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용의 소설 『위장자』는 화제의 중국드라마 《위장자: 감춰진 신분》을 소설로 구성한 작품이다. 1930년대 중국, 일제에 대항하여 국민당과 공산당의 저항이 거세던 실제 시대 상황을 배경으로, 항일 투쟁에 몸담았던 명씨그룹의 삼남매 명경, 명루, 명대와 비서 아성이 서로 속고 속여야만 했던 시대적 아픔을 그리고 있다.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상대의 정보를 빼내기 위해 '위장'한 모습으로 치열하게 고민하며 싸워나가는 비밀첩보요원들의 숨막히는 암투와 회유, 교란 작전들을 심도 있게 다루면서 동시에 우리 역시 겪었던 가슴 아픈 역사를 끄집어낸다.
『위장자』를 번역한 양성희 번역가는 이화여자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베이징사범대학에서 수학했다.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600쪽 가량의 『위장자』 1, 2권을 함께 번역하셨습니다. 앞부분에 실린 역사적 배경 설명 및 역자주 역시 독자들의 이해를 한층 도울 수 있었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쉽지 않은 작업이었을 텐데 특히 신경 쓰신 점은 무엇인가요?
우리가 읽는 한국 작가의 소설에는 역자주가 없습니다. 작가와 독자가 같은 문화와 역사를 공유하니까요. 번역은 문화와 역사가 전혀 다른 두 세계의 작가와 독자를 연결하는 일이니 역자주가 없을 수 없습니다. 중국 독자는 『위장자』에 등장하는 역사와 문화 배경을 100% 이해하지만, 한국 독자의 이해 정도는 훨씬 낮습니다. 번역가의 이해 정도는 중국 독자와 한국 독자의 중간쯤일 겁니다. 예를 들어 한국 독자의 이해 정도가 20%고 번역가의 이해 정도가 50%라면, 번역 과정에서 채워져야 할 부분은 80%입니다. 30%는 번역가가 이미 알고 있는 지식으로 채우고, 나머지 부족한 50%는 자료를 찾아 공부하거나 저자에게 문의해서 채워야 하죠. 하지만 글을 쓰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자꾸 내 상식과 이해 정도가 기준이 되어 30%를 간과하게 될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일부 교수님들의 번역서가 일반 독자들에게 조금 어렵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교수님들은 이해 정도가 워낙 높으니까요.
역사적 배경 설명에서는 ‘객관성 유지’에 유의했습니다. 모든 글에는 글쓴이의 주관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데, 번역도 예외가 아닙니다. 번역가의 이해 정도와 방향, 표현 방법에 따라 똑같은 원문이라도 전혀 다른 결과물이 나오지요. 하물며 역사는 똑같은 사건이라도 보는 사람에 따라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표현 하나 하나가 매우 조심스러웠어요. 최대한 객관적인 사실만을 전달하려고 했지만 쓰다 보면 나도 모르게 주관적인 가치 판단이 개입되더군요.
예를 들어, 『위장자』를 처음 접했을 때 ‘명씨 집안은 분명히 상위 0.1%의 부르주아인데, 왜 공산당을 지지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어요. 중국 근대사를 잘 모르는 우리 입장에서는 ‘부르주아=자유민주주의, 프롤레타리아=공산주의’인데 명씨 집안은 부르주아 중에 부르주아인데도 공산당이잖아요. 그래서 이것저것 자료로 많이 찾아보고 주변에 역사 교수님에게도 물어보고 나서야 대략 당시의 분위기를 이해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객관적이고 명쾌하게 정리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역사는 대부분 승자의 입장을 대변하고 주인공들이 공산당을 선택했기 때문에, 공산당을 옹호하고 국민당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었죠. 결국 이 부분은 너무 주관적이라 삭제했지만,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한 사람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10년이 넘게 중국어 번역가로 활동하고 계신데, 처음 번역을 시작하실 때와 지금의 국내 중화권 출판 시장이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이 있다면요?
중국은 전통적으로 역사와 철학 콘텐츠가 매우 강합니다. 공자, 맹자, 삼국지는 이미 다양한 형태로 수없이 많이 소개됐고, 지금도 소개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소개될 것입니다. 이것 말고 다른 종류는 생각나지도 않을 만큼 편중이 심해서 중국 책하면 왠지 고리타분하다는 생각이 들죠. 실제로 제가 초창기에 작업했던 책들이 거의 역사와 철학 분야의 책이었어요. 그런데 최근 중화권 번역서는 분야가 매우 다양해졌습니다. 아시다시피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큰 시장이고 도서 시장도 예외가 아닙니다. 시장이 크니 책 종류도 많고, 인구가 많으니 작가군도 매우 다양합니다. 아직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여러 출판사와 번역가들이 다양한 중국 책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중국어 번역 온라인 커뮤니티 ‘저울’에서 동료 번역가들과 함께 중화권 도서들을 국내에 기획, 소개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국내에 소개할 책들을 고르는 특별한 기준이 있으시다면 어떤 것이 있나요?
‘저울’은 번역가 모임이 아니라 번역과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현업 번역가와 번역가 지망생을 비롯해 직업으로서의 번역이 아니라 단순히 공부를 목적으로 하는 사람까지 다양한 사람이 모여 있거든요. 처지와 목적은 조금씩 다르지만 모두 중국어 번역과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지요. 기획 활동은 동료 번역가 몇 분과 소규모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중국 책을 고르다 보면 일단 베스트셀러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지만 개인적으로 ‘베스트셀러=좋은책’ 공식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그냥 참고만 합니다. 그 외의 책을 고르는 기준은 지극히 개인의 취향이죠. 일단 내가 흥미를 느끼는 책을 고르게 되죠. 하지만 국내 시장과 국내 독자의 니즈를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중국에서 베스트셀러였으니까, 내가 재미있게 읽었으니까 이 책은 번역하면 좋겠다.’라는 생각은 위험한 것 같아요. 결국 독자에게 사랑 받지 못하면 중화권 번역서가 설 자리가 줄어들 테니까요.
처음에는 지극히 주관적인 이유로 책을 고르지만, 도서 기획으로 이어지려면 냉정하고 객관적인 이유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혼자만의 착각에 빠지지 않고 다양한 의견을 나눌 수 있도록 동료 번역가들과 모임을 꾸렸습니다. 꾸준히 중국과 한국 출판시장을 공부하면서 어떤 책이 국내 독자에게 사랑 받을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어요.
아직 국내 독자들에게는 채 소개되지 못한 중화권 도서들이 많습니다.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중화권 도서들의 매력이 있다면 어떤 것을 꼽을 수 있을까요?
중화권 도서가 워낙 다양하고 많다 보니 모든 책이 다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고, 제가 읽었던 책에 한해서 얘기해야겠죠. 제 생각에 중화권 도서는 전반적으로 철학적인 느낌이 강해요. 아마도 공자의 후예이기 때문이겠지요? 역사와 철학 분야뿐 아니라 건축, 의학, 경제, 디자인, 여행 등 실용서에서도 인문학적인 요소가 강한 편입니다. 몇 년 전 번역했던 『도시를 읽다』와 『도시를 생각하다』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두 책 모두 건축가가 쓴 도시 건축 이야기인데, 왠지 철학자가 쓴 책 같았어요. 현학적으로 일부러 어렵게 표현했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중심적인 사고방식이 따뜻하게 느껴졌어요. 같은 동양 문화권이라 그런지 확실히 뭔가 통하는 느낌이었죠.
중국이 인구가 워낙 많아 국민 평균 소득은 낮지만, ‘중국에는 우리나라 인구수만큼 부자들이 많다.’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지요. 중국은 어느 분야든 평균은 낮은 편이지만 상위 클래스 수준은 매우 뛰어납니다. 출판 시장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좋은 책이 참 많은데 그렇지 못한 책도 많다 보니 옥석을 가려내기가 쉽지 않아요. 우리나라에 소개된 책 중에도 제대로 가려내지 못한 것들이 꽤 있는데, 그렇다 보니 그 매력이 아직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아직까지도 ‘중국 책’하면 공자, 맹자, 삼국지만 떠올리는 사람이 많지만 정말 재미있고 감동적이고 특이한 책들이 많아요. 며칠 전 당당왕(중국 최대 온라인 서점)에서 『심장 외전』이란 책을 발견했는데, 현직 외과 의사가 ‘심장 수술 발전사’를 소설 형식으로 재미있게 쓴 책이랍니다. 심장 수술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닥터 블레이락의 실화를 다룬 영화 <썸띵 더 로드 메이드Something The Lord Made>의 내용도 『심장 외전』에 등장하죠. 이런 책을 혼자만 알고 있기 아쉬워 같이 기획하는 동료 번역가들과 재미있고 다양한 중국 책을 소개하는 미디어(네이버 포스트)를 발행하고 있어요.
이번 『위장자』 같은 소설뿐만 아니라 경제경영, 에세이, 실용 등 다양한 분야의 작품들을 작업하셨는데 독자로서는 어떤 장르를 선호하시나요? 또 현재 읽고 있는 책은 무엇인가요?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인물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나렌드라 자다브의 『신도 버린 사람들』과 요네하라 마리의 『프라하의 소녀시대』는 소설보다 더 재미있을 뿐 아니라, 좀처럼 접하기 힘든 인도 근현대사와 동유럽 현대사를 알 수 있어 더 좋았습니다. 중화권에도 이런 책이 많습니다. 최근에는 중국의 대표 낭만시인 쉬즈모의 일대기를 다룬 책을 발견해서 관심 있게 보고 있지요. 쉬즈모는 아마 모르는 분들이 더 많으실 텐데 중국 최고의 낭만 시인, 중국 최고의 로맨티스트, 중국 최초의 이혼남, 원조 나쁜 남자 등으로 불립니다. 중국 근현대 작가 중에는 쉬즈모처럼 한 편의 영화 같은 삶을 살다간 인물이 많아요. 영화 <색, 계>의 원작 소설의 작가로 유명해진 장아이링도 작품보다 그녀의 일대기가 더 파란만장합니다.
번역가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선망하는 직업입니다. 최근 중화 콘텐츠들이 국내에 많이 유입되면서 중화권 도서들에 대한 관심도가 더욱 높아지고 있는데, 처음 번역을 시작하게 되신 계기는 무엇인가요?
중국어를 전공했고, 중국어와 중국 문화를 알아가는 것이 재미있었고, 책읽기를 좋아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번역을 ‘직업’으로 생각하게 된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한 줄 한 줄 번역하는 것이 재미있었을 뿐 10년이 넘어갈 줄은 몰랐죠.
중화권 도서 번역을 꿈꾸는 번역가 지망생들에게 조언이나 팁을 주신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그동안 온라인 카페와 스터디, 오프라인 강의 등을 통해 번역 지망생들을 만날 기회가 많았습니다. 그 중에는 굉장히 절실한 마음인 사람도 있고, 막연히 그냥 번역이나 한 번 해볼까 하고 가볍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런데 지망생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의외로 원서를 완독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번역 지망생들은 대부분 책을 좋아하기 마련인데 조금 놀랐습니다. 중국어 번역을 꿈꾸고 있으니 당연히 중국어 실력은 수준급이지만, 대부분 도서 번역을 문장 해석 수준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한두 문장, 혹은 한두 페이지 해석하는 일과 책 한 권을 통째로 번역하는 일은 분명히 다릅니다. 한 두 문장을 해석할 때는 문법대로만 하면 되지만, 긴 글을 번역할 때는 논리와 문맥을 파악하는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짧은 글만 읽어서는 이런 실력을 기를 수 없습니다. 도서 번역을 꿈꾸신다면 일단 원서 완독에 도전하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번역 혹은 번역 공부에 조금이라도 발을 담가 본 분들은 아시겠지만, 번역을 하면서 정말 힘든 부분은 외국어가 아니라 우리말입니다. 번역은 1:1 단어 매칭이 아닙니다. 실제로 1:1로 매칭시킬 수 없는 단어가 훨씬 많습니다. 그래서 번역은 제2의 창작이라는 말도 있지요. 어떻든 번역은 글쓰기이고 글쓰기를 잘 하려면 결국은 책을 많이 읽고 직접 써봐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권하는 방법은 국내 도서 리뷰를 써보는 것입니다. 최소한 한 달에 한 권 이상 꾸준히 책을 읽고 글도 써보시는 게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한 가지 더 덧붙이고 싶은 것은, 언젠가 지망생 분들이 번역가가 된다면 출판시장에서는 소비자(독자)가 아닌 공급자가 된다는 뜻이겠지요. 그 날을 위해 출판시장이 더 발전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여유가 되신다면 한 달에 최소한 책 한 권, 가능한 새 책으로 직접 구매해 읽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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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장자 1장용 저/양성희 역 | 조율
1930년대 중국, 일제에 대항하여 국민당과 공산당의 저항이 거세던 실제 시대 상황을 배경으로, 항일 투쟁에 몸담았던 명씨그룹의 삼남매 명경, 명루, 명대와 비서 아성이 서로 속고 속여야만 했던 시대적 아픔을 담았다.
출판사 제공
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채널예스>에만 보내주시는 자료를 토대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