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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영석 연대기 (4) 남들이 다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잘하는 것으로

자기복제가 아니라 자기노선이 확고한 예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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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영석은 꾸준히 자신이 잘 할 줄 아는 예능, 한없이 일상에 가까운 예능을 고집함으로써 PD로선 16년만에 백상예술대상 대상을 거머쥐었다. 이것은, 남의 싸움에 흔들리는 게 아니라 고집스레 자기 싸움을 살아낸 사람, 스스로 ‘아날로그형 인간’이라 말하며 굳이 등 떠밀려 변화하는 대신 자기 중심을 지켜온 사람이 거둔 성취에 대한 작은 헌사다.

(아이디어는 자유롭게, 대신 쉬운 찬성은 말고 : 나영석 연대기 (3)에서 이어집니다.)
 
앞서 나는 나영석이 걸어온 행보에서 몇 가지 일관된 방향성을 정리해 제시했다. 1) 핵심만 남기고 군더더기를 쳐내기. 2) 핵심 콘텐츠의 밀도를 높여 보는 이에게 정서적 만족감을 제공하기. 3) 자유롭게 아이디어를 뻗되 너무 익숙하거나 뻔한 답은 철저하게 피해가기. 그런데 이 모든 방향성은 사실 한 가지 원칙 안에서 움직인다. 바로 “트렌드에 휩쓸리는 대신 내가 하고 싶고 잘 할 수 있는 것을 한다”는 것이다. 언뜻 익숙하고 뻔한 것을 피하라는 3번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내가 하려는 얘기는 그 뜻이 아니다. 남의 흐름, 남의 싸움을 무조건적으로 따라갈 필요가 없단 이야기다.
 


자기복제가 아니라
자기노선이 확고한 예능
 
잠시 시계를 돌려 나영석이 CJ E&M으로 이적했던 2012년 초를 회상해보자. 그 시기는 나영석 본인이 관여한 KBS <인간의 조건>이나 JTBC <상류사회> 등으로 관찰 예능의 가능성이 태동하던 시기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이 최전성기를 누리던 시기이기도 했다. Mnet <슈퍼스타K>와 MBC <위대한 탄생>, SBS <K팝스타>, tvN <코리아 갓 탤런트> 등 신인을 발굴하는 프로그램부터, MBC <우리들의 일밤 - 나는 가수다>, KBS <불후의 명곡 ? 전설을 노래하다>처럼 기존의 가수들을 경쟁시키는 프로그램까지. 예능 프로그램 속의 경쟁은 더 첨예해지고 그 룰은 더 복잡해졌다. 방송 안에 어떤 식으로든 경쟁과 생존의 테마를 끌어들이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시대의 대세처럼 보였다. 나영석 또한 이런 조류에 발 맞추려 했다면 결코 못 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는 KBS <출발 드림팀>의 조연출로 커리어를 시작했고, ‘디비디비딥’을 비롯한 각종 게임을 유행시켰던 KBS <여걸 식스>를 거쳐갔으며, 팀별 레이스와 각종 게임으로 무장한 KBS <슈퍼선데이 - 1박 2일> 의 수장을 지낸 사람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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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오디션 프로그램들의 춘추전국으로,

예능 프로그램 속 경쟁구도 과열이 피할 수 없는 일처럼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슈퍼스타K2> ⓒCJ E&M. 2010

 
그러나 나영석이 CJ E&M 이적 후 1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내놓은 것은 게임도 경쟁도 없는 <꽃보다 할배>였다. 노년의 배우들의 유럽여행기가 케이블 채널이란 한계를 뚫고 4%~7%의 시청률을 기록할 것이라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한 편에선 국보급 원로 배우들을 섭외하는데 성공해 주인공으로 내세운 나영석의 기획력을 칭찬했지만, 다른 한 편에선 대단히 새로운 걸 들고 나올 줄 알았는데 <1박 2일>의 연장선상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니냐는 비판 또한 함께 나왔다. tvN <삼시세끼>라고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처음 제작 소식이 들려올 때만 하더라도 어르신들의 음식 수발을 드느라 팔자에 없는 요리를 해야 했던 이서진의 별명인 ‘요리왕 서지니’에서 파생된 스핀오프라는 오해를 샀다. CJ E&M으로 이적한 이후의 나영석은, 새 프로그램을 런칭할 때마다 꾸준히 늘 해오던 것을 장소만 바꿔 반복하며 자기복제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샀던 셈이다. 하지만 그 말은 다시 이야기하면 나영석이 시대의 조류에 자신의 행보를 맞춘 것이 아니라 자신이 걷고자 하는 방향으로 걷길 고집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시대의 조류를 따라잡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잘할 수 있는 분야 안에서 혁신하는 것
 
TV 예능 프로그램을 만드는 이들은 끊임없이 당대의 조류를 놓치지 않으려 노력한다. 뒤쳐지면 안 된다는 강박이 여타 다른 장르에 비해 더 극심한 장르 아닌가. 다른 프로그램들의 성공이나 전반적인 예능 트렌드의 흐름을 기민하게 읽는 이들은 빠른 속도로 그 트렌드를 쫓는다. <나는 가수다>에서 영감을 받은 <불후의 명곡 - 전설을 노래하다>와 JTBC <히든싱어>, tvN <더 지니어스> 시리즈의 자장 아래 있는 JTBC <코드>, JTBC <썰전>의 영향력이 명백한 TV조선 <강적들>, MBC <우리들의 일밤 - 애니멀즈>가 쓰러진 자리에서 출발하는 JTBC <마리와 나>와 채널A <개밥 주는 남자>까지. 나영석은 이러한 조류에서 한 발쯤은 떨어져 있다. 나영석이 만드는 새 프로그램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은 다른 누구의 프로그램도 아닌 자기 자신의 직전 프로그램이다. 트렌드가 어떻게 흘러가느냐와 무관하게, 본인이 가장 잘 다룰 줄 알고 애착을 가지고 집중할 수 있는 ‘인간의 내면’에 꾸준히 집중했으니 말이다.
 
물론 인간의 내면에도 여러가지 표정이 있다. 그리고 오늘날 대부분의 예능은 그 다양한 표정들 중 한 두가지에 방점을 찍어 그 부분에 콘트라스트를 주는 것으로 승부를 건다. 욕망과 경쟁심(tvN <더 지니어스>, JTBC <크라임씬>, <코드>), 간절함(<슈퍼스타K>, <K팝스타>, 낯섦과 두려움(MBC <우리들의 일밤 - 진짜 사나이>, SBS <정글의 법칙>), 세대간의 교감(MBC <우리들의 일밤 - 아빠, 어디 가?>, KBS <슈퍼선데이 - 슈퍼맨이 돌아왔다>). 하지만 나영석의 예능은 그렇게 특정한 카테고리의 감정을 따로 떼어내 방점을 찍지 않는다. 앞서 거푸 지적했던 것처럼, 나영석은 예상하지 못한 상황 속으로 사람을 던져 넣되 나지막이 나누는 멤버들의 대화나 크게 중요할 것 없는 농담 따먹기 뒤에 숨겨진 깊은 속내에 주목한다.
 


남의 싸움에 흔들리지 말고
고집스레 자기 싸움을 살아라
 
수많은 자기계발서나 실용서는 자꾸만 낯선 영역으로 뛰어들 것을 독자에게 권유한다. 블루 오션을 개척하라. 새로운 먹거리를 찾아내라. 치열해지는 경쟁 시장 안에 거침없이 뛰어들어라. 익숙한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시대에 뒤쳐져선 안 되고 경쟁에서 패배해선 안 된다는 강박을 파는 것이다. 그러나 꼭 남들이 열심히 매진하고 있는 경쟁이라고 해서 반드시 나까지 덩달아 무리해서 그 경쟁에 참여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자신이 잘 알고 있어서 주도권을 잡을 수 있는 영역이 확고하게 존재한다면, 그 영역 안에서 혁신을 거듭해가며 자신을 갈고 닦는 것으로 자기 싸움을 하는 것이 나을 때가 있다.
 
리얼 버라이어티의 시대에 잠시 주춤했던 신동엽은 무리해서 리얼 버라이어티들에 도전했지만, 그 시도는 죄다 실패로 끝났다. 그에게 과거의 명성을 되찾아준 것은 자신이 제일 잘 할 줄 아는 토크쇼와 콩트 코미디였다. 복귀 이후 한동안 감을 못 잡고 헤매던 강호동에게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프로그램은 육체 능력의 기량을 겨루는 KBS <우리동네 예체능>이다. 승부가 지배하던 세계에서 씨름선수로 살던 그는, 자신이 가장 잘 아는 세계로 돌아가서 우위를 잡았다. 그리고 나영석은 꾸준히 자신이 잘 할 줄 아는 예능, 한없이 일상에 가까운 예능을 고집함으로써 PD로선 16년만에 '백상예술대상' 대상을 거머쥐었다. 이것은, 남의 싸움에 흔들리는 게 아니라 고집스레 자기 싸움을 살아낸 사람, 스스로 ‘아날로그형 인간’이라 말하며 굳이 등 떠밀려 변화하는 대신 자기 중심을 지켜온 사람이 거둔 성취에 대한 작은 헌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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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싸움에 휩쓸려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싸움을 고집스레 해온 사람이 거둔 성취.
<제51회 백상예술대상 시상식> ⓒJTBC.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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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승한(TV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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