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주 긴 변명>의 한 장면
왜 나는 아내 나츠코보다 남편 사치오 편에 서는 마음이 되는 걸까. 왜 나는 사치오를 이해하고 싶은 것일까. 이유는 하나다. 그가 작가이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작가를 옹호하는 삶을 산 편집자인 나는 본능적으로 작가의 처지, 생의 곤란을 이해하려 드는 것이다. 직업 정체성이 참 무섭다. 나 홀로 극장에 앉아서는 언제나 ‘감동천하’(내 별명이다, 웬만해선 감동하니깐) 순진한 관객이지만, 현실의 자리, 내 책상에서 글로 남기는 영화는 삶의 무게 그대로다. 그러니까 그냥 관객으로 남을 걸 그랬어, 라고 후회하는 삶도 내 삶이니까 그 무게를 안고 앞으로 나아간다.
이야기는 이렇다. 사치오라는, 유명한 야구 선수와 동명이인으로 어린 시절부터 이름 때문에 놀림감이 되어온 남자가 츠무라라는 필명으로 꽤 성공적인 작가의 삶을 살고 있다. 자신을 여전히 사치오라고 부르는, 무명 시절 생계를 책임지고 세월을 견뎌준 대학 동창 아내 나츠코와 함께 산다. 미용실 원장으로서 자부심과 독립심이 강한 아내는 단짝 친구 유키와 둘이 떠난 스키 여행길에서 버스 추락사고로 절명한다. 사고 시각에 애인을 집안으로 들였던 사치오는 죄책감보다는 사회적인 시선과 아내 없는 생활의 불투명한 전망으로 전전긍긍. 아이 둘과 남겨진 유키의 남편, 트럭 운전사 요이치를 만나면서 새로운 인생으로 접어드는데......(말줄임표의 효용이란!)
영상에서는 배우의 표정으로 심리를 파악할 수 있지만(대사로 직접 듣는 건 뭔가 하수 느낌이란 것도 편견이겠으나) 소설에서는 언어를 통해 심리를 파악한다. 『아주 긴 변명』은 소설가이자 영화감독인 니시카와 미와의 작품. 그러니까 원작과 영화를 만든 사람이 같다. 그런데 매체가 다르니 영상과 소설의 결이 상당히 다르다. 사치오 역의 배우 모토키 마사히로 배우의 얼굴이 빚어낸 묘한 빛이 관객인 나를 사로잡았지만, 원작에서는 마침내 사치오의 마음을 어루만진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어디서부터가 창작이고 어디서부터 현실의 재연인지” 아내 나츠코가 작가 남편의 원고를 읽고 의아한 듯 중얼거렸지만 나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어디서부터가 영상화되었고 어디서부터 소설 고유의 부분으로 남겼는지.”
소설에서 미용실 원장 나츠코는 고백한다. “사람의 머리는 자르면 자른 만큼 짧아지고, 파마를 하면 머리칼은 구불구불해진다. 밤 10시까지 내 두 발로 서서 일한다. 내 몸이 닳고 닳아질 때까지. 이런 것이 노동이며 산다는 것이다. 내 일은 허업이 아니다.” 그녀는 남편의 소설 쓰는 일, 작가의 삶이 ‘허업’이라고 생각한다. “사치오는 거짓말쟁이다.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자각조차도 없다.”
아내는 남편과 실제 생활에서 느끼지 못하는 감동을, 그 허업의 결과물인 작품을 읽고 느낀다. 묘하다. ‘문단의 조니 뎁’이라 불리며 텔레비전 오락 프로그램까지 나오는 인기 작가 남편의 모습을 싫어하지 않으면서도 냉담하게 거리를 두고 있다. 작가는 허업종사자다, 라고 단정 짓는 아내에게 사치오의 창작의 괴로움은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왜 아내는 남편을 허업종사자로 규정했을까. 사회적인 명성에 비해 가까이 본 민낯 남편의 모습이 우스꽝스러웠을 수도. 작가의 신비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의 작품을 감동적으로 읽는 자신이 혼란스러웠을 수도. 대중의 환호 속에 살고 있는 그의 모습에 환멸을 느꼈을 수도 있겠다.
사치오는 일상에서 무언가 새롭게 발견하면 바로 펜을 꺼내 메모한다. 발견된 그 현실을 느끼고 품는 것이 아니라 소재로 소설화하려는 욕망이 앞섰다. 아내는 유품의 전화기에서 “당신을 더는 사랑하지 않아, 털끝만큼도”라고 미처 보내지 못한 메시지를 통해 관계의 허상을 폭로한다. 영화의 첫 장면, 여행 떠나기 직전의 거실, 정답게 보였던 그들의 사소한 대화가 사실은 독백과 같았음을, 그래서 아내 사후 사치오의 긴 변명이 오히려 생명력 있는 온기를 얻는 건 놀랄 일도 아니다.
이 온기는 사치오의 인생에 불쑥, 깊이 들어온 세 사람 덕분에 얻게 된 것이다. 아내와 함께 절명한 절친의 남편 요이치, 어린 딸 아카리, 중학교 입시를 앞둔 아들 신페이. 요이치가 전국을 도는 트럭운전사여서 임시로 두 아이를 돌보는 역할을 맡을 마음을 먹은 사치오가 비좁고 구질구질한 요이치네로 출퇴근하면서 삶의 생기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아카리의 이상한 질문도 어리광도 사치오에겐 신비로운 힘으로 작동한다. 함께 쌀 안치기와 카레 만들기, 빨래 개기와 애니메이션 보기, 자전거로 오르막길 오르기에 익숙해지면서 사치오는 생활 그 자체에서 호흡을 시작한다. 소설화하지 않은 그 생동감 넘치는 현실에서. 아이들이 뿜어내는 생기와 달착지근한 체취가 묻어나는 인생은 소설의 소재도 아니고 바로 타자 자체인 것이다. “인생은 타자다”라고 영화의 절정에 사치오는 정자체로 쓴다.
“타자가 없는 곳에는 인생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인생은 타자라고 죽은 당신이 내게 ‘그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드는군.”이라고 소설에서 읊조리는 사치오는 자신도 아닌 그 누구를 의식해서도 아닌 오로지 아내를 위해 울어버린 인간이 되었다.
죽음, 가난, 육아 등 삶의 신산한 풍경은 니시카와 미와의 영상에서 음습하지 않다. 맑은 물처럼 흐른다. 애틋하다. 마치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속 풍경이 그렇듯이. 앗, 그러고 보니 니시카와 미와는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제작한 영화로 첫 데뷔작을 만들었었네.
영화 <아주 긴 변명>의 한 장면
사족: 버스 추락 사고 시각, 츠무라 작가 집에서 섹스를 했던 여성 편집자, 말끝마다 애교 넘치게 “센세이”를 붙이던 편집자, 이 역을 배우 쿠로키 하루가 맡았다. 쿠로키 하루가 누구냐. 출판인들 사이에서는 너무나 유명한 일드 <중판출래> 주인공 편집자이기에 보는 나로선 놀라운 일! (역시 순진한 관객이 맞다. 배우한테 몰입) 아 뭐야, 저렇게 해맑고 이쁜 얼굴로 <중판출래>의 씩씩함은 찾아볼 수 없는, 작가와 그렇고 그런 연애를 하고 있다니, 쳇! 그래도 사고 후 냉정하게 작가 츠무라에게 절연하는 모습은 역시 쿠로키 하루.
* <정은숙의 나 홀로 극장> 연재를 시작하며 (격주 목요일)
어쩌면, 아니 확실히 어눌하게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로 글을 쓰게 될 것입니다. 너무 좋아하면 어리버리해지는 것 아닌가요, 우리 모두 그런 것 아닌가요.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정은숙(마음산책 대표)
<마음산책> 대표. 출판 편집자로 살 수밖에 없다고, 그런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일주일에 두세 번 영화관에서 마음을 세탁한다. 사소한 일에 감탄사 연발하여 ‘감동천하’란 별명을 얻었다. 몇 차례 예외를 빼고는 홀로 극장을 찾는다. 책 만들고 읽고 어루만지는 사람.
lyj314
2017.03.02
jijiopop
2017.0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