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창감客窓感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행 과정에서 무의식적으로 표출되는 정서적 낯설음을 의미합니다. 가령 이런 것이 아닐까요? 유럽 여행을 가면 참 많이 걷게 됩니다. 호젓하게 혼자입니다. 파리 노트르담대성당을 지나 해찰하며 센강을 건넙니다. 해가 지고 있습니다. 문득 걸음을 멈춥니다. 오래된 건물 창문에서 노란 불빛이 흘러나옵니다. 귓가에는 거리의 악사들이 연주하는 아코디언 소리가 들립니다. 선뜻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무엇인가 막혀 있던 감정의 물꼬가 터진 것 같습니다. 목젖이 내려앉습니다. 두고 온 서울 집에 대한 그리움, 그 사람 생각, 심지어는 어머니의 도마 소리까지 환청으로 들려옵니다. 그 간질거리는 재채기 같은 애수, ‘난 왜 여기에 서 있지?’ 하는 낯선 이질감. 낭만적이지만 때로는 대책 없는 이런 감정을 여행지에서 느껴보았을 것입니다. 사유하는 느린 여행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입니다.
기행은 말이지요, 어떤 새롭고 신기한 것을 좇는 과정입니다. 내가 살던 곳과는 다른 세계이기에 문화적 거리감이 느껴집니다. 호기심이 가득 고이지요. 기묘한 감정이 문득문득 올라오기에 힘들면서도 행복합니다. 이런 낯선 감정을 정리하는 것, 그 공간의 냄새까지 기억하며 샅샅이 파고드는 것이 여행기를 쓰는 사람들의 ‘들추기’일 것입니다.
이 책은 제가 2년간 파리를 드나들며 기록한 ‘파리를 향한 오마주’ 혹은 ‘파리 감성 상자’입니다. 그렇다고 달콤한 예찬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술적 사유와 관찰과 사랑으로 들여다보니 도시의 아픈 구석도 들추게 되고 불편한 말도 하게 됩니다. 파리에 대한, 아니 프랑스에 대한 제 애착은 멀리 거슬러 올라갑니다. 와인 공부를 시작하던 2000년부터 시작되었으니 말이지요. 흙먼지 폴폴 날리는 밭고랑을 누비다보니 한 나라가 제 몸 속으로 쑤욱 들어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습자지처럼 스며들었던 문화적 은유가 고였습니다.
이 책에는 프랑스 현지인들에게 직접 듣고 체득한 이야기도 있고, 어느 책 모퉁이에서 읽은 부분도 있으며, 마음속에서 울컥울컥 눈물처럼 솟구친 나르시스적 감상도 있습니다. 예술적 감성으로 내 안에 터널을 내듯, 카메라를 들고 도시를 두 발로 누비다보니 사유가 사랑으로 피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미식과 요리 공부, 멋, 사진, 여행까지 몸에서 쏟아져 나오는 대로 썼습니다. 그 과정에서 ‘빈’이라는 한 소녀의 요리사 되기 분투기도 온기로 작동합니다. 파리를 동경하는 사람들을 위해 현지 정보도 챙겨보았습니다. 그렇게 묵히고 삭힌 지 3년이 지나서야 ‘파리를 맛있게 한 이유’가 세상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자못 뭉클합니다. 그런데 왜 하고 많은 단어 중에 흔하디 흔해터진 ‘사랑’이냐고요? 사랑은 혁명이라는 단어보다도 더 강력하게 인간을 움직이는 기제라고 여겼습니다. 미식에 대한, 자식에 대한, 요리에 대한, 사진에 대한, 여행에 대한 포괄적 흔들림이 사랑에서 출발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처음에는 ‘파리의 맛’에만 집중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머물수록 지금의 파리는 맛과 관련하여 자신만의 정체성이 모호하다고 여겨졌습니다. 지구촌 다양한 음식들이 자리를 잡고 있으면서 하나의 거대한 음식의 제국처럼 변했지요. 물론 명성을 지켜가는 레스토랑도 있지만, 딱히 이것이 파리의 음식이라고 표현할 방법이 모호해졌습니다. 아직도 파리에 가야 캐비어, 푸아그라, 에스카르고, 트뤼플을 맛볼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파리라는 상징성입니다. 당신은 왜 파리에 가고 싶어 하고, 요리를 공부하고 싶어 하고, 맛보고 싶어 하고, 거기서만은 자유롭고 싶은지를 책 속에서 찾아보면 어떨까요?
파리에 대한 저의 사랑은 크게 세 가지로 변주되어 있습니다. 그 첫째 이야기는 당초 의도한 대로 파리 미식에 대한 호기심을 담은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미식가의 파리 맛 탐색을 만날 수 있습니다. 바게트에서 미슐랭 가이드 스타 레스토랑까지 제가 직접 맛보고 꼭 쓰고 싶은 곳만 썼습니다. 맛에 대한 이야기는 주관성이 강합니다. 그래서 행여 강요로 비칠까 봐 음식을 놓고 이런저런 말을 많이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대신 분위기와 배경을 그리는 데 초점을 두었습니다.
언어 문제는 늘 난관이라 파리에서 메뉴판 읽기는 등에서 땀이 날 정도로 곤혹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찬찬히 자꾸 들여다보니 몇몇 단어가 눈에 들어오고, 순서가 보이며, 어떤 방식으로 조리했을지 힌트가 잡히더군요. 덧붙이자면 제가 추천한 것이 아니더라도 파리에서만 먹어볼 수 있는 새로운 맛에 도전해보자고 부추겨봅니다. 그러면서 음식에 담겨 있는 인문학적 사유까지 살짝 알고 진입한다면 미식 여행의 참 의미를 느끼시게 될 것입니다.
알토란 정보도 있습니다. 파리에서 10년 이상 산 한국인 파리지엔느와 파리지엔에게 숨겨놓고 다니는 맛집 리스트를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번역 전문가인 박은진 씨와 와인 전문가인 김성중 씨가 소개한 쏠쏠한 정보를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두 분 고맙습니다.
둘째 이야기는 요리사 빈(본명 최수빈)의 프랑스 부엌 쟁투기입니다. 지금 한국은 그야말로 스타 요리사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그만큼 요리 공부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습니다. 책에서 자주 ‘그녀’라고 부르는 빈은 요리사가 되기 위해 2010년에 프랑스로 건너갔습니다. 요리 학교를 마치고 지금은 미슐랭 가이드 스타 레스토랑에서 정식 직원으로 근무 중입니다. 책을 내는 이 시점 그녀는 레스토랑에서 갸르드망제 셰프드파티Garde manger Chef de Partie, 즉 차가운 요리 담당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미식의 텃밭 프랑스에서는 어떻게 요리사를 길러내는지 그 속사포 같은 비밀 이야기가 궁금하실 것입니다.
어느 날 스무 살 소녀가 제 홀로 트렁크 두 개를 들고 리옹의 생텍쥐베리공항에 내리는 데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 곳에서 어학연수를 하며 좌충우돌 어려움을 겪지요. 이후 그녀는 파리로 이동하여 르코르동블뢰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요리 수업을 받았습니다. 레스토랑에 근무하기까지 일과 비자, 어학 문제 등 모든 과정을 다루었습니다. 주방에서 겪은 실수담도 있고요. 복장 터지는 인간관계, 그 속에서 흔들리는 모습, 살아내기 위해 처리해야 하는 다소 복잡한 서류 등 곁에서 안타깝게 지켜본 것을 짚어보았습니다.
마침 비자 때문에 한국에 들어온 그녀를 인터뷰할 기회를 얻은 것은 다행입니다. 전달하는 과정에서 오류는 없을지 염려됩니다. 빈의 이야기가 프랑스에서 요리 공부를 하려는 분들에게 용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왜 프랑스가 미식의 나라인지, 이 도시는 맛을 끌어내는 요리사를 어떻게 길러내는지, 그 지층 깊숙이 들어가보려 했습니다. 직업으로 요리를 한다는 것은 단단한 각오가 필요합니다. 세상에 쉬운 일은 없지만, 요리사 역시 고단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희생하며 살아가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이야기에서는 자유로운 영혼 ‘사진가 손현주’의 카메라를 따라갑니다. 카메라를 들고 파리를 두 발로 구석구석 누볐습니다.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사진가라고 할 정도로 사진에 대한 열기가 뜨겁고 좋은 카메라들도 넘칩니다. 하지만 사진적인 시선을 지니고 있는 작가는 무작정 걷는 파리 거리에서 무엇을 색다르게 보고 느끼며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는지 살펴봅시다. 사진을 모두 보고 나면 파리에 무척 가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지금의 파리는 조금 위험합니다. 덩치 큰 카메라를 멘 여행자는 늘 경계를 늦추면 안 되고요. 그런 것이 불편해서 한동안 파리에 가고 싶지 않은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파리는 한 계절만 지나면 통속 소설처럼 가슴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에펠탑이며 몽마르트 등 가장 흔하고 회피하고 싶은 것들부터 말이지요.
뚝딱 하면 책 한 권 나오는 시대에 좀 망설이며 숙성시킨 책입니다. 오랫동안 떠남과 자유를 꿈꾸어왔거나, 요리사를 꿈꾸거나, 미식의 낭만 미학을 추구해온 분들께 머리맡에서 곰삭아 책장이 너덜너덜해지도록 간직되어지는 콤콤한 책이 되면 좋겠습니다. 오래 기다려준 출판사와 글쓰기에 집중하도록 배려해준 가족들에게 감사의 윙크를 보냅니다.
안면도 소무펜션 동쪽 골방에서
손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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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파리를 맛있게 했다 손현주 저 | 앨리스
이 책은 전직 신문사 기자 출신으로, 음식과 와인 칼럼니스트이자 사진가로도 활동하고 있는 손현주가 지난 2년간 이 도시를 드나들며 그 사랑을 기록한 “파리 오마주”이자 “파리 감성 상자”다. 파리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와인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한 15년 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흙먼지 폴폴 이는 포도원 고랑을 돌아다녔고, 그 주인들과 잔을 기울였으며, 주머니 여유만큼 와인 가게를 서성거렸다. 그러면서 파리라는 공간은 조금씩 그녀에게 스며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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