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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모임에서 만난 사람에게서 좋은 향기가 났다. 평범한 30대 남성이었는데 그 사람 주위를 파우더리한 플로럴 향이 은은하게 감싸고 있었다.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잔향이 코끝에서 잊히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을 통해 연락처를 수소문했고, 망설임 끝에 카톡을 남겼다. "안녕하세요. 저 며칠 전에 모임에서 인사드린 000인데요. 당황스러우시겠지만... 무슨 향수 쓰세요?"
카톡을 보내놓고, 민망함에 양 볼이 빨개졌다. 염치 불구하고 이렇게나 대담무쌍한 카톡을 보낸 건, 그 향을 찾아 헤매느니 한번 쪽팔린 게 낫다는 생각에서였다. 이상한 물음을 던져놓고, 1시간 동안 조용한 흥분 속에서 답장을 기다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해지는 창피함은 스스로의 몫이었다. 1시간이 뒤 "바빠서 확인이 늦었습니다. 제가 쓰는 향수는 00입니다. 향이 좋으셨나 봐요."라는 답문을 받았다. 세 차례에 걸쳐 감사 인사를 전하고, 다음 날 바로 매장을 찾아 그 향수를 구입했다. 후각을 잃고 살았던 지난날을 반성하면서 포장 서비스를 받아 가며 스스로에게 향수를 선물한 그 날.
향수를 매개로 독특한 관계가 된(?) 그 사람과는 한번 더 만날 기회가 닿았다. 1미터 앞 그 사람의 모습이 보이자 익숙한 향이 내 코를 향해 조금씩 날아들었다. 그 사람의 그저 그런 외모와 수수한 옷차림마저 조금씩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고 싶고, 말 한마디 더 붙여보고 싶은 향수엔 평범한 사람마저 특별하게 변화시키는 힘이 있는 것 같다.
향에 대한 첫 기억은 6~7살 때, 파스텔(크레파스) 향이 좋아서 불 꺼진 방에서도 파스텔을 코에 갖다 대고 잠이 들었다. 학창 시절 교복에서 은은하게 풍기던 섬유 유연제 향, 교복 블라우스를 톡톡 털고 그 위를 다리미가 지나가면 공기를 감싸던 라벤더 향을 깊숙이 들이마시는 것이 좋았다. 그 뒤로 하나의 향에 이렇게 매료된 건 오랜만의 일이다. 향수 매장에 들어가서 우주의 기운을 모아 유심히 향수 노트를 읽은 것도 거의 처음 있는 일이었다. 00 향수는 해변가에 있던 리조트 이름입니다. 베이스 노트는 화이트 머스크, 탑 노트는 00으로 바닷바람에 실려온 파우더리한 향이 특징입니다. 지속시간은…. 대략 이런 설명이 적혀 있었다.
향수를 들고 시향지에 가볍게 분사한 뒤 가볍게 두어 번 흔들었다. “필요한 것은 향수 한 방울이란 사실을 사랑합니다. 어떤 향기 한 모금으로 어머니가 바로 내 옆에 있을 수 있고 헤어진 연인의 품속에 안길 수도 있고 언젠가 방문했던 곳에 되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마음을 가라앉혀주고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가고 싶어지게 하고 기억을 간직하게 하는 마법이 바로 향수의 모든 것 같아요.” 그 순간 향수 전문가 맥캘란 로자 도브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집으로 돌아와 ‘향’에 대한 정보를 모았다. 향수 지속력 높이는 방법, 향수 뿌리는 방법 등을 살펴보다가 사람의 오감 중 후각은 미각과 더불어 가장 정직한 감각으로 알려져 있다는 제목의 기사가 눈길을 끌었다. 향수가 옷이나 장신구, 화장보다 훨씬 많은 것을 표현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충분한 시간을 갖고 향수를 고르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파리 겔랑의 향수 전문가 맥캘란 로자 도브는 사람들은 상대방의 옷이나 모자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20년이 지나도 향은 기억한다고 전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가브리엘 샤넬의 명언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도 타인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는 최고의 액세서리는 향수다.”와 맞닿는 메시지다.
그러고 보니, 내가 좋아하는 소설 속에서도 유독 어떤 사람이나 순간에 대해 향으로 표현한 구절이 많다. “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향기가 난다. 아니, 그렇지 않다. 언제나라고는 볼 수 없다."라는 『향수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의 구절, “음, 곤은 말이지, 곤의 등뼈는 똑바르고, 콜라 냄새가 나.”라는 『반짝반짝 빛나는』의 구절, “데이지는 나이가 어렸고, 그녀의 부자연스러운 세계는 난초 향기와 쾌활하고 명량한 속물근성과 오케스트라의 냄새를 풍겼으며” , 『위대한 개츠비』의 구절, “목련의 향기가 그윽하게 풍겨 오는 옅은 어둠 속에서, 내 마음은 까닭없이 부풀어 오르고”라는 『상실의 시대』 구절 등. 언니네 이발관의 “오월의 향기인줄만 알았는데 넌 시월의 그리움이었어.”라는 유명한 노랫말도 있지 않은가. 거장들은 “사람은 향기로 기억된다”라는 향기와 기억의 상관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후로 나는 특별한 자리에 갈 일이 있을 때마다 잊지 않고 향수를 뿌린다. 상대방이 나를 더 오랫동안 기억하길 바란다면, 이름이 적힌 명함을 내미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향기를 건네줄 것. 꽃이 더 탐스러운 건 이름이 아니라 향기로 기억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박지애
감상의 폭에 따라 삶의 질이 좌우된다고 믿는다.
감동한다는 건 곧, 내가 잘 살고 있다는 증거다.
아이스타일24 웹진 <스냅> 기자.
K
2017.01.02
lyj314
2017.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