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송한데 공시생인 거 같은데 매일 커피 사 들고 오는 건 사치 아닐까요? 같은 수험생끼리 상대적으로 박탈감이 느껴져서요...’ 라는 내용의 도서관 항의 쪽지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그동안 받은 교육이 있으니 예의와 배려의 옷을 입고 ‘죄송한데...’ 로 시작해서 문장부호 ‘...’와 함께 꼭 겸손한 것처럼 마무리되는 저것은 영화 <복수는 나의 것>의 송강호를 떠올린다. “그래...너 착한 거 나도 안다. 그러니까 내가 너 죽여도 용서해 줄 거지...?” 울먹이며 신하균의 두 아킬레스건을 잘라버리던 송강호는 진짜 형편이 억울하기라도 하지 도대체 저 커피에 대한 억울함은 어디서부터 왔을까.
또박또박 예의 바르게 참 예의 없다. 싶다가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사실 나는 저 기분을 조금 알 것도 같다.
지난 구정 연휴, 나는 구식 쌤소나이트 여행가방 안에 작년에 몇 군데에서 받은 영화상 트로피들을 넣었다. 가방을 끌고 부모님 댁으로 가는 전철 안에서 사람들 표정은 진짜 심각하고 우울했다. 아니, 내 심정이 그래서 그런가 남들도 그렇게 보였다.
신정을 지낸 이후 내 우울감은 더욱 심해졌다. 나쁜 일들은 좀 사정을 봐가면서 와주면 좋을 텐데 살다 보니 뭔 일이 터질 때는 비슷한 성질의 일들이 연이어 터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연초나 월초 아니면 생일과 같이 ‘시작’하는 시즌엔 조금 예민해지는 편이다. 말하자면 징크스를 찾는 버릇 때문이다.
지성인처럼 안 보일까 봐 숨기고 싶은데 사실 나는 5-6년 전부터 매번 신년운세를 봤다. 어디 은행이나 보험회사에서 해주는 무료 인터넷 운세 말고 직접 인터넷 결제하는 운세 그런 거 말이다. 그게 전부가 아니다. 신점도 몇 번 봤는데 신중하게 추천을 받아 몇 군데 찾아가기도 했고 독방에 틀어박혀 오랜 시간 시나리오를 쓰다가 하도 답답하니까 진짜 속에서 천불이 나면서 이러다 죽나 싶어 홧김에 전화 상담 운세도 받아봤다.
전화 상담 운세 역시 내가 평소 믿고 상담해온 모 감독의 어머니께서 몇 년째 믿고 보는 곳이라며 추천 받은 곳이다. 시간 예약을 해서 전화통화에 성공했다. 생년월일, 생시와 이름을 주고 계좌이체부터 해야 한다. 그러면 10분 뒤에 도사님이 전화를 준다. 나더러 오페라를 하지 말고 팝페라를 해야 한다면서 어쩌고 저쩌고 한참을 얘기 하는데 “우리 85년생 이경미 씨는...” 이러는 거다. “잠깐만요, 도사님! 저는 73년생인데?” 하니까 3초 침묵.
“... 아...내가 5분 뒤에 다시 전화를 하겠어요” 하더니 잠시 뒤 다시 전화가 왔다. “그러니까 우리 73년생 이경미씨는...” 좀 전과 똑같은 내용의 운세다. “아니, 잠깐만요. 85년생 이경미씨랑 저랑 왜 똑같아요?!?” 물으니 ”그러게~ 사람 팔자가 차암 신기하죠?” 라며 오묘하게 그러시는데 내가 그 때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았나 이후의 대화에 대한 기억이 없다.
이 길티플레저를 끊게 된 결정적인 사건은 없다. 다만, 없는 돈 갖다 바치면서 내 나름대로 지성인답게(?) 분석을 해온 결과 이것이 어떤 경우엔 틀리고 어떤 경우엔 맞기도 하는데 사실 틀린 경우가 더 많았고 평소 나같이 나쁜 상상을 많이 하고 태생적으로 부정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에겐 이런 일이 도움 되지 않는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결코 멈추지 못 하다가 남자친구가 생긴 이후 자연스레 흥미를 잃었다. 아마도 전국의 모든 사주카페와 점쟁이들, 전 세계 모든 점성술사 중 아무도 내게 남자친구가 생긴다는 예언은 못 했기 때문인 것 같다.
30대 후반, 굉장히 가슴 아프고 특별하게 쓸쓸한 사연을 겪은 이후 나는 자웅동체 아메바처럼 혼자 씩씩하게 살기로 모든 준비를 모두 마쳤다.
그 특별한 사연이라는 게 그냥 한 마디로 남자한테 차였다. 원래 이런 얘기는 절대 안 할 생각이었는데 왜냐하면 내 최근작의 한 외부 관계자가 사석에서 ‘영화를 보면 이경미 감독은 평생 남자한테 사랑 한번 받아보지 못한 여자가 분명하다’며 나를 평가했다고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남들도 다 눈치챈 걸 가지고 뭐 자기만 대단한 걸 발견한 것처럼 온 동네방네...무식하게... 생긴 것도 못 쌩겨가지고.
암튼 내가 올해 구정, 유독 우울했던 이유엔 최근작의 상업적인 대실패 이후 생긴 근거 없는 피해의식에다가 거론되던 차기작의 무산과 더불어 전 세계 예언자들도 예상치 못한 남자친구를 막상 부모님이 반기지 않은 문제도 있다.
구식 쌤소나이트 여행가방 안에 트로피들을 담으면서 생각했다. 그래, 내가 효심이 깊은 것도 아니고 착한 것도 아니고 그저 보람을 드리는 일은 이거 하나뿐이긴 하다만 그래도 내가 무슨 결혼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엄마한텐 아빠가 있고 동생한텐 제부가 있고 그래 나한텐 영화가 있어. 근데 걔는 내 손도 못 잡아 주고 백허그도 한 번 해주지 못 하는 주제에 심지어 나를 딱 반만 죽여놔서 내가 지금 죽지도 살지도 못하고 그래, 생각해보면 내가 이런 고충을 제대로 표현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 왜냐하면 자존심이 상했거든! 근데 다들 내가 표현을 안 하니까 나를 좀 우습게 보는 것 같은데 말야, 생각난 김에 야 너! 내가 영화 망했는데 웃고 다니는 게 재수 없다고 표정 관리 좀 해야 된다며 우리 제작자한테 내 뒷담화를 깠다며? 너 그게 무슨 상대적인 박탈감인지 모르겠는데 할 말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 마음속으로만 하루에도 몇 번씩 상대를 바꿔가며 이렇게 두서 없는 천불이 나던 중에 사람 많은 빵집에서 명절맞이 동생을 만났다.
나의 깊어진 울화병에 장황한 하소연을 듣던 동생의 표정이 문득 달라진다. 보니 한 아저씨가 빵을 고르다가 바닥에 떨어뜨렸는데 그것을 슬며시 집어서 진열대에 다시 놓는 것이다.
“아저씨!! 그렇게 땅에 떨어진 빵을 그냥 거기 두시면 다른 사람이 그 빵을 먹을 수도 있잖아요!! 아저씨이이!!” 나다, 내가 소리 질렀다. 그것도 모자라 이후 아저씨의 모든 처신을 매의 눈으로 감시했다. 내가 그 동네 경찰도 아니고 부모님은 지금도 내가 유명한 사회인인 줄 잘못 알고 계신데, 부모님 동네 빵집에서 굳이 그 빵을 막을 수 있는 고급진 다른 방법도 많이 있었을 텐데. 구정맞이 손님도 바글바글한 거기에서. 내가 언제부터 그렇게 정의로운 모범시민이었다고...
‘죄송한데요, 살면서 참 다들 내 맘 같지도 않고 서로 안 맞으니까 힘들지요. 그래도 우리 너무 팍팍해지지는 말아요... 나도 아저씨도 빵도 커피도’ 또박또박 쪽지를 써서 아저씨 지갑에 붙이는 거였는데...
이경미(영화감독)
1973년생. 영화 <비밀은 없다>, <미쓰 홍당무> 등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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