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으로 우리가 행복한 여행을 하고 행복한 여행자가 되기 위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윤리적 여행을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윤리적 여행이란 여행지의 환경을 보호하고 현지의 문화를 존중하며 여행지 경제에 정의로운 기여를 하는 세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여행자가 이 세 가지 표준을 준수하면 여행지의 매력이 유지되면서 꾸준한 발전이 가능하기 때문에 윤리적 여행은 ‘지속 가능한 여행’이라고도 한다. 지속 가능한 여행의 규준을 지키지 않으면 여행지의 경제 구조와 문화와 환경이 파괴되고, 현지인들이 여행자를 적대시하면서 결국 세상에 행복한 여행을 할 수 있는 곳이 남아나지 않게 된다.
사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위의 세 가지 윤리적 기준을 대체로 잘 알고 있는 편이다. 그리고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위의 세 가지 윤리적 기준을 대체로 잘 지키지 않는다. 그래서 누구나 여행을 떠나면 윤리 규준에 맞지 않는 행동을 몇 가지쯤 하게 된다. 우리가 이런 실수와 잘못된 행동을 반성함으로써 발전을 이룰 수 있다면 누구나 좋은 윤리적 여행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한번 윤리 규준을 어기고 나면 이런저런 변명을 하며 자신의 그런 행동들을 정당화해버리곤 한다.
에밀 저번과 세라 덜니커라는 연구자들은 “사람들은 윤리적 여행의 표준을 잘 알고 있으면서 왜 이를 잘 지키지 않을까”라는 문제를 분석해보았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윤리적 표준을 잘 지키지 못하는 여행자들의 행동 패턴에는 ‘인지부조화’라는 유명한 심리적 메커니즘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인지부조화란 이런 것이다. 우리가 “현지 아이들에게 적선을 하면 안 된다”는 신념이 강하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어느 날 캄보디아를 여행하던 중 그 많은 아이들의 공세에 시달리다 못해 볼펜 한 자루와 우리나라 500원짜리 동전 하나를 주고 아이들이 그린 그림도 3달러어치 사고 말았다. 그러면 우리 머릿속에서 부조화가 발생한다. “나는 아이들에게 적선을 하는 사람이야 안 하는 사람이야?”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에서 나쁜 놈들이 노래 잘 부르는 아이들을 뽑아 봉사로 만들어버리고 구걸을 시키던 것을 기억하는가.
이처럼 우리의 태도 또는 신념과 우리의 행동이 일치하지 않을 때 더 큰 힘을 발휘하는 쪽은 우리의 행동이다. 그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하고 원초적이다. 태도와 신념은 바꾸면 되지만 일단 저질러버린 행동은 없었던 것으로 할 수가 없지 않은가? 이 때문에 우리는 태도와 행동의 부조화가 발생했을 때 간단히 태도를 수정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리곤 한다. 즉 위의 상황에서는 “사실 아이들한테 적선하는 게 나쁜 일은 아니지. 암, 그렇고말고”라는 식으로 우리의 윤리적 표준을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저번과 덜니커는 여행자들이 인지부조화에 따라 태도를 변화시킬 때 전형적으로 보이는 여섯 가지 부조화 해소(즉 변명) 양상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첫째는 우리가 기존의 표준에 어긋나는 일을 하긴 했지만, 알고 보면 그게 그렇게 부정적인 결과를 낳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내가 앙코르와트에서 노트 그림 파는 벙어리 아이의 그림을 사고서 했던 “사실 아이들한테 적선하는 게 나쁜 일은 아니지. 암, 그렇고말고”라고 한 변명을 꼽을 수 있다.
둘째는 ‘하향 비교’이다. 이는 내가 곳곳의 산호초에서 스노클링을 하며 “나는 산호를 살짝 밟았지만 같이 갔던 그놈은 완전히 산호를 짓밟고 서 있던걸”이라고 말할 때 나타나는 바로 그 양상이다.
셋째는 ‘책임의 부정’으로, 예를 들어 인도에서 기차를 타면 모든 인도인이 온갖 쓰레기를 기차 창밖으로 휙휙 던져버리는데, 이런 상황에 부화뇌동해서 쓰레기를 창밖으로 버린 뒤 “다들 이렇게 하잖아”라고 말한다면 책임의 부정 패턴에 사로잡힌 것으로 볼 수 있다.
넷째는 “나도 그러고 싶진 않았지만 거기에선 꽁초를 거기에 버렸어야 했다고”라는 식으로 말하는 ‘통제의 부정’이다. 즉 책임의 부정이 현지인 탓을 하는 패턴이라면, 통제의 부정은 상황을 탓하는 패턴이라 할 수 있다.
다섯째는 “휴가는 예외라고요. 여기 나와서까지 윤리 같은 걸 신경 써야 해요”라고 말하는 ‘예외 형성’이다. 이 정도면 꽤 막가는 패턴인데, 다행스럽게도 나는 여기까지 이른 여행자는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
마지막 여섯째 패턴은 “사실 나는 나쁜 일보다는 좋은 일을 더 많이 해요”라고 말하는 ‘보상’이다. 이는 아주 교묘하고 기가 막히게 잘 먹히는 변명 양상이다. 나도 언제나 어떤 잘못을 저질렀을 때면 “난 평소에 쓰레기도 잘 처리하고 진짜 돈이 필요한 사람들한테 돈을 쓰고 아이들한테 돈도 주지 않는 사람이야. 그러니 뭐 이 정도면 자신을 용서해주자, 허헛”이라는 생각이 번뜩번뜩 들곤 한다.
우리는 완벽할 수도 없고, 변명을 하지 않을 수도 없다. 그렇지만 위의 여섯 가지 변명은 그저 변명에 불과할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적어도 좀 더 나은 여행자가 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는 않을 것이다. 잘못을 변명하는 것은 괜찮다. 다음에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 노력하기만 한다면 말이다. 이런 작은 노력을 꾸준히 이어간다면 우리는 여행을 하는 것만으로도 주변의 여러 사람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좋은 여행자로 점점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여행의 심리학 김명철 저 | 어크로스
심리학과 여행학을 결합하고 여기에 자신의 여행 경험을 더한 이 독특하고도 기발한 여행안내서. 역마살의 정체에서부터 자신이 어떤 여행자 스타일인지, 여행에서 경험한 부정적인 정서를 차분히 가라앉히고 행복감을 오래 지속하는 법에 이르기까지 심리학자로서 여행에 관해 말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담았다.
김명철
서울대학교에서 서양사와 심리학을 전공하고 동 대학원에서 심리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타칭 ‘웃기는 심리학자’로 통하며, 도합 1년 5개월 12개국을 여행한 베테랑 여행가이기도 한 그는 스스로를 ‘경험추구 여행자’로 규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