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것과 살아지는 것
하지만 5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는 전혀 다른 부분에 눈길이 갔다. 고인은 책 말미에 이름으로 색인을 남겼다. 이름의 대부분이 내가 아는 작가들이었다. 나는 잠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글ㆍ사진 조영주(소설가)
2017.02.15
작게
크게

03.JPG

 

정월 대보름, 달집태우기를 보러 친구들과 남산 한옥마을에 갔다. 소원을 적은 종이와 부적을 새끼줄에 매단 후 이제나저제나 학수고대하며 덜덜 떨었다. 기다리는 동안 등 뒤 마련된 무대에서는 사물패가 신명 나게 놀아 제켰으나 접시 돌리기도 사자춤도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중2병이 도진 관계로 모든 우울한 상념만이 머릿속에 가득해 왜 이리 시작을 안 하나 짜증만 났다.

 

한 시간여를 기다린 끝에 달집 태우기가 시작됐다. 영하의 날씨에 발을 동동 구른 보람이 있었다. 달집은 남산을 집어삼킬 요량으로 활활 타올랐다. 바람을 탄 불티가 어찌나 사방팔방 튀던지 말 그대로 불티나게 도망쳐 정신을 차려보니 나 혼자. 좁은 남산 한옥마을서 “넌 어디? 난 여기”, 전화를 들고 야단법석을 떨었다. 가까스로 친구들과 상봉에 성공했으나 시선은 달집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 풍경을 마지막으로 본 것이 5년 전이라는 사실을 문뜩 떠올린 탓이었다. 대체 뭔 일이 그리 많아 그간 단 한 번도 대보름을 즐기지 못했나 이것저것 따져보며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하자니 당연하다는 듯 최근 쌓아두고 읽은 책더미 중 몇 권이 머릿속을 스치고 달아났다. 민음사 설립자 박맹호 타계 후 재독한 『책 박맹호 자서전』이라던가, 너무 오래 기다린, 그러나 결코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공터에서』라던가.

 

 

07.JPG
출간되자마자 바로 산 『책 박맹호 자서전』

 

『책 박맹호 자서전』은 출간되자마자 바로 샀었다. 민음사 하면 이 나라 출판의 역사 그 자체나 마찬가지 아닌가. 안 살 수 없었다. 책의 내용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간 궁금했던 민음사의 종로사옥 시절 이야기나 비룡소의 발로, 고인이 생전 등단했다는 단편소설의 전문을 기웃거리자면 어쩌면 내 과거의 일부분이 책 속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설렜다. 하지만 5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는 전혀 다른 부분에 눈길이 갔다. 고인은 책 말미에 이름으로 색인을 남겼다. 이름의 대부분이 내가 아는 작가들이었다. 나는 잠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누군가 내 이름을 자신의 자서전 말미 색인으로 담는 상상. 당연히 소중하고 훌륭한 사람으로 기록되리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에 괜히 히죽히죽 웃었다.

 

7.jpg

최인아책방에서 발견한  김훈의 신작 『공터에서』. 반가운 마음에 한 장 찍었다.

 

『공터에서』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나의 현재와 과거가 쓰여 있었다. 작가 김훈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칼의 노래』 『화장』도 아닌 ‘광화문 그 사나이’다. 『칼의 노래』의 원래 제목이 ‘광화문 그 사나이’였다는 이야기를 언젠가 북스피어 블로그에서 읽고 한참 웃었다. 내가 그토록 감동받았던 소설에 그런 유머 포인트가 있었을 줄이야, 『칼의 노래』를 재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연히 예약판매가 뜨자마자 앞뒤양옆 재지 않고 바로 구매했다. 예약한 사람들 중에서도 선착순 한정된 인원만 친필 사인 양장본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덕후의 마음이 동하였다.

 

기다림 끝에 받은 책은 표지부터 마음에 쏙 들었다. 대관절 저 말은 무슨 연유로 허리가 끊겼나 안타까운 마음에 보지도 않은 책의 내용을 지레 짐작하고는 이 긴가민가한 기분이 옳은가 그른가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밤을 새서 페이지를 넘길 수밖에 없었으니, 막장에 치달은 끝에 발견한 것은 서른아홉 인생 대부분을 살았음에도 드문드문 알았던 우리 동네 언덕 저 너머 어딘가, 실제로 있었을지도 모를 죽음이란 이름의 삶이었다. 죽어서 한 권의 책이 되어버린 고인의 자서전을 함께 읽은 탓인가, 아니면 중2병이 심한 탓인가, 이번엔 나도 모르게 가까운 미래 누군가 내 똥오줌 닦아주는 인생을 상상하고는 살아서 뭐 하나, 자조적인 웃음을 짓고 말았다.

 

달집 태우기 행사를 끝내고 적당히 끼니를 때운 후 근처 찻집에 들어갔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서울랜드 폐장 이야기가 나왔다. “30년 계약으로 시작한 서울랜드가 없어진다. 그 전에 한 번쯤 가봐야 하지 않을까.” 그래 가야지 하면서도 허탈했다. 또 삶의 일부분이 사라진다. 이러다 언젠가 나라는 인간은 깨져버려 죽음이란 사금파리 조각들로 낱낱이 흩어져버리겠지. 운 좋게 책이 된 누군가의 색인에 실린다면 더부살이로 남을 수도 있겠으나 내가 없는 미래에 내가 있는 게 과연 지금 이 순간 어떤 의미가 있을까.

 

05.JPG

 

중2병이 깊어져 우주의 탄생까지 파고들 무렵, 깨달았다. 내 가방 속 책 한 권을. 지금 이 순간이 이 책을 새삼 펼 가장 적절한 때라고 우주가 계시를 내리는 것 같았다. 가방에서 그 책을 꺼내 친구들에게 보여줬다. 우리는 잠시 화가가 들려주는 점점이 찍어낸 추억의 한 귀퉁이에 골몰했다. 책은 지금 이 순간이 훗날 누군가의 의미가 될지도 모른다는 한없는 낙관을 품을 수 있도록 내 등을 떠밀다가도, 불안한 미래를 스스로 낙인 찍으려 들면 등짝을 때리며 정신을 차리라고 “떼끼 이 놈!” 어린 시절 동네 단골 점방 할머니처럼 혼냈다. 스크루지 영감도 아니건만 과거 현재 미래의 유령을 한번에 몰아 만나고는 화들짝 정신이 들어 중2병에서 한 발짝 멀어질 수 있었으니, 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진리를 깨닫게 해준 이 책의 제목은 『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이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책 박맹호 자서전 #공터에서 #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 #서울랜드
5의 댓글
User Avatar

봄봄봄

2017.02.24

편협한 제 마음때문에 어떤 작가의 책은 절대로 읽고 싶지 않지만 제가 이미 카트에 담아놓은 책도 소개가 되었네요. 고 박맹호님의 책에 대한 사랑이 애닮은 봄으로 가는 겨울 오후입니다.
답글 (1)
0
0
User Avatar

케이K

2017.02.23

잘 읽었습니다. 맨 마지막 책은 책표지 그림에 꽂혀 저도 카트에 담아둔 책입니다.
답글 (1)
0
0
User Avatar

라이언긱스

2017.02.19

김훈 작가님께서 선착순 친필 싸인까지 해주셨군요... 부럽습니다 ㅜㅜ
답글 (1)
0
0

더 보기

arrow down
Writer Avatar

조영주(소설가)

별명은 성덕(성공한 덕후). 소설가보다 만화가 딸내미로 산 세월이 더 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