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자가 운명을 바꾼다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끊임없이 해결책을 모색하고, 그러다가 새로운 발명을 하기도 한다. 불편함은 그냥 불편함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어 철자의 불편함은 보는 시각에 따라 참을 만한 불편함일 수도 있고,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불편함일 수도 있다.
글ㆍ사진 장영준
2016.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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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나라 문자의 철자를 모르다니! 처음엔 정말 불가사의한 말로 들렸다. 1980년대 미국의 부통령이었던 댄 퀘일이 감자의 복수형(potatoes)을 몰라서 말 그대로 전 세계가 떠들썩했고, 신문의 해외토픽란에는 철자를 모르는 부통령으로 소개되기에 이르렀다. 그가 초등학교를 방문했는데, 한 아이가 감자의 복수형을 potatoes라고 쓰자 틀렸다면서 potatos로 고쳤다는 것이다. 그는 이 일로 인해 대통령이 될 꿈을 포기해야 했고, 아예 예선전에도 나오지 못하게 되었다. 미국의 부통령 중에는 댄 퀘일 말고도 철자를 몰라 구설수에 오른 인물이 또 있는데, 이로 미루어 보아 미국의 부통령들이 무식하거나 아니면 영어 철자가 까다롭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필자는 당연히 후자가 원인이라고 믿는다. 아닌 게 아니라 철학자 버나드 쇼는 영어 철자가 무지막지하게 복잡하다고 한탄하면t서 fish를 ghoti라고 써도 같은 발음이 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의 논리에 따르자면, 우선 enough, cough 등에서 보듯이 gh는 [f] 발음이 나고, woman의 복수인 women에서 보면 철자 o가 [i]발음이 되며 nation, inspiration에서 보듯이 -ti는 [i]발음이 된다. 따라서 논리적으로는 ghoti가 fish와 같은 발음이 나지 말란 법도 없다.

 

영어의 발음과 철자의 괴리에 대해서는 일찍이 매사추세츠 주의 교육위원이었던 윌리엄 웹스터가 문제점을 제기하면서 미국 영어의 철자법을 개혁하고자 했다. 그는 깜짝 놀랄만한 여러 가지 철자 개혁을 제안했고 그 중 다수가 받아들여져서 오늘날 미국 영어와 영국 영어의 철자법이 달라지게 된 원인을 제공했다. 오늘날처럼 바쁜 세상에서 mousique을 music으로 짧게 쓰게 된 것은 웹스터의 공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철자를 단순화시켜서 우리의 시간을 절약시켜주는 공을 세우기도 했지만 거대한 사전을 만들어서 자신의 후손들에게 이름과 부를 물려주기도 했다. 영국이 국가적 사업의 결실인 옥스퍼드 대사전을 자랑한다면 미국은 웹스터란 개인의 철자 사랑의 결실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도 문제가 모두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철자를 간편하게 고치고 발음과 철자를 일치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였지만, 영어는 아직도 철자와 발음의 괴리가 그 어떤 언어보다도 크다. 

 

글을 잘 쓴다는 것은 물론 정신의 영역이다. 그러면서도 그에 못지않게 기술의 영역이기도 하다. 교육받지 않은 인간도 말을 하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는 것은, 촘스키의 주장을 빌리자면, 입말이 인간 유전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글말은 유전자의 영역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후천적으로 배우고 가꾸어야 잘 쓸 수 있는 후천적 영역이다. 글쓰기 학교는 자연스럽지만 말하기 학교는 왠지 이상하게 들린다. 글은 연습하고 고쳐야 하는 분야이다. 말 잘하는 사람은 많은데, 글 잘 쓰는 사람이 그만큼 많지 않은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스트렁크는 이러한 문제를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글쓰기의 요소』 맨 뒤에 부록으로 철자를 틀리기 쉬운 단어들의 목록을 붙여놓았다. 친절하고 자상하다. 필자도 어린 시절 친구와 철자 내기를 했다가 참으로 놀라운 즐거움을 만끽했던 적이 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회색이란 단어의 철자를 필자는 grey라고 믿고 있었는데, 친구가 그게 아니라고 해서 우리는 내기를 하기로 했다. 당시로는 꽤 비싼 짜장면 내기였다. 둘 다 자신이 있었으니까. 그 친구는 회색의 철자가 gray라고 우기는 것이었다. 침을 삼켜가면서 천천히, 마음속으로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천천히 사전을 넘겨 gray, grey를 찾았다. 맙소사! 둘 다 있었다. 하나는 미국식, 하나는 영국식 철자. 우린 그때 날아간 짜장면은 금방 잊어버리고 내공이 쫌 되는군, 하는 치기어린 즐거움을 느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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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자를 잘못 알아 부통령에서 일약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한 명문 가문의 명문대 출신 정치가는 그렇다 치자. 철자가 그렇게 대수인가? 그렇다. 우리나라는 일찍이 고려 광종 시대부터 과거시험을 보지 않았던가. 과거시험이란 결국 한자 시험이고, 한자 시험이란 한자의 철자를 알아야 하는 시험이다. 조선 시대의 많은 과거지망생들이 붓통에 컨닝 페이퍼를 넣고 과거시험장에 들어갔다고 하니, 철자가 얼마나 어려운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물론 과거시험이 고작 철자만 보는 시험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 시험의 많은 부분이 철자에 의해 결정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오늘날 중국인들은 자기네 말의 문자인 한자로 뭘 쓰지 않는다. 대학생들도 대개의 경우 병서법이라고 하여, 로마자로 필기하고 컴퓨터를 통해 다시 중국 문자로 바꾸는 방법을 사용한다. 핸드폰도 마찬가지이다. 필자가 얼마 전에 국제회의에 참석했는데, 필자는 발표자의 내용보다는 그것을 순식간에 한자로 바꾸는 그 기술에 한눈을 팔았다. 발표자가 영어로 말하면, 통역사는 그것을 중국어로 번역하는데, 일단 컴퓨터 화면에는 로마자로 타이핑을 한다. 거기에 성조를 붙이면 컴퓨터 소프트웨어가 그걸 다시 한자로 바꾸어준다. 마치 우리가 한글로 ‘대한민국’이라고 쓰고 F9을 눌러 한자로 변환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러다가는 모든 중국인들이 한자를 쓸 수 없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철자가 복잡하다 보니까, 적어도 중국에서는 철자를 틀렸다고 부통령에서 대통령으로 올라가지 못하는 일은 없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우린 참으로 다행이다. 영어나 중국어보다도 우리말의 언어와 문자는 놀라울 정도로 일치하기 때문에, 굳이 철자를 익히기 위해서 시간과 노력을 들일 필요가 없다. 세종대왕도 훈민정음이 배우기 쉽기 때문에 어린아이라도 며칠 연습하면 익힐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믿거나 말거나 미국의 진화생물학자인 제레드 다이아몬드도 한글이야말로 발음과 철자가 놀라울 정도로 일치하는 몇 안 되는 문자라고 어떤 저널에서 주장하기도 했다. 스트렁크가 만일 우리나라에서 태어났더라면 『글쓰기의 요소』에 틀리기 쉬운 철자 단어들이란 부록을 붙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럴 필요가 없었을 테니까.

 

불편함은 나쁜 것인가? 꼭 그렇지는 않다. 인간은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끊임없이 해결책을 모색하고, 그러다가 새로운 발명을 하기도 한다. 불편함은 그냥 불편함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어 철자의 불편함은 보는 시각에 따라 참을 만한 불편함일 수도 있고,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불편함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기왕에 영어를 버리지 않기로 했다면, 스트렁크의 철자를 틀리기 쉬운 단어들을 눈여겨 볼 필요는 있다. 댄 퀘일처럼 부통령에서 대통령으로 가기 위한 길이 막힐까봐 두려워서는 아니지만, 틀린 철자는 의미를 바꾸고 소통을 가로막기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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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요소 윌리엄 스트렁크 저/장영준 역 | 윌북(willbook)
정확한 문장을 쓰는 핵심 규칙을 명쾌하게 정리한 책이다. 영미권 사람들이 잘 쓴 영어와 잘못 쓴 영어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는 책으로, 타임지 선정 ‘가장 영향력 있는 100대 도서’이며, 스티븐 킹, 댄 브라운 등 대작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책으로 꼽는 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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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준

국내 최고의 촘스키 전문가. 하버드 대학교에서 박사 논문 집필 당시 세계적 언어학자인 노암 촘스키에게 논문 지도를 받으며 그의 제자로 이름을 알렸다. MIT와 애리조나 주립 대학교 방문학자로 활동했고, 중앙 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현재는 오르고라는 필명으로 활동한다. 저서로는 『한국어가 사라진다면』 (공저), 『언어의 비밀』 , 『그램그램 영문법 원정대』 시리즈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촘스키, 끝없는 도전』, 『번역과 번역하기』, 『영어에 관한 21가지 오해』, 『최소주의 언어학』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