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뇌과학자 모기 겐이치로는 비밀을 털어놓았다. 마흔이 넘어 쓴 『행복해지는 방법』에서 자신이 삶을 힘껏 살 수 있었던 데는 몽고메리의 소설 『빨강머리 앤』의 힘이 컸다고 고백했다. 『빨강머리 앤』은 자신에게 ‘운명의 한 권’이었다고. 여자아이나 읽는 책을 읽었다는 비난을 감수하고 『빨강머리 앤』에 대한 사랑을 ‘커밍아웃’하며 앤이 그려내는 행복의 철학을 들려주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눈앞에 펼쳐진 길이 좁더라도, 그 길가에는 조용하고 행복한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다는 것을 앤은 안다.”
그리고 앤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생의 긍정이라고 말한다. 『빨강머리 앤』은 내게도 그런 책이다.
서른 무렵 나는 우울증을 겪었다. 그 시절 용기를 주었던 책들에 대해 전작 『당신이 이기지 못할 상처는 없다』와 『치유의 독서』에 밝힌 바 있다. 『당신이 이기지 못할 상처는 없다』에서 『빨간 머리 앤』에 대해 이미 이야기했었다.
하지만 못한 이야기가 있다. 우울증을 이기는 데 가장 도움이 된 것을 말하라 한다면, 나는 그것이 애니메이션 <빨강머리 앤>이었다고 고백해야만 할 것이다. 우울과 분노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2003년경 우연히 케이블방송에서 해주는 <빨강머리 앤>을 보았다. 만화채널을 거의 보지 않는데 어쩌다 <빨강머리 앤> 첫 회를 본 것이었다. 그 후 <빨강머리 앤>을 본방 사수했다. 매일 방송을 기다렸고 50화가 끝난 순간, 형언할 수 없는 감동에 휩싸였다. <빨강머리 앤>은 내게 최고의 우울증 치료제였다. 이후 나는 앤의 연작들, 『에이번리의 앤』, 『레드먼드의 앤』도 읽었고, 소설의 실제 배경에서 만든 드라마도 시청하는 열렬한 팬이 되었다.
고상한 척하기 바쁜 국내 비평계는 모르겠으나, 세계적으로 앤의 인기는 뜨겁다. 배경이 된 캐나다 프린스 섬의 ‘그린 게이블스Green Gables’는 한 해 수만 명이 찾는 관광명소이고, 영미 연구가들의 앤에 대한 찬사는 그칠 줄 모른다.
독서치료를 연구하며 나는 『빨강머리 앤』이 전하는 치유의 힘을 더 잘 알게 되었다. 국내에 나온 독서치료 관련 책 가운데 가장 신뢰할 만한 『비블리오테라피』에서도 『빨강머리 앤』의 뛰어난 치유력에 대해 언급한다.
저자이자 영문학자인 조셉 골드는 “몽고메리는 아주 다양하고 놀라운 방식으로 여성독자들에게 힘과 성원을 보내고 생존방법을 알려주었다. 어떻게 해서 이 책은 그토록 놀라운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을까. 여자와 아이들에게 온갖 억압적 규칙을 적용하던 시절(그러니 여자아이는 더 더욱이 ‘무시당하던’ 시절), 앤은 여성의 강한 생명력을 보여준 모델이었다. 앤은 반항아이자 시인, 생존의 모델”이었다고 극찬한다.
그는 앤이 보이는 덕성 가운데 으뜸은 “판타지를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고정적인 생활의 논리를 파괴하는 꿈 꾸기 능력은 창조력의 한 부분”이며 인간 생존과 번영에 있어 가장 중요한 에너지였다고 하며.
우울증을 겪던 시절 내 상상력도 고갈되었다. 더는 소설도, 시도 쓰지 않았고, 글을 쓰지 않으니 책도 읽을 이유가 없었다.
“얼굴이 계속 햇빛을 향하게 하라. 그러면 그림자를 볼 수 없을 것이다(Keep your face to the sunshine and you cannot see the shadow).”
- 헬렌 켈러
아마 앤이 내게 한 충고는 그것이었을 것이다. 앤 덕분에 나는 운명을 받아들이고, 희망을 품고, 미래를 상상하고, 생의 의욕을 회복했다.
앤에 대한 내 사랑과 연구는 몇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가장 중요한 결론은 앤이 생의 의지로 충만한 인물이며, 자기결정성의 대변자라는 점이다.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 것일까? 살기 위해 우리는 힘이 필요하다. 철학자나 심리학자들은 그것에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철학자 베르그송은 인간에게 삶을 지탱하는 생의(生意)가 존재한다고 했고, 심리학자 에드워드 데시는 모든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스스로 해내고자 하는 자기 결정성의 욕구를 갖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상담실에서 만나는 분들은 이 생의나 자기 결정성 욕구가 사라진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무기력해진 데는 모두 그만한 사연이 있다.
학자들은 그 원인을 크게는 기질이나 양육환경, 성장 과정의 부정적 경험에서 찾는다. 우선 내성적이거나 민감한 성격을 가진 사람, 위험한 상황에 다가가기를 꺼리는 기질, 안전욕구가 강하고 불안도가 높은, 이른바 신경증적 성격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은 세상에 나서기보다는 자기가 만든 심리적 동굴로 움츠러들어 사는 경우가 많다. 인구 중 적어도 5분의 1은 이런 기질을 가진 채 태어난다. 그들에게 기질은 불행의 씨앗이 된다.
애착은 자신이 특별하다고 믿는 주 양육자와 밀접한 정서적 관계를 맺으려는 본능이자 깊은 정서적 사랑이다. 지속적인 애착이 이루어지면 안정 애착이라는 안정적 특성을 얻고,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나 불신도 조금씩 극복할 수 있다. 반면 대개 3세까지의 민감기에 안정적인 애착이 이루어지지 않아 불안정 애착이라는 심리구조를 가지면 세상을 믿지 못하고 타인과 가까이하기를 꺼리며, 새로운 도전을 걱정하는 사람이 되기 쉽다. 그래서 의욕을 갖기보다는 삶을 걱정하는 데 에너지를 소진하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사랑과 애착이 결핍될 때 의욕은 싹틀 수 없다.
마지막으로 살면서 어떤 일에 유능하다는 기분과 생각을 가질 경험이 부족한 경우, 무기력하고 선택능력이 떨어지는 내면을 갖게 된다.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가장 알차게 보냈던 순간, 일을 하면서 가장 큰 보람과 즐거움을 느꼈던 순간을 생각하면, 역시 자신이 갖춘 실력을 모두 쏟아부어 어려운 일을 해냈을 때라고 할 수 있다. 이 성취감은 기억에 두고두고 남아 다시 한 번 그런 경험을 해보고 싶다는 욕구를 불러일으킨다”며 성취감이 인생을 열정적으로 살게 하는 정서적 원천이라고 말한다.
나는 의욕 잃어버린 이들과 상담할 때마다 그들이 다시 생의, 자기 결정성, 성취감을 얻으려면 무엇이 필요할지 고민한다. 그리고 그 첫 단추로 대개 『빨강머리 앤』을 읽고, <빨강머리 앤>을 시청하게 한다.
앤은 심리학에서 행복한 삶을 누리는 이들에게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기질적 낙관성을 드러낸다. 앤이 부모에게 물려받은 외향성이나 기질적 낙관성은 역경을 이겨내는 데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앤은 까다롭고 예민한 아이이기도 했다. 태어나자마자 부모가 죽고 고아원으로 맡겨져 참혹한 유년기를 보낸 앤은 애착 문제도 컸다. 앤은 소설 곳곳에서 때로 깊은 슬픔에 젖는다고 실토한다.
그린 게이블스의 매튜와 마릴라가 앤의 새 부모가 된 것은 대단한 행운이다. 앤의 멋진 성장에 가장 큰 힘이 되었던 것은 물론 매튜, 마릴라와 여러 친구, 선생님들의 사랑이었다.
앤의 이야기는 까다롭게 예민한 기질, 초기 애착의 결핍, 또 그로 인한 형성된 괴팍한 성미 같은 심각하고 다양한 심리문제조차 긍정적 상상을 멈추지 않으며, 생의를 품고서 성취감을 얻는 인생을 살아가고, 자기 결정성의 태도만 유지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행복과 자유가 충만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마시멜로 테스트를 이끈 심리학자 월터 미셸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변할 수 있다”며 생의 낙관적 가소성을 예찬한다.
힘들고 지칠 때면 그 후로도 한동안 나는 『빨강머리 앤』의 마지막 부분을 펼쳤다. 매튜가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마릴라 역시 점점 눈이 멀어가고 있었기에 앤은 바라마지 않던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한다. 그러나 그것은 앤에게 운명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택하는 결정이었다. 그리고 그 날은 기쁘게도, 길버트와의 오랜 오해도 푼 날이었다(결국 둘은 훗날 결혼해 여러 명의 아이까지 낳는다).
“앤의 꿈이 이루어질 길은 퀸 학교에서 돌아온 날 밤에 이미 가로막혔습니다. 하지만 길을 좁아졌어도 그 길에는 조용한 행복의 꽃들이 가득 피어 있다는 것을 앤은 알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되는 것과 큰 희망과 두터운 우정이 이제 앤의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어떤 것도 앤이 가지고 있는 상상력과 꿈의 세계를 방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많은 모퉁이를 만나게 되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이 하늘에 계시니까 두려운 것은 없어.” 앤은 조용히 속삭였습니다.”
[추천 기사]
- 사랑의 현실과 현실적인 사랑
- '눈길'을 걸어온 소녀의 '귀향'
- 공선옥, 소외된 이웃과 가난의 문제를 다뤄온 소설가
- 마종기, 모든 경계를 감싸 안는 시인
- 강만길, 평화의 나침반이 된 역사학자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박민근(심리치료사)
대학원에서 문학을 전공했고, 지금은 문학, 철학, 심리학이 융합된 독서치료를 연구하고, 또 임상에 적용하고 있다. 작품으로는 『치유의 독서』,『성장의 독서』,『당신이 이기지 못할 상처는 없다』등이 있다
감귤
2016.0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