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처음 독자] 리어 리더만을 소개합니다
지금도 세계 각국의 저자와 출판사들이 각자의 언어로 책을 만들고 있다. 그들의 서점에 놓인 책들은 아직 한국 독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 책을 한국에서 처음으로 읽는 사람은 번역자일 것이다. 그리고, 번역자야말로 한 줄 한 줄 가장 꼼꼼하게 읽는 독자이기도 하다. 맨 처음 독자, 번역자가 먼저 만난 낯선 책과 저자를 소개한다.
글ㆍ사진 박병철(번역가)
2017.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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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입자_리언 레더먼.jpg

 

신의 입자, 신의 입자... 정말 많이 들어본 말이다. 특히 나처럼 이론물리학을 전공한 사람들은 “신의 입자는 과연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놓고 시도 때도 없이 갑론을박을 벌여왔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니 대체 언제부터 힉스입자(Higgs particle)를 ‘신의 입자’라 부르기 시작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힉스입자를 처음으로 예견했던 피터 힉스(Peter Higgs)가 그런 별명을 붙였던가? 아닌 것 같은데……. 그리고 다른 이름도 많은데 왜 하필 신의 입자일까? 신의 오묘한 섭리가 힉스입자에 고스란히 담겨있다는 뜻일까? 툭 하면 신(神)을 찾았던 아인슈타인도 후배 물리학자들에게 그다지 좋은 소리를 듣지 못했는데, 누가 또 진부하게 신을 들먹이는가? 아무튼 다들 신의 입자라 부르고 있으니 나도 그 대열에 끼는 수밖에 없지만, 뒷맛이 영 개운치 않다. 난 신 같은 거 전혀 안 믿는데…….

 

이 모든 의문은 이 책 한 권으로 말끔하게 풀렸다. 그러면 그렇지, 원래 제목은 신의 입자(God Particle)』가 아니라 『빌어먹을 입자(Goddamn Particle)』였다. 분명히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발견되지는 않고, 끝까지 발견되지 않는다면 근 50년 동안 명목을 유지해온 표준모형(Standard Model)이 폐기될 판이니 참으로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편집을 거치는 과정에서 언어순화를 한다고 damn을 빼는 바람에, 후련했던 제목이 졸지에 성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진부한 제목으로 바뀌어버렸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신의 입자』보다 『빌어먹을 입자』가 훨씬 좋다. 힉스입자를 향한 물리학자들의 애증이 절절하게 배어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인 리언 리더만(Leon Lederman)은 1988년에 노벨상을 받은 실험물리학자이다. 그가 이론물리학자였다면 『빌어먹을…』이라는 제목을 절대로 떠올리지 않았을 것이다. 이론물리학자가 책상 앞에 앉아 우아한 자세로 스토리를 써나가는 시나리오작가라면, 실험물리학자는 그것을 스크린에 구현하기 위해 세트를 세우고, 못 박고 톱질하는 노동자에 가깝다. 수십 년 동안 차가운 콘크리트바닥에서 새우잠을 청해가며 그 고생을 했는데 도통 발견되질 않으니, goddamn이라는 말이 튀어나올 수밖에.

 

힉스입자에 대하여 상세하고 친절한 설명을 기대하는 독자들은 이론물리학자가 쓴 다른 책을 읽는 것이 좋다. 이런 책은 위에서 말한 ‘시나리오’에 해당하여, 이론적 배경과 수학적 구조가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반면에 레더먼의 책은 우아한 시나리오가 아니라, 힉스입자를 찾기 위해 물리학의 최전선에서 모든 난관을 몸으로 극복하며 생고생을 해온 실험물리학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의 책을 번역하면서 느낀 소감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된다. (1) 이론이 제아무리 아름답고 깔끔한 상태로 태어났다 해도 그것을 완성시키는 최후의 장인은 실험물리학자이고,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험물리학자들은 그에 합당한 명예를 누리지 못하고 있으며, (3) 제아무리 심오한 내용이 담긴 책도 유머가 없으면 지루하다는 것이다. 내가 결코 짧지 않은 책을 끝까지 흥미롭게 번역할 수 있었던 것은 간간이 튀어나오는 레더먼의 재기 발랄한 유머 덕분이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었을 때 그의 유머를 떠올리면서 혼자 킥킥거리다 보면 그 유머가 나오게 된 동기를 생각하게 되고, 그러면서 책의 내용을 자연스럽게 되새길 수 있었으니, 역시 웃음은 관심을 유발하는 최고의 동기인 것 같다. 독자들도 이 책을 덮고 나면 물리학적 내용보다 유머가 먼저 떠오를텐데, 그 후에 연상작용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므로 유머만 기억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책에 실험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2장에서 데모크리토스와 레더먼 사이에 오가는 상상 속의 대화는 원자론과 입자물리학의 역사를 개념적으로 정리하는데 더 없이 훌륭한 가이드였다. 그 뒤에도 티코 브라헤(Tycho Brahe)와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아이작 뉴턴(Isaac Newton) 등 물리학사에 위대한 업적을 남긴 대가들과 그들이 창안한 이론이 줄줄이 등장하는데, 레더먼은 이들 모두를 실험물리학자로 간주하고 있다. 어? 그런가? 생각해보니 정말 그렇다. 교과서에 단골로 등장했던 그들은 자신만의 이론을 세우고,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 실험(또는 관측)까지 직접 수행했다. 과거에는 이론물리학자와 실험물리학자 사이에 뚜렷한 구별이 없었기에 팔방미인이 될 수밖에 없었겠지. 그러나 요즘은 두 분야가 확연하게 분리되어있으니, 묘한 열등감이 몰려온다. 고전음악도 마찬가지다. 바흐와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쇼팽, 파가니니…… 모두가 훌륭한 연주자면서 작곡가였는데, 요즘 연주자들이 작곡을 했다는 말은 거의 들어본 적이 없다. 물리학이건 음악이건, 각 분야들이 지나치게 특화되어 한 번에 두 가지를 할 수 없게 된 것인지, 아니면 현대인의 능력이 옛날사람들보다 떨어지는 것인지 생각 좀 해봐야겠다.

 

나는 지난 26년 동안 약 60권의 책을 번역했다. 이쯤 되니 통계자료가 제법 쌓였는데, 내가 봐도 신기한 현상이 하나 있다. 번역을 마친 후 책이 나왔을 때 별로 관심이 가지 않는 책이 있고, 번역할 때보다 더 정이 가는 책이 있는데, 후자의 경우에 독자들의 반응이 압도적으로 좋았다는 것이다. 사이먼 싱의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가 그랬고, 브라이언 그린의 『엘러건트 유니버스』와 미치오 카쿠의 『평행우주』도 그랬다. 사실 따지고 보면 별로 신기할 것도 없다. 독자들이나 나나 느끼는 건 비슷할 테니까. 그래서 『신의 입자』는 나에게 더욱 각별하다. 책이 나온 후에도 샅샅이 읽어가며 오탈자를 찾고 있는데, 이런 경우는 정말 처음이다. 레더먼의 재기 넘치는 글 솜씨에 반해도 단단히 반한 모양이다. 나의 번역이 완벽할 리 없지만, 부디 독자들도 나와 비슷한 느낌을 가져주기를 조심스럽게 기대해본다.

 

이 책의 초판은 1993년에 출간되었다. 힉스입자는 말할 것도 없고, 꼭대기쿼크(top quark) 조차 발견되기 전이다. 이런 답답한 시기에 힉스입자를 향한 열망을 고스란히 담아낸 책이 바로 이 책이다. 한국에서는 1996년에 번역본이 출간되었으나, 당시에는 저작권에 대한 개념이 정립되기 전이어서 원저자 및 원출판사와 계약을 맺지 않았으니 정식으로 출간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독자들이 이 책을 읽고 과학이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과학실험에 수조 원의 국가예산을 쏟아 붓는 것이 왜 가치 있는 일인지, 그리고 빌어먹을 입자가 어떤 연유로 신의 입자가 되었는지 이해한다면, 나로서는 더 없이 큰 보람을 느낄 것이다.

 

 



 

 

신의 입자 The God Particle리언 레더먼,딕 테레시 공저/박병철 역 | 휴머니스트
2012년 그 존재를 증명한 힉스보손은 어떻게 ‘신의 입자’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을까? 힉스입자를 ‘빌어먹을 입자(Goddamn Particle)’에서 ‘신의 입자(God Particle)’로 만든 전설적인 책, 1993년 출간되어 전 세계 과학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신의 입자(The God Particle)』가 드디어 정식 번역 출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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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철(번역가)

연세대학교와 동 대학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이론물리학을 전공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대진대학교 물리학과 초빙교수이며, 과학 전문 번역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엘러건트 유니버스』, 『우주의 구조』, 『리만 가설』, 『평행우주』 등 어려운 책들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