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영, 김병수 “불안은 불안이고 내 삶은 내 삶”
‘나만 아픈 게 아니다’, 그걸 알았기 때문에 책을 쓸 수 있었어요. 자기 몸이 아프면 되게 서럽잖아요. 내가 당신들의 아픔을 대신할 수는 없지만, 나도 아팠기 때문에 그 마음을 안다. 그냥 이 책을 읽는 분들에게는 당신만 아픈 게 아니라는 걸, 이야기해주고 싶었어요.
글ㆍ사진 엄지혜
2015.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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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겪은 김동영 작가와 그의 주치의로서 7년간 진료를 해온 김병수 서울아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두 사람이 환자와 주치의로서 진료실에서 나누지 못한 이야기를 『당신이라는 안정제』에 털어놓았다. 김동영 작가가 한 편의 글을 쓰면, 그 글에 대한 답변을 김병수 교수가 다는 형식이었다. 작가는 속내를 그대로 드러냈고, 교수는 ‘환자 대 주치의’의 관계를 뛰어넘어 한 개인으로 작가를 바라봤다. ‘근사한 병’이라는 제목을 단 작가의 글에 교수는 ‘용기는 두려움으로부터’라는 답글을 썼고, ‘미안해, 내가 이런 사람이라서’라는 글에는 ‘당신이 필요하다는 고백’이라고 답했다. 진료실에서 교수는 작가에게 질문만 했고, 작가는 대답만 했다. 작가는 가끔 교수와 나누는 대화가 짜증났지만, 한 달에 한 번 혹은 2주에 한 번, 그렇게 7년을 만났다. 항상 거리감을 가져야만 했던 두 사람의 관계는 책을 쓰며, 더 이상한 관계가 됐다. 

 

환자와 의사가 공동 저자가 되다니, 참 신기한 노릇이다. 그간의 과정을 들어보았다. 심각하고 우울한 이야기만 나누지 않았다. 우리의 일상이 계속 우울할 수는 없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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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작은 불꽃이라도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

 

이런 책은 처음 봤어요. 

 

김병수 고민을 많이 했어요. 과연 이런 책을 써도 되는 건가? 생각도 했고요. 외국에 이런 사례가 있었는지 찾아보기도 했는데, 못 찾았어요. 어떻게 보면 윤리적이지 못하다고 보는 분들도 계실 거예요. 정신과의사라면 환자와 적당한 심리적 거리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하니까요. 사실 아직도 조심스럽고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어요. 그런데 동영 씨 입장에서는 작가로서 모든 약점을 다 드러냈고, 저도 정신과의사로서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것들은 지켰다고 생각해요. 

 

집필 제안은 누가 했나요?

 

김동영 원래 개인적인 아픔에 대한 책을 2부작으로 쓰고 싶었어요. 3년 전에 어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셨는데, 어머니 이야기를 먼저 쓰려고 했어요. 그런데 쓰다 보니 너무 감정이 복받쳐서 신파로 흐를 것 같더라고요. 그것보다 내 개인적인 정신적인 아픔에 대해 쓰는 게 나을 것 같았죠. 처음에는 혼자 작업을 시작했는데 힘들었어요. 어느 선까지 가야 하는 지도 모르겠고, 모든 걸 다 보여주는 것도 부담스러웠어요. 아프다는 이야기가 너무 징징대는 소리가 될까 우려도 했고요. 그 때 가수 루시드폴 형님이 마종기 선생님이 쓰신 서간집을 읽었는데, 주치의 선생님과 비슷한 형태의 책을 내보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김병수 7년 전에 병원에서 동영 씨를 처음 봤을 때, 작가인 줄 몰랐어요. 한참 후에나 알게 됐어요. 저는 책을 쓰기 시작한 게 고작 3년이 채 안 됐으니까요. 책을 한 번 써보면 어떻겠냐고 하길래, 그냥 하는 소리인 줄 알았어요. (웃음) 반신반의하면서 “뭐 기회가 되면 할 수 있죠”라고 했는데, 사람의 일이라는 게 이렇게 흘러갈 때가 있는 것 같아요. 저는 동영 씨가 훨씬 큰 용기를 냈다고 생각해요. 자기의 정신질환을 밝히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책이 나오고 인터뷰를 하면서도 제가 많이 머뭇거리고 주저했는데, 그러고 나면 동영 씨한테 미안해졌어요. 이 사람도 판단 능력이 있는 사람인데, 내 상황만 너무 고려해달라고 한 건 아닌지 해서요. 

 

그동안 진료실에서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들로 책이 채워졌습니다. 작가님은 서문에 “이것이 당신(선생님)과 내가 함께 찾아가는 내 병에 대한 또 다른 치료법으로 생각한다”고 쓰셨어요. 

 

김동영 병원에 갔을 때, 사실 큰 기대가 없었어요. 너무 힘들었으니까 약을 처방 받아야겠다고 생각 했지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눈다, 상담을 받는다는 생각은 못했어요. 언젠가 선생님이 “끝이 없는 고통은 없다”는 말을 하셨는데 그 말을 믿고 싶었어요. 

 

김병수 가끔 상담이라는 게, 무모한 도전이 아닌가 싶을 때가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건, 말이 담고 있는 진실보다는 말을 통해 전달되는 관심과 애정으로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 아주 작은 불꽃이라도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일 거예요. 

 

지금은 어떤가요?

 

김동영 요즘은 심호흡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난 아픈 사람이니까’이라는 전제 조건이 붙었는데, 이제는 그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 질려 버린 것 같아요. 예전에는 우울증이 심해지면 약을 찾던지, 사람을 찾던지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했는데 지금은 혼자 이겨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김병수 정신과에서 이런 걸 ‘탈융합’이라고 해요. 우리가 왜 고통스러워 하냐면 아픈 것과 자기 자신이랑 섞여 있어서 그래요. 상태가 좋아지면, 아픈 건 아픈 거고 나란 사람은 나로 분리가 되요. 심리치료의 궁극적인 목적 중 하나가 아픈 것과 나 자신을 분리시키는 거예요. 동영 씨한테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까 좋네요. (웃음) 진작 좀 이런 이야기를 해줬으면 얼마나 좋아요. 저는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해요. 글 쓰는 사람은 숙명적으로 불안한 부분이 커요. 베스트셀러 작가라도 현실적인 문제가 있으니까요. 내가 작가라는 직업을 선택했으면 안고 가야 하는 힘든 문제도 분명히 있는데, 그것에 너무 큰 무게를 느끼지 않고 지금처럼 편안하게 이야기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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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병을 통해 나는 글을 쓸 원동력을 얻는다. 한없이 가라앉아 바닥에 침잠해 있거나 세상에서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일은 내게 많은 것을 다른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게 한다. 그렇게 쓰여진 글들은 건강한 사람들이 써내려 간 글들보다 더 호소력이 있는지도 모른다. 마음의 고통을 아는 내가 쓴 글이 비록 어둡고 궁상스럽긴 하겠지만 누구나 공감할 만한 구석이 있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하다.” - 김동영

 

 

글로 읽으니까 오히려 명확해졌다

 

작가님은 책을 통해 ‘내 질병의 역사’를 고스란히 밝혔습니다. 털어낸 후련함도 있었겠지만 발가벗은 느낌도 들었을 것 같은데요.

 

김동영 힘들었어요. 그간 숨겨놓았던 걸 계속 확인한 느낌이랄까, 좋지 않은 기억들을 되새겨야 했으니까요. 제가 평소에 불안장애나 공황장애를 두고 ‘3불’이라고 말해요. 불쾌하고 불안하고 불편해서요. 책을 쓰면서 그 불쾌한 것들의 스위치를 다시 켜야 했으니까요. 불쾌했던 게 어찌 보면 당연한 것 같아요. 하지만 최대한 그 감정들을 미화시키지 않고 싶었어요. 저만 이런 병을 겪은 게 아니라는 전제 하에 쓰고 싶었어요. 어렸을 때는 저는 항상 아픈 아이였어요. 학교에서 가장 약한 아이, 동네 병원 의사 선생님이 이름을 외우는 아이가 바로 저예요. ‘질병의 역사’를 쓰는데, 정말 생생하게 기억이 나더라고요. 저는 아픔으로 그 시절을 기억하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학교에 너무 가기 싫어서 엉덩이에 자국이 날 정도로 변기에 앉아 있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해요. 하지만 나쁜 기억만 있는 건 아니에요. 친구들과 방구석에 모여 책이랑 앨범을 실컷 읽고 들었던 추억도 많아요.

 

솔직함의 정도라고 할까요? 굉장히 강도가 셉니다.

 

김동영 식구들한테 “이제 너는 아픈 걸로 글을 쓰냐?”는 말을 농담조로 들었어요. 책을 쓰기 시작했을 때 두 가지 고민이 있었어요. 하나는 식구들이 마음 아파하면 어떡하지?였고, 두 번째는 결혼을 못하면 어떡하지?였어요. 배우자는 어떻게든 저를 이해할 수 있겠지만 아내가 될 사람의 가족들은 다르게 생각할 수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저는 계속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이라서요. 조금 건방지게 느껴질 수 있지만, 에세이는 무조건 솔직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솔직하지 않으면 소설로 가야 하는데, 거짓말을 잘하면 소설가로 칭찬을 받겠지만. 이 책은 거리낌없이 모든 이야기를 털어 놓은 거라서요. 에세이는 솔직하면 솔직할수록 칭찬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7년 전에 공황장애라는 진단을 처음 받았다고 하셨는데요. 김병수 선생님과는 어떻게 만나게 되셨나요?

 

김동영 몸이 너무 아파서 종합검진을 받으러 병원에 갔어요. 정밀검사까지 받았는데 아무런 이상이 없었어요. 식도암 같은 병조차 없었는데, 문진 작성을 하다 보니까 스트레스성 신경장애라는 진단이 나왔어요. 병원에서 스트레스센터 클리닉으로 보내더라고요. 그 곳에서 선생님을 만났어요. 

 

아무리 상대가 정신과의사라도 모든 걸 다 털어놓기가 어려웠을 텐데요.

 

김동영 그 때는 너무 절박해서, 누구라도 다 털어놨을 것 같아요. 처음에는 믿는다는 느낌보다는 검증을 해본다? 그런 느낌이 있었어요. 여태껏 웬만한 병원은 다 다녀봤으니까요. 정신과의사라고 뭐 다를까? 생각했죠. 그런데 약 처방과 상담을 통해서 어느 정도 상태가 좋아졌어요. 이야기를 하면서 선생님에 대한 신뢰가 쌓였어요. 라디오 방송작가를 하다 보니, 주변에서 소위 ‘명의’라고 불리는 선생님들을 많이 추천 받았어요. 그래도 다른 선생님에게 가볼 생각은 절대 없었어요. 다 똑같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제 이야기를 또 다른 누군가에게 또 하는 것도 싫었고요. 

 

작가님만의 가제는 「우울하다는 거짓말」이었다고요.

 

김동영 글의 폴더 이름이었어요. 출판사와 함께 지은 가제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왔고 우리는 만났다」였어요. 너무 길다고 해서 『당신이라는 안정제』로 정했는데, 중의적인 표현이 들어 있어서 좋은 것 같아요. 

 

책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선생님의 답장을 한 번도 읽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한꺼번에 답장을 읽었을 때, 어떤 느낌이 들었나요?

 

김동영 제가 생각한 방향대로 선생님도 책을 이해해주셨다고 느꼈어요. 또 환자로서는 알지 못했던 것도 많이 알게 된 것 같아요. 「입원」이라는 제 글에 선생님께서는 「입원의 의미」라는 글로 답장을 주셨는데, 저로서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이라서요. 당시 저에게는 입원이 절실했는데, 선생님은 입원을 탐탁지 않게 여긴 적도 있으셨더라고요. 퇴원할 때 마음에 뭔가를 가지고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묻기도 하셨는데, 저로서는 그 때 입원이 하나의 도피처였다는 걸 알게 됐어요. 이런 이야기가 말로 전해졌다면 기분이 나쁠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글로 읽으니까 오히려 명확해 지더라고요. 

 

비슷한 질병을 갖고 있는 분들이 작가님께 조언을 구하면, 어떤 이야기를 해주시나요?

 

김동영 치료를 받으라고 해요. 사실 제 주변에 있는 친구들의 성향은 저와 크게 다르지 않아요. 일반 직장인들처럼 출퇴근하는 삶이 아니니까요. 프리랜서니까 비교적 자유가 많은데, 그만큼 의지력도 좀 약해요. 사람들이 우울하고 불안하면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운동을 하는 게 좋다고 말하잖아요. 저나 그 친구들이나 그런 방법을 모르는 게 아니에요. 의지력이 약할 뿐이죠. “힘내”, “괜찮아질 거야”라는 말을 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저는 가끔 울면서 연남공원을 달려요. 집에 있기 너무 싫어서요. 이러다가 무너져 버리겠다, 갇히겠다 싶으면 나가서 뛰어요. 선생님이 뛰라고 했으니까 뛰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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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모든 행복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찾아오는 것이라고 믿어요. 불안하고 우울하다고 해서 행복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울해서 죽을 것 같아도 행복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우울하지 않고 불안하지 않아야만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을 만큼 우울하고 불안해도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행복해질 수 있는 기준자와 불안을 가늠하는 기준자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겹치지 않게 움직여요. - 김병수

 

 

타인의 아픔에 더 깊이 공명할 수 있다

 

단순히 주치의로서만 쓴 글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김병수 환자들이 병원까지 오게 되는 과정을 보면, 웬만큼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오는 게 아니에요. 공황을 경험한 사람들은 자신이 겪었던 그 절박한 느낌을 죽음의 순간과 비교해서 말하곤 해요. 공황을 겪게 되면 그 증상을 어떤 방식으로든 이해하고 싶은 욕구가 생기고요. 실체가 알지 못한다면 더 두려울 테니까요. 마음속 불안을 언어로 적확하게 표현할 수만 있어도 위안이 되는 거죠. 동영씨의 글이 개인에게만 의미 있는 글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어요. 저로서도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시간도 있었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개인적인 자극도 많이 받은 작업이었어요.

 

김동영 작가님이 먼저 글을 한 편을 쓰면, 김병수 선생님이 답장을 쓴 형태로 읽혔습니다. 

 

김병수 글을 쓸 때의 전제였어요. 동영 씨의 글을 보고, 생각나는 걸 제가 쓰기로 했어요. 꽤 오랜 시간 진료실에서 만났지만 제가 몰랐던 동영 씨 이야기도 많았어요. 굳이 이렇게까지 써야 하나? 너무 감상적이라는 느낌이 들었을 때도 있었고, 내가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 고민될 때도 많았어요. 도저히 공감하기 어려운 내용도 있었고,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아픔이 깊었다’는 생각도 들어 미안한 느낌도 가졌어요. 

 

“공황은 필연적인 요소와 우연적인 요소를 모두 갖는다”고 하셨는데요.

 

김병수 견고하지 않은 삶을 살아왔다면 그 대가를 필연적으로 치러내는 과정인 것이고, 규정된 삶을 성실하게 살아냈다 하더라고 피할 수 없는 사고처럼 찾아오기도 해요. 제가 가장 안타까운 건, 자신이 겪은 공황의 의미를 진지하게 사유하지 않으려는 사람을 만났을 때예요. 공황이 던져준 흔들림의 흔적을 손쉽게 덮어버리려고 하거나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안간힘을 쓰면서 숨기려고만 하는 사람을 만날 때 그렇죠. 공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실체와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려는 노력이 중요해요. 

 

그런 의미로 보면, 이 책이 김동영 작가에게는 꼭 필요한 작업이었겠습니다. 

 

김병수 공황의 진짜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기 자신밖에 없으니까요.

 

진료실에서 작가님께 가장 많이 했던 말은 무엇이었나요?

 

김병수 너무 불안에만 집착하지 말라는 이야기였던 것 같아요. 6년 전쯤인가? 동영 씨가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나요. 본인은 누군가가 자기에 대해 분석하는 걸 너무 싫어한다고요. 이해가 됐어요. 작가로서의 자존심도 있을 것이고, 약한 모습을 상대에게 보여주기 싫은 마음도 있겠죠. 하지만 의사로서 집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부분도 있었어요. 

 

글을 쓰는 사람이기 때문에 더 자신에게 집착하고 파고드는 면도 있을 텐데요.

 

김병수 예술을 하거나 창조를 열망하는 사람을 만나면 자세히 관찰하려고 애써요. 어떤 사람인지도 궁금하지만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한 호기심도 있어요. 제가 내린 결론 중 하나는 창조적인 사람은 보통 사람보다 어려움을 더 많이 겪고 그것을 더 많이 참아낸 사람이라는 거예요. 용기 없이 창조적일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내면의 끊임없는 충동을 생활 속에 표현하는 것이나 자신의 나약함을 드러내고도 그것을 부끄러이 여기지 않기 위해서도 용기는 꼭 필요할 거고요. 

 

"우울증과 조울증은 공감 능력, 현실감각, 창조성, 회복탄력성을 키워준다”고도 말씀하셨어요.

 

김병수 우울증을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타인의 아픔에 더 깊이 공명할 수 있으니까요. 우울의 경험은 시대정신을 냉철하게 읽어내는 현실감각을 유지하게 도와줘요. 마음의 고통을 이겨낸 경험은 현실의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회복탄력성이 되기도 하고요. 

 

책에서 김동영 작가님를 두고 “지시를 잘 따르지 않는 환자”라고 하셨어요. 의사가 아무리 진료를 잘해도 환자가 수용하지 못하면 도루묵인데요. 

 

김병수 이상과 현실과는 분명 차이가 있어요. 저도 의사로서 조언은 하지만, 강요하진 못해요. 좋은 방법을 이야기해주기는 하지만, 그 조언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환자들의 입장도 이해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방향으로 갔으면 좋겠다는 건데. 아무리 훌륭한 의사가 있더라도 한계는 있을 수밖에 없다는 걸 말하고 싶기도 했어요. 안 할 수 있는 이야기도 있지만 솔직하고 싶었으니까요. 당시에는 제가 한 조언들이 동영 씨에겐 유효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근래에 와서는 많이 달라졌어요. 다행스러운 일이죠.

 

주치의와 환자로 만나 이제는 저자와 저자가 됐습니다. 관계의 변화가 진료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지 않나요?

 

김병수 책 쓰기 전에 사적으로 만났던 적은 없었어요. 진료실에서만 순수하게 만나왔고, 예전에 홍대 카페에서 우연히 마주친 적은 있지만 핫도그만 하나씩 나눠 먹고 헤어졌어요. (웃음) 어떤 분은 책을 같이 냈으니까 관계가 끊어지는 게 아니냐? 동영 씨가 상태가 좋아지면 진료도 끝나는 거 아니냐?고 말씀하시는데요. 동영 씨가 완쾌되면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는 거죠. 그건 고려할 상황은 아닌 것 같고요. 인간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미묘한 변화가 있을 수 있겠지만, 책을 통해서 서로가 얻은 것도 분명히 있으니까요. 결론적으로는 좋은 게 더 많은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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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은 불안이고 내 삶은 내 삶

 

말하기는 좋아하지만 듣는 일은 힘들어 합니다. 간혹 “제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줘서 감사합니다. 그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하는 분들이 있는데요. 작가님의 경우는 어떠셨는지요? 

 

김동영 저는 어릴 적부터 많이 아파서요. 부모님한테도 아프다는 이야기를 워낙 많이 했기 때문에 “그래, 또 아프구나”라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선생님께 이야기를 하면 우선 들어주고 왜 아픈지에 대한 설명을 해주셨어요.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아픈 이유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대단한 반응이 없어서 서운했을 때도 있었어요. 위로 같은 건 없거든요. “그럴 수도 있다”면서 넘겨버리시는데, 어쩔 수 없는 부분인 것 같기도 해요. 공감을 해주기도 하지만, “제가 치료해드리겠습니다”라고 섣불리 말할 수도 없는 입장이실 테니까요. 처음에는 잘 이해가 안 갔지만 7년이라는 시간을 보내면서 서로의 스타일을 알게 됐으니까요. 선생님을 만나고 나면 약을 먹은 것처럼 편안한 느낌이랄까요? 안정감이라는 게 확실히 생기긴 했어요. 

 

김병수 비슷한 생각을 많이 했어요. 동영 씨도 나름의 기대한 반응이 있었을 텐데, 저 역시도 반응을 해주면서도 ‘원하는 반응이 이게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을 했으니까요. 저로서는 위로의 말도 조금 아껴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동영 씨는 아직 젊고 한창 생활할 시간이잖아요. 책에도 썼지만, “항상 챙겨줄게”라는 말이 마치 안정제 같은 느낌을 줄 수 있지만, 내성이 생기고 의존성도 생길 수 있어요. 모든 걸 해결해주는 건 아니기 때문에 동영 씨의 심정을 알면서도 못 채워준 부분도 있었어요. 

 

작가님은 “이제는 그것들을 이겨내려는 마음이 없다. 그저 달래면서 살고 싶을 뿐”이라며, “완치가 없는 병이기 때문”이라고 하셨어요. 

 

김동영 예전만큼 절박하지 않아요. 많이 아파 보니까 저만의 방식을 찾은 것 같아요. 스위치가 켜지면 그걸 피하는 방법을 찾았다고 할까요? 예전에는 스위치가 켜지면 약부터 찾았는데, 이제는 좀 버텨보려고 해요. 스트레스를 안 받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기분전환을 하려고 노력해요. 많이 하면 내성이 생긴가도 하잖아요. 피하기보다는 그냥 그렇게 조금 달래 보려고 해요. 우울이라는 감정이 평생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면, 그냥 뭐 같이 살아가는 거죠. 예전만큼은 아니길 바라면서요. 

 

김병수 이런 이야기를 듣고 싶었어요. 어차피 불안은 완전히 사라지는 게 아니에요. 평생 있다가도 사라지고, 없다가도 생겨요. 사람이 불안에 너무 집중하면 아무 것도 못해요. 불안은 불안이고 내 삶은 내 삶인 거예요. 어떤 독자가 이 책을 읽고 “불안과 행복이 공존할 수 있는 걸 보여준다”고 쓴 리뷰를 봤어요. 맞아요. 대부분 사람들은 이 두 감정이 공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요 몇 주간 우리는 진료실에서 만나지 않았어요. 동영 씨의 상태가 나쁘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계속 편안하리라는 보장도 없어요.

 

선생님께서는 ‘고통 총량의 법칙’이라는 글에서 “내 고통은 다른 사람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괴로운 것이다’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너무 특별한 존재로 여기고 있거나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어하는 욕망의 삐뚤어진 표현일 수 있다”고 하셨어요. 작가님께 묻고 싶어요. 이 이야기에 동의를 하시는지. 

 

김동영 자기 자신을 조금 특별하다고 생각하면 안 되나요? (웃음)

 

김병수 사람은 누구나 어느 정도 자기 자신을 특별하다고 생각해요. 요즘은 허세나 자뻑이 필요한 세상이기도 하고요.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고통에 있어서도 이렇게 해석될 수 있다는 점이었어요. 내 고통을 너무 특별하게 여기면, 나만 아프고 그 누구도 내 고통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

 

김동영 맞아요. 한편으로는 내 고통을 특별하다고 느끼지만, 비슷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을 만날 때는 되게 반가워요. 내가 공황장애를 겪고 있는데 나랑 같은 증세를 갖고 있어 같은 약을 먹고 있는 사람을 만날 때, 고통이 나눠진다고 할까요? ‘나만 아픈 게 아니구나’를 객관적으로 확인하게 되는 순간, 고통이 덜어지는 느낌이 있어요. 

 

김병수 자신의 고통이 다른 사람에게도 있는 공통적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같은 배를 타고 있다’는 안도감을 느끼는 것을 정신과 치료에서는 ‘보편성’이라고 부릅니다. 아마 많은 분이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심리적 문제나 괴로움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자기 이야기를 나누고, 중간에 있는 치료자가 대화 과정을 조율해나가는 모습을 보셨을 거예요. 집단으로 모여 상담하는 과정이 치료적인 효과를 나타내는 것도 내면에서 보편성을 촉진시키기 때문이에요. “누구나 아플 수 있고 나름의 고통이 있다.” 책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이기도 했어요.

 

용기를 내지 않았더라면 이 책이 나올 수 없었을 텐데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책이기 때문에 더 용기를 내셨을 것 같아요. 

 

김동영 ‘나만 아픈 게 아니다’, 그걸 알았기 때문에 책을 쓸 수 있었어요. 자기 몸이 아프면 되게 서럽잖아요. 내가 당신들의 아픔을 대신할 수는 없지만, 나도 아팠기 때문에 그 마음을 안다. 그냥 이 책을 읽는 분들에게는 당신만 아픈 게 아니라는 걸, 이야기해주고 싶었어요. 

 

김병수 의사로서 진료를 하면서 하고 싶었지만 못한 이야기가 많았어요. 환자로서는 그 때 상황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언도 있었으니까요. 아마 동영 씨 한 사람을 향한 글이라면 책을 낼 이유가 없었을 거예요. 의사가 조언하듯이 각을 잡고 이야기하고 싶진 않았기 때문에 제 이야기를 배제하지 않았고요. 동영 씨 말대로 새로운 치료법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당신이라는 안정제』의 ‘당신’이 두 분께는 무엇을 의미하나요?

 

김동영 제가 만났던 여자친구들과의 기억이요. 제가 떠나 보내기도 했고 떠나기도 했는데, 좋았던 기억들이 많아요. 그 기억들로 안심이 되는 것 같아요. 나도 이렇게 행복했던 시간이 있었으니까,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았던 기억들이 있으니까요. 상대가 지금은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었더라도 우리의 추억은 사라지는 게 아니니까요.

 

김병수 결국 사람인 것 같아요. 세상에 아무리 좋은 게 넘쳐나도 결국 사람이 해결할 수밖에 없어요. 동영 씨가 말한 여자친구와의 기억도 사람이 남겨 놓은 기억이니까요. 그 힘으로 살아낼 수 있는 거고요.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했으면 해요. 서로가 서로에게 ‘당신’이지 않을까 싶어요. 고통을 나누고 도움도 받기도 하는 존재로, 서로를 확인 받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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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라는 안정제김동영,김병수 공저 | 달
이 책 『당신이라는 안정제』는 환자와 그 환자의 주치의가 공동으로 집필했지만 절대 조울증이나 불안장애 그리고 공황장애를 다룬 의학도서로 봐서는 안 된다. 그저 서로 다른 시각으로 그것을 바라보는 일기 정도가 어울릴 것이다. 그들이 진료실에서는 차마 드러내지 못했던 진솔한 속내를 서로 마주하면서 찾아가는, 새로운 치료법이라고 보는 것이 좀더 정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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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영 #김병수 #당신이라는 안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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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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