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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슬픈 음악이 있어야 할 자리

그 때 걔랑 절교를 했어야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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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갑자기 부자가 되겠다고 욕심을 부린 것도 아니고 그냥 우연한 기회로 40년 전 추억을 소환했을 뿐인데 왜 초파리들은 부자들한테는 안 가고, 안 그래도 사는 게 불편해 죽겠구먼. 나한테만 다 오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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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의 꿈을 독려하는 어느 캠프의 폐막식에 참석했다. 식순의 마지막은 아이들의 지난 시간을 담은 동영상이었다. 즐거운 한 때를 기억하고 의미를 되새기는 내용인데 배경 음악이 이상하게 너무나 구슬픈 것이었다. ...꼭 이런 순간에 우는 사람 나온다.

 

중학교 1학년 체육시간이었다. 운동장에서 친구와 떠들다가 불려 나갔다. 남은 수업시간 내내 아이들 앞에서 무릎 꿇고 두 팔을 번쩍 올렸다  나는 솔직히 이 상황이 좀 웃겼지만 애써 참느라 낄낄대는데 같이 불려 나온 친구가 옆에서 너무 울기 시작하는 것이었다...‘대체 왜 울지?? 뭐 때문에??!’ 싶은데 반 애들이 걔한테 몰려가서 위로를 해주는 것이었다. ‘나는? 얘들아, 나도 지금 벌 받고 있어 얘들아?!’ 하는데 심지어 체육 선생님까지 걔를 안아주고 위로해주더니 걔한테만 박카스를 줬다! 나는 혼자서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이상한 얼굴로 그들을 구경했다. 그 때 걔랑 절교를 했어야 했는데...

 

중학교 때부터 복잡했던 온갖 남자관계를 다 들어주고 뭔 비밀이 그렇게 많고 이건 쟤한테 비밀이고 저건 얘한테 비밀이고 저 남자가 날 좋아하고 이 남자도 날 좋다고 그러더니 결국 둘이 결투를 벌였는데 나는 사실 다른 남자가 있고 뭐 이따위를 고민이라고 평생을 나한테 상담하더니 나중에는 우리 사장님도 날 좋아하고 옆집 사장님도 날 좋아해서 이러고 자빠지다가 드디어 결혼하기에 이젠 좀 나아지나 싶었다만, 결혼하고 애 낳고 나한테 소개팅을 시켜 주겠다며 데리고 온 남자가 사실은 지 애인이라고 고백하는데 그 때 나는 진심으로 반성했다. 20년 전 그 날, 체육시간에 혼자 울고 자빠질 때 그 때 절교를 했어야 했는데...

 

아무튼 불 꺼진 엄숙한 자리에 앉아 동영상을 통해 소개되는 아이들의 지난 행복한 모습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지금 쟤네들은 다 살아있고 심지어 여기에 다 같이 앉아있는데 왜 배경음악이 이렇게 구슬픈 거지, 대체 뭘 공감하고 싶은 건가 도저히 이해가 안 되면서 사실 이런 음악에 진짜 어울릴만한 요즘 내 문제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작년 여름, 텍사스 오스틴에 잠시 머물렀다. 늦은 아침을 먹고 자유시간이 생겨 동네 소품가게들을 구경했다. 어릴 적, 우리 큰 이모 집은 되게 부자였다. 우리 집에서 살다가 가끔씩 그 집에 가면 연탄 냄새가 없었다. 부엌에 아궁이도 없는데 온 집안이 따뜻하다. 동생이랑 둘이 누워도 남을만한 큰 소파, 금 그릇이 전시된 장식장, 신발장 위엔 엄청 무거운 코끼리 상, 우아하고 커다란 유리 볼, 심지어 거실 커튼의 패턴과 옷장 안에 쌓인 외제 초콜릿들까지 모든 게 다 근사했다.

 

잠시 내 집인 것처럼 그 집 정원에서 혼자 그네를 마음껏 타면서 나는 생각했었다. “여기서는 301호 지영이, 502호 하나랑 그네 가지고 안 싸워도 된다!!”

 

아, 부자는 이렇게 편한 거구나... 싶었는데,

 

당시 그 집 장식장에 있던 커다란 유리 볼, 바로 그것이! 지금 이 순간! 텍사스 오스틴 소품가게에 있는 것이었다. 3만 원만 주면 70년대 초반, 되게 부잣집에나 있던 저걸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그렇다! 여기는 어쩌면 기회의 땅일지도 모른다! 확실히 3kg는 되는 유리 볼을 안고 나는 오스틴의 모든 소품가게를 뒤지기 시작했다. 코끼리 상도 있을 거야. 새까만 돌이면 좋겠는데 그래서 코끼리 상 옆에 어우, 소파 같은 건 한국까지 가지고 가기 힘들라나...? 아니면 작은 탁자라도… 18세기 유럽풍의…

 

한 여름, 그늘 없는 텍사스 오스틴의 땡볕을 그렇게 한참 헤매다가 걸음을 멈췄다.
다시 배가 고파졌다. 엄청난 무게의 유리 볼을 안고 나는 갑자기 외로워졌다.

 

...이제 그만 하자... 이 유리 볼 하나만으로도 나는 너무나 불편하다.

 

그리하여, 나는 유리 볼만 가지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래, 이런 유리 볼에는 사과나 바나나 같은 걸 가득 담아 두는 거야. 왜 외국 사람들 보면 가정집에 그런 거 해놓잖아. 귤 같은 거 막 잔뜩 담아놓고. 외국 영화 같은 데 보면 어떤 집은 계란도 그런 식으로 쌓아놓던데 나는 그냥 과일만 수북이 담았지만 아, 우리 집에 누가 와줬으면 좋겠다. 이 예쁜 걸 혼자 보고 살아야 하다니. 우리 집 식탁에 유리 볼이 놓인 그 자리만 프레임을 따보면 딱 40년 전 우리 큰 이모 집인데!

 

그리고 유리 볼에 담긴 사과랑 바나나와 함께 시간은 흘렀다.

 

자, 캠프만 끝났을 뿐이지 이제 꿈을 시작하려는 아이들의 즐거운 추억 위로 흐르는 저 구슬픈 음악은 그 자리가 아니라 나한테 깔려야만 한다.


나는 지금 초파리들 때문에 신경쇠약 직전이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15마리 넘게 죽였다. 이것들은 아무리 죽이고 죽이고 계속 죽여도 끝이 안 난다. 그렇게 매일 쌓여가는 죽은 초파리들. 이런 식으로 저 유리 볼 (지금은 과일 껍질 쪼가리도 없는) 안에 초파리 무덤을 만들어 놓으면 지들끼리 소문을 내서 혹시나 사라져주지는 않을까?  망상도 해보았다.

 

이 고통이 잘 이해 안 되시는 분은 한여름 산을 오르시던 기억을 떠올리시면 된다.
굉장히 작고 새까맣고 미친 그것들이 쉬지 않고 귓가를 맴돌고 눈앞을 가리고 그러다가 내 눈 속에 지 혼자 들어와서 막 죽고 그런 것들과 내가 지금 같이 살고 있다.

 

내가 갑자기 부자가 되겠다고 욕심을 부린 것도 아니고 그냥 우연한 기회로 40년 전 추억을 소환했을 뿐인데 왜 초파리들은 부자들한테는 안 가고, 안 그래도 사는 게 불편해 죽겠구먼. 나한테만 다 오는 걸까.

 

제발 저 구슬픈 음악은 나한테 깔아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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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경미(영화감독)

1973년생. 영화 <비밀은 없다>, <미쓰 홍당무> 등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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