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앉을 자리가 없는 커피숍, 5분만 방영되는 토크쇼 : 때로 약점이 당신의 무기가 된다 (1)’에서 이어집니다)
물론 단순히 약점을 특징이라 선언하고 무기로 삼는 것만으로 경쟁에서 살아남는 것은 아니다. 스마트 포투나 스탠딩커피 모두 콘셉트를 시도해볼 만한 배경(소형차 시장이 갖춰져 있던 유럽, 젊은이들의 문화가 태동하던 이태원)을 갖추고 있었고, 콘셉트를 소비자들에게 세련되게 전달할 방법(공포영화 문법을 차용한 광고, 깔끔하고 미니멀한 간판)을 고민했다. 약점을 무기로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가 약점을 조금도 보완할 필요가 없다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 3M사의 포스트-잇 메모지에 쓰인 접착제는 1968년에 개발되었지만, 회사 내 회의적인 분위기를 극복하고 실제 포스트-잇 메모지 생산에 들어간 것은 1980년의 일이다. 접착제를 스프레이 형태로 가공해 팔려는 계획이나, 접착제를 표면에 바른 게시판을 만들어 보려는 계획 등을 “메모지 자체를 붙였다 뗄 수 있게 만들자”는 발상으로 보완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성공은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3M사의 포스트-잇 노트. (이미지 출처: Erik Breedon. CC BY-SA 3.0)
체크포인트 1. 약점을 무기로 삼을만한 배경이 존재하는가?
<라디오스타>가 ‘독하고, 어수선하고, B급 정서에, 방송시간도 짧은’ 쇼라는 점을 고유한 특징, 나아가 장점으로 어필할 수 있었던 것 또한 마찬가지다. 약점을 무기로 내세울 수 있는 배경, 약점을 세련되게 무기로 전환하기 위한 고민, 약점을 무기로 삼는다는 전략 자체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이루어진 보완이 뒷받침이 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먼저 배경을 살펴보자. 당시 <황금어장>의 메인코너였던 ‘무릎팍 도사’는 스타들에게 독한 질문을 던지던 애초의 B급 콘셉트에서 차츰 진중한 질문이 오고 가는 토크쇼로 방향을 틀었다. 7편의 에피소드만을 남기고 폐지됐던 <이문세의 오아시스>(2005) 이후 실로 오랜만에 1대1 정통 토크쇼를 다시 살려볼 기회를 잡은 MBC 입장에선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과거 <이문세의 오아시스>를 연출했다가 쓴 맛을 봤던 여운혁 당시 <황금어장> CP는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그 변화 과정에서, 기존의 ‘무릎팍 도사’가 유지하던 독하고 날 선 B급 정서를 아끼던 이들의 관심은 자연스레 ‘라디오스타’로 이동하게 됐다.
게스트를 모셔놓고 대화를 나누지만, 사실상 MC들이 쇼의 중심이 되었던 KBS <슈퍼TV MC 대격돌-위험한 초대>
<슈퍼TV MC 대격돌-위험한 초대> ⓒ한국방송. 2002-2003
MC들이 게스트보다 더 말을 많이 하는 토크쇼란 콘셉트 또한 새롭지만 받아들여질 수 없을 만큼 낯선 것은 아니었다. KBS <슈퍼TV MC대격돌 위험한 초대>(2002~2003)처럼 게스트를 모셔 놓고 대화를 나누되 게스트의 말보단 기존 패널들이 물벼락을 맞는 것에 집중하는 형식의 게임 쇼도 있었거니와, ‘무릎팍 도사’에서도 강호동과 유세윤, 우승민이 자신들끼리 대화를 나누며 게스트의 혼을 빼놓는 순간들을 시도해 보인 바 있었다. 때마침 MBC <무한도전>(2005)이 그 문을 연 “나만 살아남으면 되는 무한이기주의” 코드가 대중에게 먹히기 시작한 때이기도 하다. 사운드가 너무 물리는 통에 화면 위에 말풍선을 띄워야 할 만큼 어수선한 MC들의 멘트, 게스트를 방치하다시피 해놓고는 자기들끼리 말싸움을 벌이며 산으로 가는 진행 등은 분명 이상적인 토크쇼의 요소라 할 만한 것들은 아니었지만, 그런 요소들로 점철된 코너가 하나쯤은 나와도 이상하진 않을 만한 상황이었던 셈이다.
체크포인트 2. 어떻게 하면 약점이 아니라 특징이라고 설득할 수 있을까?
배경이 갖춰졌으니 이제 약점을 어떻게 하면 세련되게 어필할 것인가를 고민할 차례다. 많은 이들이 기억하겠지만 ‘라디오스타’는 그 초창기만 해도 토크쇼라는 장르명 대신 ‘토크 드라마’라는 제목을 달고 매 에피소드마다 부제를 달았다. ‘무릎팍 도사’가 그랬듯 콩트와 토크쇼가 섞인 형태임을 어필해 형식의 파격을 납득시켜보려 한 것이다. 라디오 부스 안 DJ들이 아직 정해지지 않은 메인 DJ 자리를 꿰차기 위해 신경전을 벌이며 고군분투한다는 플롯의 콩트로 포장되었기에 MC들끼리 싸우는 광경이나 돌발상황, 허를 찌르며 튀어 나오는 독한 멘트들 또한 쇼의 콘셉트에 묻어갈 수 있었다. 아예 화면 위에 말풍선을 띄워 MC들의 멘트가 물고 물리는 상황이라는 것을 시각적으로 보여준 CG, MC들의 싸움에 당황해 하는 게스트의 반응을 클로즈업으로 보여주는 편집 등은 이 쇼가 애초부터 무게 중심의 많은 부분이 MC들에게 쏠려 있다는 것을 어필하는 장치였다.
제작진은 당황한 게스트의 반응을 클로즈업으로 잡고, 물고 물리는 MC들의 멘트는 말풍선으로 보여줌으로써 이런 요소들이 ‘라디오스타’의 핵심 요소임을 강조해서 보여주었다.
<황금어장-라디오스타> ⓒ문화방송. 2007-2016
앞서 지적한 바 있던 ‘5분 방송’의 지속적인 언급과 ‘무릎팍 도사’에 대한 질투 등의 언더독 콘셉트 또한 약점을 특징으로 설득하기 위한 포석의 일환이다. 실제로는 10분에서 20분 사이의 분량으로 방영이 된 회차가 대부분이고 시청률 또한 ‘무릎팍 도사’에 크게 밀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라디오스타’는 계속 “‘무릎팍 도사’에 얹혀 가는 코너”라는 식의 멘트를 반복하면서 상대적 약자를 자처해 각을 세웠다. 시청자들은 ‘라디오스타’가 내세우는 초라함과 라이벌 의식이 많은 부분 의도적으로 연출된 것인 줄 알면서도 그 점 탓에 프로그램 특유의 B급 정서를 눈감아 줬다. ‘라디오스타’는 그렇게 <황금어장>이란 프로그램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 않으니, 조금은 더 센 농담을 던져도 괜찮지 않느냐는 암묵적인 동의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체크포인트 3. 적절한 보완이 이루어졌는가?
제작진이 MC들의 아귀다툼을 무작정 방치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가며 서로를 찔러대는 MC들의 특징은 자극적이고 가벼운 반면 쉽게 피로해지거나 중심을 잃고 흩어질 위험 또한 상존하고 있었다. 제작진은 그 사이에서 무게 중심을 잡고 완충제 역할을 해 줄 만한 사람으로 김국진을 투입해 프로그램을 보완했다. 실제로 김국진은 방송에 적응하는 동안엔 ‘아직 실패와 이혼의 충격에서 미처 다 벗어나지 못한 지난 세기 사람’이란 콘셉트로 다른 MC들에게 끊임없이 공격을 당하며 완충제 역할을 해줬고, 어느 정도 적응한 뒤엔 맏형이자 가장 오래 된 경륜을 지닌 사람으로서의 무게감으로 프로그램의 중심을 잡았다. 신동이 빠지고 김국진이 들어올 때만 해도 얼핏 자극적인 맛이 줄어드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마치 미량의 소금이 음식의 단 맛을 강조하듯 오히려 김국진이 프로그램의 보수적인 부분을 잡아줬기에 나머지 3인의 MC들이 더 자유롭게 움직이는 게 가능했던 것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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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한(TV 칼럼니스트)
TV를 보고 글을 썼습니다. 한때 '땡땡'이란 이름으로 <채널예스>에서 첫 칼럼인 '땡땡의 요주의 인물'을 연재했고, <텐아시아>와 <한겨레>, <시사인> 등에 글을 썼습니다. 고향에 돌아오니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