 것이 가장 즐겁지 않고 재미없어요. 그러니까 늘 다르게 모색하는 것 자체가 즐거워요. 힘이 들어도 그래야만 살맛이 나는 존재들인 것 같아요. 그러니까 저는 계속 쓰기 위해서 계속 딴짓을 하는 거죠. 평생 달라지지 않고 자기 방식의 소설을 끝없이 생산하는 사람도 있는데, 저는 그 사람들이 존경스러워요. ‘어떻게 저렇게 평생을 똑같이 써올까, 지겹지도 않나’ 하고 신기해요(웃음). 그들은 문학 정치, 문학 사회학 쪽은 하는 사람들인데, 소설이라는 장르에 실어서 전달하려고 하는 내용을 굉장히 중요시해요. 그러니까 쓸 거리가 생기면 좋아하죠. 제 경우에는 쓸 거리가 있어서 좋아하는 게 아니라 ‘이건 이런 방식으로 써보고 싶어’라는 생각이 들 때 즐거워요. 막 쓰고 싶어지고요.
‘무엇을 쓰느냐’보다 ‘어떻게 쓰느냐’에 중점을 두신다는 이야기인데요. 예전에는 ‘어떻게’보다 ‘무엇을’에 방점을 찍으셨었나요?
그런 적이 있죠. 『비밀의 문』이라든가 『랩소디 인 베를린』 같은 경우에는 굉장히 유장한 이야기가 있거든요. 현대와 과거가 맞물리면서 길고 오래된 이야기들이 진행돼요. 그러니까 어떤 사람들은 저한테 줄거리를 이끌어나가는 재주도 있다고 말해요. 가끔 보면 저도 ‘어떻게 내가 이런 이야기를 만들었을까’ 싶기도 해요. 그런데 그런 작업을 계속 하다 보면 지겹고 싫어요. 그러면 다시 ‘장난 한 번 쳐볼까?’하고 이쪽에 와서 작품을 만들어내는 거예요. 계속 하다가 또 재미가 없어지면 저쪽으로 다시 가고요. 저는 이것이 어떤 전략이라고 생각하지 않고요. 생겨먹기를 이랬다저랬다 변덕이 있는 거예요. 변덕은 나의 힘인 거죠(웃음).
지난 30년 동안 소설을 써오셨어요. 아직도 ‘나는 왜 쓰는가’라는 질문을 하시나요?
이제는 안 해요.
답을 내리셨어요?
‘왜 쓰는가’라는 게 거창한 질문 같지만, 계속 전업작가로 살아온 저 같은 사람에게는 생활고와 연결이 되는 질문이에요. 두 아이와 전업작가의 삶에 충실한 아내까지 셋의 생계를 내가 책임져야 되니까 ‘나는 왜 쓸까’ 하고 생계형 질문을 던지는 거예요. 거기에는 인문학적 질문도 섞여 있죠. 그런데 답은 항상 ‘모르겠다’로 가요.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이냐’, ‘그래도 써야지’ 그렇게 두 개의 답이 나와요. ‘모르겠어’와 ‘그래도 써야지, 뭐’ 그 두 개예요. 그래서 ‘왜 쓰는가’라는 질문을 안 하는 거예요.
결국 쓸 테니까, 굳이 답을 찾을 이유가 없네요.
왜 쓰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멋있게 답하는 작가들도 있죠. 『나는 왜 쓰는가』라는 책도 있잖아요. 그런데 멋진 답을 내놓는다고 해서 스스로 그 답에 동의하게 될지 모르겠어요. ‘나는 왜 쓰는가’에 대해서 다 쓰고 나서 점을 찍는데 이건 답이 아니라고 후회가 밀려오면 어떻게 하겠어요. 결국 (왜 쓰는지) 모르는 거잖아요. 그래서 참 부질없는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숭산 스님을 좋아했는데, 스님이 늘 좌우명처럼 갖고 계셨던 게 있어요. ‘오직 모를 뿐’, ‘오직 할 뿐’이에요. 제 경우에는 ‘오직 모를 뿐’, ‘오직 쓸 뿐’인 거죠. 『선의 나침반』을 읽고 스님 말씀의 깊이를 조금은 받아들일 수 있게 되니까, 아주 자연스럽고 편하게 ‘왜 쓰는지 모르겠다, 다만 쓸 뿐’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러고 보면 모르는 게 아니라 답이 나온 거죠(웃음).
‘오직 쓸 뿐’, 그것이 중요한 거군요.
‘왜 쓰는지 모르겠어, 그냥 쓰는 거야’ 하고 생각하는 거죠(웃음). 그래도 한 가지 이유를 이야기한다면, 하면서 지겹지 않고 즐겁고 뿌듯한 건 이것밖에 없으니까 계속 하는 거죠. 그런데 정말로 괴로울 때가 있어요. 나이가 드니까 감각이 떨어지거든요. 모든 게 노쇠해가니까 다 딱딱해지잖아요. 감각이 생명인데 감각 떨어지고, 기억력도 떨어져요. 여러 가지가 안 돼요. 그런데 또 욕심이 있잖아요. ‘지금까지 써왔던 그 어떤 내 소설보다도 더 잘 써야지’라는 마음이 있잖아요. 몸과 마음이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거예요. 이 두 방향의 갈등이 굉장히 고통스러운데, 요즘은 ‘어떻게 이 고통을 기쁨으로 바꿀까’라는 생각을 많이 해요.
소설가를 꿈꾸는 이들에게는 어떤 조언을 들려주세요?
문창과 학생들을 만나게 되면 늘 이야기하는 건데요. 대개 내 취향이 아닌 소설들은 안 읽잖아요. 자기 취향의 소설만 읽죠. 그건 자유이고 그럴 수밖에 없고 자연스러운 일이에요. 일반 독자에게는요. 그러나 문창과 학생이고 소설을 쓰고자 하는, 소설전문가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 혹은 두 개의 독법만 가지고 있으면 안 돼요. 어떤 작품도 읽어낼 수 있는 다양한 독법을 가져야죠. 그러려면 다양한 작품을 읽고 거기에 익숙해져야 돼요. 읽어내는 데에서 그치는 게 아니거든요. 그게 자신의 작품에 반영이 돼요. 그런 이야기를 해주죠.
편향된 독서를 경계해야 된다는 말씀이신데요.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해요.
소설을 쓰겠다는 사람들이 고집이 세서, 한 가지 방식을 자기 개성으로 삼아서 밀고 나가려는 경향이 있어요. 그런 사람들은 자기 작품, 자기 작품하고 비슷한 것만 작품으로 인정하잖아요. 스스로 자기 입지를 옹색하게 만드는 일이고, 더 좋은 작품에 대해서 눈을 못 뜨게 되는 거예요. 그러지 않기 위해서라도 골고루 읽어야 돼요. 일반 독자들은 대개 자기 취향으로 읽는데, 그러다 보면 두 가지 위험이 있을 수 있어요. 그게 진짜 자기 취향인지도 모르면서 자기 취향이라고 철썩 같이 믿게 되고요. 또 하나는 남에게 자신이 읽은 소설에 대해 말함으로써 상대방에게 쉽게 파악 당한다는 거예요(웃음).
“이건 누가 봐도 구효서 소설이다”라는 말보다 “한 사람이 썼는데 볼 때마다 작품이 다르네”라는 말을 듣고 싶다고 하셨어요. 『아닌 계절』은 확실히 그런 반응을 얻지 않을까 싶은데요. 독자들에게 듣고 싶은 또 다른 이야기가 있을까요?
이 소설들은 독자한테 말을 거는 이야기지,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게 아니잖아요. 약간 딴지를 건다고 할까요. 독자한테 가서 ‘뭐해? 이거 한 번 볼래?’ 이러는 건데. 다만 독자들이 읽고 ‘이거 뭐지? 왜 이렇게 썼지?’ 하는 궁금증을 조금 길게 간직했으면 좋겠어요. 이게 뭐야, 하고 그냥 덮지 말고요. 그런 궁금증을 길게 간직한다는 건, 나에게 낯설고 내가 알 수 없다고 하여 배척하는 게 아니잖아요. 알 수 없고 익숙하지 않은 것들이 나를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세계나 생각으로 이끌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는 거죠.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거예요. 답은 없어요. 다만 ‘나는 오래 그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봤어’라는 정도만 되면 딱 좋을 것 같아요.
임나리
그저 우리 사는 이야기면 족합니다.
freewill3
2017.05.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