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28일 오후 2시 마포구 가톨릭 청년회관 5층에서 박원순 서울 시장의 『세기의 재판』 출판기념 북토크가 열렸다. 『세기의 재판』은 박원순 시장이 17년 전에 펴낸 『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의 개정판이다. 책의 제목과 디자인이 바뀌었고, 어색한 표현들을 다듬었다. 박원순 시장은 홀을 가득 메운 청중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등장했다. 휴일에도 쉴 틈이 행사장을 찾은 박원순 시장은 오히려 이 자리를 직접 찾은 ‘깨어있는 시민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방송인 유정아 씨가 북토크 사회를 맡아 원활한 진행을 도왔다.
인류를 움직인 사람들의 이야기
유정아: 『세기의 재판』을 두고, 초판클럽을 면하게 해준 고마운 책이라고 말씀하셨는데요. 개정판을 펴낸 소감은 어떠신가요?
박원순: 책을 내면 초판밖에 팔리지 않았어요. 아쉬웠죠. 일제강점기 이후 고문을 총정리해둔 『야만시대의 기록』이나 『저작권법』 등 주제가 대중적이지 않은 탓에 그랬던 것 같아요. 시대를 너무 앞서갔는지 찾아주시는 분들이 별로 없었죠.(웃음) 『세기의 재판』은 무게감 있으면서도 흥미로운 책이에요.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았죠. 고교 논술에 도움되는 책으로 선정되면서 그 덕도 많이 본 것 같네요. 제 생활비에도 톡톡히 도움이 됐어요. 또, 영국의 한 유학생이 옥스포드에 들어갔는데 학자금이 없다는 소식을 우연히 듣고, 책으로부터 나온 500만 원을 지원해주기도 했어요. 17년 만에 개정판으로 다시 나왔지만, 여전히 고마운 책이에요.
유정아: 소크라테스, 예수 등 10가지 세기의 재판을 꼽아주셨어요. 여러 사건 중 이 10가지 경우를 선정하신 이유가 있으실 것 같은데요?
박원순: 이 책은 인류의 역사를 움직인 사람들의 이야기예요. 역사에 끼친 영향력을 고려했죠.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만 알고선 책을 쓸 수 없었어요.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10년 동안 자료를 모았습니다. 특히 예수 재판을 다루려니 2000년이 훌쩍 넘은 사건이라 기록과 자료가 턱없이 부족했어요. 하버드대학 신학대학을 방문해 한 달을 예수 재판과정에 관한 논문을 모아서 읽었죠. 자료가 있는 곳은 어디든 직접 찾아다녔어요. 그러다 보니 한 권으론 내용을 못 담겠더라고요. 3권으로 나눠 쓸 계획이었죠. 책에서 다루지 않은 마리 앙투아네트 재판이라든지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등 여러 사건에 대해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서울 시장 직을 하게 되면서 물거품 됐어요. 제가 책을 연속으로 3권 써냈다면 이것으로만 먹고 살 수 있었지 않을까 싶어요.(웃음) 자료들은 아직 집에 가지고 있습니다.
유정아: 스스로가 법조인이셨고 집요하게 자료를 찾아내는 근성이 있으신 것 같아요. 그 과정이 지겹지 않고 재미있어야지 집필이 가능할 듯 해요. 집필 동기가 따로 있나요?
박원순: 한때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면서 강기훈 유서 사건, 문익환 목사 사건, 부천서 성고문 사건 등을 변론했는데 늘 현실의 법정에서는 졌어요. 절망적인 현실의 법정을 보면서 역사 속에서는 이겨야겠단 생각에 책을 쓰기로 마음먹었죠. 인류를 돌아볼 때 위대한 인물들이 유죄로 비난받으면서, 재판을 받고 처형을 당하기도 했어요. 예수는 혹세무민의 사기 예언자 취급을 받았고 갈릴레오가 지구는 돈다고 했을 때 대부분 사람이 비난했죠. 당시로써는 엉터리 선동가나 사기꾼이었지만 그 이후에 역사에서는 다른 평가가 내려졌어요. 이들로 인해 역사가 바뀐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처음에 재판스토리를 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유정아: 당시에 잔다르크도 마녀취급을 받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역사가 바뀌고, 바로 잡혔죠. 그렇다면 잔다르크의 현대판을 살아가는 이들은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야 인정을 받을 수 있을까요. 그 시간을 줄일 수는 없을까요?
박원순: 프랑스에서 유대인 드레퓌스의 간첩 혐의를 둘러싸고 일어난 ‘드레퓌스 사건’에서 무죄를 확신하고 재심을 주장했던 사람이 여럿 있었는데요. 이분들이 그 당시에 했던 말은 ‘진실은 지하에 매장할수록 폭발력을 가진다’였어요. 흔히 사필귀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진실은 드러나는 법이죠. 다만 그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 우리의 책무입니다.
지금도 생각해보시면 21세기 사법부가 진실을 제대로 밝히고, 정의의 편을 들고 있는지를 생각하면 마냥 낙관하고 볼 순 없는 일이에요. 얼마 전 진 아무개 검사장을 보세요. 몇억을 받고 변론계도 안내고 로비가 있었다는 것 아닙니까.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알려진 강기훈 유서 사건 때도 그렇고 최근 10~20년 사이에도 진실을 어둠 속에 묻어두고, 허위를 진실처럼 행사한 사건들이 여럿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올바른 사법부와 검찰을 가지지 못했어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동시대인들의 책임도 적지 않아요. 최근 국정원이 ‘박원순 제압문건’을 만들어서 말하자면 특정단체의 댓글 공작을 통해 저를 제압하려는 움직임이 확인됐어요. 그런다고 제가 제압될 사람은 아니지만, 어떻게 21세기에 이런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저는 이 책이 꼭 지나간 역사의 뒤안길에만 존재하는 책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함께 경각심을 갖고 생각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되짚어주는 책이기도 합니다.
유정아: 10개의 재판 중 가장 가슴에 와 닿는 사례가 있다면요?
박원순: 하나같이 소중하죠. 자식 10명 중에 어느 자식이 덜 소중하겠어요. 다만, 감동이 하나하나 다 있더라고요. 소크라테스나 예수님 같은 경우에도 그분들이 죽음의 문턱에서 얼마든지 도망갈 수 있었어요. 하지만 그 자리에서 도망갔다면 지금의 영향력을 가질 수 있겠나요. 제 자신도 많은 걸 깨달았어요. 육체적, 물리적인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닌 것을요. 만약에 예수님이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기독교의 핵심 부분인 부활 사상은 어떻게 될 것이며, 소크라테스가 도망갔다면 위대한 철학자로 남아있겠나요?
유정아: 북토크의 부제가 ‘법, 인간, 역사, 정의를 다시 생각하다’예요. 그렇다면 진정한 정의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박원순: 제가 쓴 말이긴 하지만 굉장히 어려운 주제죠. 저에게 정의는 시민들에게 즐거움과 행복과 편안함을 주는 것입니다. 넓게 보자면 정의란 ‘각자의 몫을 각자에게’라고 할 수 있어요. 법철학에서 정의의 대한 논의는 매우 많습니다. 그중에 굉장히 노골적이고 현실적인 논의가 강자의 이익이에요.
우리나라 법체계의 맹점은 뉴타운 재개발 사업을 보면 잘 드러나요. 사람들이 사는 한 마을을 전면철거하고 아파트를 짓게 해요. 여기에 사업 진행 여부의 결정권은 집 소유자에게 달렸죠. 월세 사는 사람들은 불이익을 당할 수밖에 없고요. 문제는 집 소유자에는 투기꾼들이 다수 포진돼 있다는 겁니다. 법에 맞지 않아요.
제가 서울 시장이 된 이유가 뭐냐 물으신다면 도시에 작은 방을 구해서라도 살고 있는 독거노인들과 가난한 청년들, 도움이 필요한 시민들을 위해서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집 소유자들, 투기꾼들의 편을 들어야 할 때면 괴리감이 듭니다. 법은 그렇게 돼 있어요. 우리나라 도시재생에 관한 법이 소유자들과 부자들을 위한 법이에요. 이걸 변화시켜야 하는데 제 힘만으론 힘들어요. 법 자체가 그렇게 돼 있기 때문이죠. 이렇게 정의로운 사회를 향한 길은 멀고 험난합니다. 시민들의 힘이 중요해요.
유정아: ‘각자의 몫을 각자에게’ 쉬운 말이지만 쉽게 이뤄질 수 없는 말이죠. 사실 법이 만사는 아닌데 혹시 법 외에도 관심을 가지고 읽고 있는 책이 있을까요?
박원순: 노무현 전 대통령은 ‘깨어있는 시민들의 조직화된 힘’을 강조했어요. 우리는 지금 이 시대의 절망의 절벽, 그 위에 서 있다고 생각해요. 경제나 민생 문제 등 사회에 대한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는 사회입니다. 이를 해결하려면 학습이 중요해요. 알아야 행동도 가능합니다. 예컨대 미국에서는 샌더스 바람이 불고, 월가에 대한 비판이 일고 있죠. 저는 곧 미국을 방문해 『불평등의 대가』의 저자 조지프 스티글리츠를 만나요. 한국사회도 불평등이 점점 심화될 나라로 꼽히고 있다는 점에서 관심을 가졌죠. 정의라는 관점에서 보더라도 함께 고민하고 방향성을 논의할 사항입니다. 뉴욕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눌 예정이에요.
유정아: 영어로 토론하실 만큼 능숙하신가 봐요?
박원순: 제가 반기문 총장보다는 조금 낫습니다.
유정아: 객석에서 질문이 들어왔는데요. 시장님의 역사 속에서의 가장 기억에 남는 재판은 무엇인가요?
박원순: 전선에 섰던 전사들을 변론해주는 역할을 했어요. 하나같이 다 그 시대에 중요한 역할을 했죠. 많은 재판이 있었지만, 저한테 가장 의미 있는 재판은 ‘서울대 우 조교 사건’입니다. 서울대 우 조교 사건을 보면서 간단한 사건이 아님을 인식했어요. 직장에서 여성이 차 심부름하고, 술자리에서 접대시키는 경향이 있었죠. 술 심부름에 포옹은 허다했고요. 이 재판은 우리 시대에 양성평등을 바로잡을 기회였다고 봐요.
우 조교는 훌륭한 친구예요. 1심에서 이겼고, 2심에서는 진 상황에서 결혼을 앞두고 있었죠. 그녀가 소송을 취하하고 말았으면 성희롱 사건은 영원히 묻혔을 겁니다. 결혼에 대한 압박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대법원을 가서 승소했어요. 덕분에 고용평등법이 바뀌고, 성희롱 처벌이 강화됐어요. 우 조교의 불굴의 의지 덕에 법제화가 이뤄졌죠.
역사의 큰 물줄기를 바꾸는 가운데에는 한 사건이 있었고 한 사람이 있었어요. 그것이 우 조교입니다. 남녀평등 문제에서 우뚝 서 있는 사건이 될 거예요. 우 조교는 제가 평생 책임져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스스로도 지금 잘 살고 있지만요.
유정아: 다시 객석 질문입니다. 하고 싶은 것이 많을 때, 우선순위를 정하는 기준이 무엇인가요?
박원순: 닥치는 대로 합니다. 독서도 난독주의자예요, 사실 책이라는 게 좋은 양서도 있고 아닌 책도 있죠. 비판적인 사고를 하게 되면 상대적으로 못한 책에서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은 가장 중요하고 가장 절박한 일을 해야 한다는 말이 있어요. 그런데 중요한데 절박하지 않은 것과 그 반대의 경우도 많죠. 이걸 잘 가려야 합니다. 본인만의 판단만으로는 무리일 수도 있죠.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보세요. 숲을 봐가면서 나무도 챙겨야 하고, 그렇다고 숲만 보고 있으면 안 되니 적절히 균형을 맞출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유정아: 그럼 현재 시장님에게 가장 절박한 일은 뭔가요?
박원순: 어떻게 하면 시민들의 삶의 질은 높이고, 행복하게 만들지 고민하는 일입니다. 민생문제죠. 벌써 서울시장이 된 지 5년이 됐어요. 많은 노력을 해왔는데 이미 5년이 지나고, 두 번째 임기도 하반기에 접어들었네요. 5년 동안 했던 걸 잘 마무리해야죠. 고민이 많아요.
유정아: 마지막으로, 인문학적으로 관심이 많아 교양을 넓히고 싶다고 할 때, 읽으면 좋은 책이 있을까요?
박원순: 본인의 관심사를 향해서 책을 선택할 수도 있고, 고전서라든지 기본적으로 읽어야 할 책도 있습니다. 저는 해외여행을 갔을 때나 시간 날 때 하나의 주제 선정해서 책을 읽어요. 예를 들어, 이순신 리더십을 주제로 삼으면 김훈 작가의 『칼의 노래』로 시작해 그 분야의 책을 다 모아 집중적으로 읽는 습관이 있죠. 실사구시의 견지를 넓히겠다 하면 18세기 실학에 관련된 연암 박지원 선생이나 다산 정약용 선생의 책을 몽땅 다 읽는다거나, 그런 실천력이 필요해요. 어떤 책을 읽는지도 중요하지만 자기 나름의 독서법을 가지고 어떻게 읽는 지도 중요하죠. 그러다 보면 책 읽는 효율성을 기르는 방법을 개척하게 될 거예요. 자기만의 세계를 누구나 가지기를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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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재판 박원순 저 | 한겨레출판
1999년 10월 출간되어 총 32번에 걸쳐 중쇄를 거듭한 『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가 제호와 판면을 새롭게 하여 돌아왔다. 소크라테스와 예수의 마지막 재판을 비롯하여 10건의 역사 속 법정 드라마를 소개하고 있는 이 책은 중고등학생을 비롯하여 남녀노소 폭넓은 독자들로부터 사랑을 받아왔다.
김상연(예스24 대학생 리포터)
성심성의껏 보고, 듣고,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