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는 환자의 병을 고치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병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제일 많고, 또 아는 만큼 최선의 치료법도 알지만, 최악의 결과가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정신분석적으로 의사라는 직업을 선택하는 심리에 대한 연구를 보면 1) 부모가 의사인 경우나 어릴 때 주치의를 이상화 2) 어릴 때 크게 아팠던 사람 3) 심리적 전능감을 실현하려는 욕구 등을 드는 사례들을 본 적 있다. 나 또한 많은 사람으로부터
“왜 의대를 지망했나요? 정신과 의사가 언제부터 되고 싶었나요?”
란 질문을 수없이 들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고3 학력고사 성적이 나오기 전까지 단 한 번도 의사가 될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 없고, 정신과에 대한 관심은 본과 3학년이 끝날 때쯤에서야 본격적으로 갖기 시작했다. 내 주변의 의사 중에 부모가 의사인 경우, 어릴 때의 경험, 봉사에 대한 열망 등을 얘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더 많은 사람이 ‘우연히’, ‘하다 보니’ 의사가 되었다고 말한다. 어떤 계기로 의사가 되었건 간에 의대에서 공부를 하고, 의사로 환자를 보면서 생과 사의 갈림길을 일상으로 보는 것이 일이 되어버리고 나면, 남과 다른 병과 죽음에 대한 가치관을 갖게 되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런데, 아는 만큼 무서운 것이 병과 죽음이다. 전 세계적으로 의과대학 2학년이 되면 생기는 신종 질환이 있다. 1학년에서는 해부학, 생리학을 배우고, 2학년부터 본격적으로 각종 질환에 대한 공부를 한다. 강의실에서 수 백 가지의 병의 원인, 치료, 예후에 대한 내용을 단기간에 머릿속에 욱여넣어야 하는데, 이때 학생들의 이해를 돕기위해 교수들은 생생한 사진이나 동영상, 사례를 구성한 이야기를 제공하는 것을 즐긴다. 일 년 내내 이런 얘기를 듣다보면 가슴이 답답하면 심장이나 폐의 질환, 배가 꾸루룩 하면 위장에 심각한 질환이 걸린 게 아닌가라는 걱정을 하는 비율이 급격히 늘어난다. 게다가 일반적 기능성 위장장애, 변비, 맹장과 같은 건강상식 수준이 아닌 치명적 질환을 배우고 나며 다 자기 이야기같이 들린다. 그렇지 않아도 학업 스트레스로 신경이 곤두선 학생들은 병원을 찾아가 증상을 호소하기 일쑤다. 그것도 자가진단을 한 상태로. 이를 ‘의과대학생병(medical-studentitis)’ 내지는 ‘2학년병(sophomoritis)'라 부르기도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의사가 된 다음에도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한 편으로는 자신이 병을 고쳐주는 의사로서 “내가 살려드리겠습니다”라며 전능감을 현실화하는 경험을 매일 하고 있지만 반면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죽음과 병에 대한 두려움을 항상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사가 만일 중병에 걸린다면? 그것도 아주 젊은 나이에? 그런 사람의 마음은 어떨까?
최근 발간되어 화제가 된 책 『숨결이 바람 될 때』는 바로 이런 상황을 다루고 있다. 저자 폴 칼라니티는 예일 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한 후, 스탠퍼드 대학병원에서 신경외과 레지던트를 하던 중 암에 걸렸다. 그리고 그 투병과정을 글로 남겼고, 씩씩하게 마지막 남은 수련과정을 해내고 말았다.
그가 이렇게 책을 쓸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독특한 이력 덕분인데, 처음 스탠퍼드 대학에서는 영문학과 생물학을 복수 전공했고, 이후 영국 캠브리지 대학으로 건너가 과학과 의학 역사 및 철학 과정을 공부하였다. 그는 의사가 된 다음 어느 정도 경험을 쌓고 나면 나머지 인생은 작가로 살고 싶었다고 희망했었다.
하지만 암은 그의 삶의 로드맵을 너무나 압축적으로 살아버리게 만들었다. 의과대학 동기로 내과를 전공하는 아내와 함께 갖은 고생을 하다가, 연구 능력도 인정받아서 어쩌면 모교의 대학교수가 될 수도 있는 기회를 얻을 가능성도 있을 정도였다. 한마디로 ‘고생 끝, 행복 시작!’을 외칠 바로 앞에서, 목구멍 근처까지 올라온 그 말을 내뱉기 전에 갑자기 체중이 빠지고, 허리가 끊어지게 아프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그저 심한 과로로 인한 허리통증으로 생각했다. 혼자 여러 가지 진단을 해보았지만 차마 큰 병으로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연령을 감안할 때 가능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 개월이 지나도 좋아지지 않고, 어느 날 갑자기 끊어질 듯 아픈 통증으로 쓰러진 이후에, 바로 깨닫는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환자들이 경험하던 암성 통증이라는 것을.
CT와 X레이를 찍어본 결과 암이 이미 커져 있고, 전이도 되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큰 낙담을 하였지만 동시에 모든 다른 이들이 하듯이 최고의 병원을 찾고, 자신의 진단이 맞는지 재확인을 하고, 신변을 정리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의 절망과 부정, 우울감, 향후 인생계획의 과격한 방향전환을 저자는 생생하게 전달한다. 관찰자가 아닌 당사자가 직접 써내려갔기에 더욱더 공감할 수밖에 없는 내용이었다.
처음의 표적항암치료로 극적인 증상개선이 있었고, 칼라니티는 처음 진단받았을 때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레지던트의 나머지 과정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과정도 잠시였고 재발한 암은 더 빨리 그의 나머지 몸을 잡아먹어 버렸다. 이 책도 제대로 마치지 못한 상태에 그는 숨을 거두었고, 뒤의 마무리는 아내가 에필로그의 형식으로 끝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환자 역할을 온전히 받아들여서 ‘몇 달 남았나요’만 세어가면서 죽어가는 대신 매일매일의 하루를 감사히 여기며 살아가는 것을 선택한 고뇌와 결단은 인간으로서 언제가 될지 모를 죽음을 받아들여 가는 불확실한 삶의 여정에 선 우리 모두에게 삶과 죽음, 그리고 살아있음의 의미에 대한 울림을 주기에 충분하다.
이 책은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이때 감성적 울림으로도 충분하지만 조금만 욕심을 내서 거시적으로 전문가로서 의사들이 환자가 되는 경우 어떤 심리 반응을 보이는지 한 번 알아보는 것도 좋겠다. 컬럼비아 대학 정신과의 로버트 클리츠만 교수가 쓴 『환자가 된 의사들(When Doctors Become Patients)』까지 내쳐 읽어보기를 권한다.
이 책은 저자가 어느 날 갑자기 환자가 되어버린 의사들 70여 명을 심층 인터뷰하여 그 특징들을 분류하고 분석한 책이다. 병원이란 공간 안에서는 흰 가운을 입고 무소불위의 전능한 존재였던 의사가 어느 날 환자복을 입고 완전히 뒤바뀐 처지가 되어버린다. 불사신이라고까지 여기고, 실제로도 체력적으로 정신적으로 매우 튼튼한 존재들인 의사는 진단을 부정하기 일쑤이고, 자기예후를 자가판정하고 심한 우울감과 자살사고를 갖기도 하고 동시에 이를 어떻게든 극복하기 위한 초인적 의지력을 보이는 사람도 있다. 성격과 취향에 따라 전문가를 찾는 방식도 달라서,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의지하는 사람도 있고, 적당히 자기가 잘 소통하고 컨트롤할 수 있는 사람을 선택하기도 한다.
의사일 때 병원에서의 시간은 일하는 시간이었고 하루가 후딱 지나간다. 그에 반해 병원에서 지내는 시간, 병원에서 나와서 지내는 시간 경험은 환자로서는 너무나 다르다고 한결같이 호소한다. 검사를 하고 기다리는 시간, 치료의 반응을 기다리는 시간이 의사일 때와 환자일 때에는 천양지차로 다를 수밖에 없는 시간 경험을 하게 된다.
무엇보다 확률과 통계로 무장하여 객관적 전문지식을 갖고 환자를 대하던 의사가 어느 날 환자가 된 다음에는 “90%의 확률로 효과가 있습니다”라는 말을 내가 할 때와 달리 ‘그러면 10%가 내가 되면 어쩌지?’라는 환자로서의 주관적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을 처음으로 경험할 때의 당황스러움이 의사가 환자가 되었을 때 느낄 또 다른 감정이기도 하다.
자신을 전능한 존재로 여기고 살아온 의사들이 처음으로 주객전도를 경험하면서 땅으로 내려오게 되면서 온전한 환자와 병, 그리고 죽음에 대한 이해를 할 기회를 엊게 된다는 것이다. 뉴욕타임즈는 ‘지금-여기 의사들의 내면적 고통을 가장 이성적으로 가장 실존적으로 그려낸다’고 평한 부분이 바로 이런 지점이다.
『숨결이 바람 될 때』가 일인층 시점에서 감정적이고 미시적 접근을 했다면 『환자가 된 의사들』은 어느 날 환자란 존재로 역할 전환이 되어버린 의사들이 경험할 내면적 고통을 가장 객관적이고 이성적으로 분석해서 질병과 죽음이란 것에 대한 지평을 한 차원 넓혀주는 경험을 줄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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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결이 바람 될 때 폴 칼라니티 저/이종인 역 | 흐름출판
신경외과 의사로서 치명적인 뇌 손상 환자들을 치료하며 죽음과 싸우다가 자신도 폐암 말기 판정을 받고 죽음을 마주하게 된 서른여섯 젊은 의사 폴 칼라니티의 마지막 2년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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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가 된 의사들 로버트 클리츠먼 저/강명신 역 | 동녘
클리츠먼은 치료 방법과 관련하여 환자와 의사결정을 공유하는 것은 환자의 주체성을 회복하고 환자와 의사의 수직적 위계를 극복하는 데 관건이 됨을 역설하고, 수직적 위계의 해소는 의학교육을 개선하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지현(정신과 전문의)
어릴 때부터 무엇이든 읽는 것을 좋아했다. 덕분에 지금은 독서가인지 애장가인지 정체성이 모호해져버린 정신과 의사. 건국대 의대에서 치료하고, 가르치고, 글을 쓰며 지내고 있다. 쓴 책으로는 '심야치유식당', '도시심리학', '소통과 공감'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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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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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