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와치 손목시계를 만드는 SMH 그룹의 니콜라스 하이에크는 자동차 시장에도 작고 스타일리시한 자동차를 원하는 이들이 있을 거라 믿었다. 마치 손목시계 시장에서 스와치가 그랬던 것처럼. 그는 다임러 그룹과 손잡고 ‘스마트’ 라는 이름의 자동차 브랜드를 런칭한 뒤 1998년 첫 작품인 2인승 쿠페 ‘시티 카(City Car)’를 유럽 시장에 판매하기 시작했다. 시장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지만, 뒷좌석이 없는 자동차는 어딘가 부족하단 생각을 떨칠 수 없었던 회사는 생산라인을 확장해 2004년 4인승 자동차 ‘포포(forfour)’를 시장에 발표했다. 결과는 처참했다. 2003년부터 2006년까지 스마트는 40억 유로의 손해를 봤다. 회사는 서둘러 포포의 생산라인을 접고(이때의 실수를 만회할 2세대 포포는 2014년에야 나올 수 있었다.) 다인승 SUV ‘포모어(formore)’의 생산계획도 백지화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잘 팔리던 2인승 자동차로 다시 승부를 봐야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스마트 포투. 그 자체로 스타일리시한 자동차이지만, 뒷좌석이 없다는 점을 결격사유로 여긴 이들도 많았다.
하지만 작고 예쁘다는 이유로 2인승 자동차를 구매할 만한 사람들은 이미 다 스마트 시티 카를 구매한 후였다. 여기서 더 성장하기 위해선 뒷좌석이 없는 것을 결격사유로 여기는 사람들을 설득해야 하는 상황. SMH 그룹과의 연계를 끊고 완전히 다임러 그룹 소속이 된 스마트는 2006년 ‘포투(fortwo)’라는 이름으로 개명된 2세대 시티 카를 시장에 발표하며 희한한 광고를 한 편 만들었다. 갱스터 영화, 공포영화, 액션영화 등에서 잘라낸 클립들을 편집해 만든 이 광고는, 유머러스한 배경음악과 함께 자동차 뒷좌석에서 운전자를 노리는 암살자나 연쇄살인마들의 모습을 쉬지 않고 보여줬다. 그리곤 이 한 줄의 카피가 화면을 장식한다. “No backseat. Smart fortwo.” 물론 우스꽝스러운 농담에 가까운 광고였지만, 뒷좌석이 없는 것을 단점으로 보던 소비자들에게 꼭 그렇게 볼 일만도 아니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태도는 일품이었다. “우리 차는 뒷좌석이 없으니 이런 흉한 일을 당할 일도 없을 겁니다.”라고 뻔뻔스레 말하는 이 광고는, 수많은 나라에서 방영금지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2007년 칸 국제광고제에서 은사자상을 수상하며 많은 이들의 머릿 속에 스마트 포투를 각인시켰다.
‘약점’이 아닌 ‘고유한 특징’으로의 발상 전환
여기 비슷한 예가 하나 더 있다. 제 몸 하나 누일 공간이 없던 가난한 연극배우는 비싼 주거용 공간을 빌릴 돈이 없어 낡은 상가의 좁고 작은 점포를 하나 빌려 테이크아웃 커피 전문점을 하나 냈다. 마치 옛날 “점빵”들이 그랬던 것처럼 주거와 생계를 겸하는 공간이었던 셈이다. 가게 안에 테이블을 놓을 수가 없을 만큼 좁아서, 날이 맑을 때만 간신히 길 위에 테이블 하나와 스툴 몇 개를 내놓는 것이 고작인 점포였다. 어차피 앉을 공간도 마땅치 않은 가게, 사장은 가게 이름을 아예 ‘스탠딩 커피’로 지어버렸다. 그런데 아무 미사여구 없이 ‘서서 마시는 커피’라고 선언해버리고, 사장이 직접 한 투박한 인테리어도 고스란히 노출하는 태도가 오히려 ‘힙’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여기에 썩 근사한 커피 맛과 특제 레모네이드, 최대한 깔끔한 인상으로 손님을 맞이하는 직원들이 더해지며 스탠딩커피는 이태원 경리단길의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다.
사람들은 흔히 세간의 기준으로 약점이라 여겨지는 것을 애써 감추거나 어떻게든 보완하려 애쓴다. 시장에서 살아남으려면 남들보다 앞서가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남들과 대등한 조건에서 경쟁을 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약점처럼 보이는 것이 때론 약점이 아니라 고유의 특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한 탓이다. 뒷좌석이 없는 것은 단점이 아니라 원래부터 포투가 지니고 있던 고유한 특징이었고, 스탠딩커피는 ‘서서’ 커피를 마시는 공간임을 선언하는 것으로 앉을 자리가 없다는 단점을 특징으로 만들어냈다. 괜히 다른 이들과 조건을 맞춰 같은 카테고리 안에서 경쟁하기 위해 무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특징을 선언해 무기로 삼음으로써 자신이 주도할 수 있는 경쟁을 한 사례들이다.
결격사유가 넘치는 토크쇼가 아니라,
잃을 게 없어서 못 물을 것도 없는 토크쇼
대중문화에서도 이와 같은 사례들을 찾아볼 수 있다. 본디 콩트 프로그램이었던 MBC <황금어장>에서 선보인 ‘무릎팍 도사’ 콩트가 토크쇼의 포맷으로 성장해 <황금어장>의 중심 코너가 되는 동안, 나머지 분량은 여전히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그 자리를 채우기 위해 등장한 코너 ‘라디오스타’의 초반은 실로 암울했다. 지상파 출연을 늘리는 중이긴 했으나 아직까지 비호감 이미지를 다 벗지 못하고 있던 김구라, <황금어장>의 개국공신이었지만 자신이 참여한 코너들이 줄줄이 망하는 걸 지켜본 신정환, 그리고 하필이면 <황금어장>의 ‘흑역사’라 불리는 ‘무월관’ 코너로 프로그램에 합류했던 윤종신까지. 아무도 이 조합으로 만든 코너가 오래 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당장 MC 신정환부터 첫 방송에서 “이 코너가 두 달은 버텨줬으면 좋겠다”고 대놓고 이야기했고, 첫 게스트로 나온 정형돈은 게스트의 말을 차분하게 듣는 게 아니라 서로 멘트를 하겠다고 아귀다툼을 하는 세 MC를 보다가 “여기가 토크쇼의 막장이냐”고 되물었다.
“<황금어장>에서 섭외한다고 해서 ‘무릎팍 도사’인 줄 알고 나왔다가 얼결에 ‘라디오스타’의 첫 게스트가 됐다”고 말한 정형돈. 아마 많은 이들이 정형돈처럼 이 코너가 단명할 거라 생각했으리라.
<황금어장 - 라디오스타> 문화방송. 2007-2016
선뜻 호감이 가지 않는 MC들의 조합, 서로 웃기려고 끼어드느라 사운드가 한도 끝도 없이 물리는 막장 진행, 주어진 질문도 다 소화하지 못하는 기괴한 토크쇼. 게다가 ‘무릎팍 도사’에서 거물급 게스트를 모시기라도 하면 안 그래도 10분에서 20분 가량 방송되던 코너가 ‘무릎팍 도사’에 자리를 내주느라 5분으로 뚝 끊겨 2회에 걸쳐 방영되는 일도 종종 생겼다. 그러나 ‘라디오스타’는 그 점을 무기로 삼았다. ‘근본 없는 쇼’라는 이미지가 생긴 덕분에, 다른 토크쇼에선 차마 던질 수 없는 독하고 날 선 질문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오갈 수 있는 쇼라는 특유의 색깔을 가질 수 있게 됐다. 실제로 5분 밖에 방송이 안 된 회차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의도적으로 꾸준히 ‘5분 방송’을 언급한 덕분에 ‘어차피 더 잃을 것도 없는 언더독’이라는 이미지를 구축할 수 있었다. <라디오스타>의 독특한 색깔은 이렇게 기존 토크쇼의 기준으로 보면 결격사유일 만한 지점들에서 출발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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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한(TV 칼럼니스트)
TV를 보고 글을 썼습니다. 한때 '땡땡'이란 이름으로 <채널예스>에서 첫 칼럼인 '땡땡의 요주의 인물'을 연재했고, <텐아시아>와 <한겨레>, <시사인> 등에 글을 썼습니다. 고향에 돌아오니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