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심은 바로 그다음. ‘지난번 1주일의 취재로는 충분하지 못했을 테니 몇 개월 이상, 아니 가능하면 1년 정도 현대카드를 가까이서 관찰한 뒤 책을 써줬으면 좋겠다’는 제안이 주된 내용이었다. 마지막 문장을 읽고 나서는 나도 모르게 작은 탄성이 새어나왔다.
“아무런 제약을 두지 않는 특별 출입증을 드리겠습니다. 수익을 포함한 모든 대외비 자료까지 다 들여다보십시오. 1년 후 세상에 공개될 극비 프로젝트 관련 회의도 참관이 가능합니다. 단, 제게 내용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을 때 발동할 수 있는 출판 거부권만 주십시오. 저희를 칭찬하든 비판하든 당신이 느낀 대로 솔직하게 서술하시면 됩니다.”(26~27쪽)
“이 도전적이면서도 쿨한 제안”을 한 현대카드의 ‘자신감’, 그 정체를 따라 『인사이드 현대카드』의 저자인 동시에 <아레나 옴므 플러스> 편집장 박지호를 만났다. 기밀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특별 출입증’을 든 패션지 편집장이라니, 무척이나 드라마틱한 이야기였다. 지난 11월 19일 여의도 현대카드 본사 오디토리움에서 박지호 편집장은 정태영 현대카드, 현대캐피탈 부회장을 만나 이 독특한 책 『인사이드 현대카드』와 현대카드, 정태영 부회장의 경영 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인사이트 현대카드
박지호 편집장은 먼저 정태영 부회장에게 책에 대한 걱정이 정말 없었는지, 앞으로 책을 직접 쓸 생각은 없는지 물었다.
정태영: 책 쓸 계획은 당분간 없어요. 책 쓰시는 분을 몇 분 봤는데 할 짓이 아니더라고요.(웃음) 박지호 편집장님처럼 글을 업으로 삼는 분도 1년 반 동안 고생하시는 걸 보고 웬만하면 안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고요. 사람이 욕심이 있어서 나중에 은퇴한 후에는 써봤으면 좋겠어요. 직(職)에 있을 때는 하지 못한 것들 중에 공유하고 싶은 것들이 참 많아요. 금융이든 경영이든 일상사든 워낙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재미난 경험이 많거든요. 후에 쓰려는 책이 경영서가 될지 잡서가 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일단 굉장히 안심한 게 있었어요. 이 분은 회의에 들어와도 절대 우리 회사의 사업 비밀을 알아낼 수 없다(웃음)는 거였죠. 금융사업의 비밀이 나가면 안 되잖아요? 근데 이 분은 아무리 보여줘도 알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고요. 나머지는 회사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도 있어야 책인 것이고, 그래서 별로 걱정 안 했습니다.
‘바우하우스’는 현대카드에게 중요한 의미다. 왜 하필 현대카드가 아이디어를 얻은 곳이 ‘바우하우스’였는지, 모던 아트의 테제들을 현대카드가 중요하게 여긴 이유에 대해 이어 물었다.
정태영: 잘 모르겠는데요. 바우하우스는 여러 가지 저희 인사이트 중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조금 특별해요. 바우하우스 학교가 건축, 아트를 가르치기 위해 설립했는데 나중에는 걸려있는 찻잔도, 가구도 예술 대상이라고 했어요. 예술의 외연을 넓혔다는 데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걸 저는 전체적으로 ‘표현’이라고 말하고요. 브랜딩을 얘기할 때 광고를 실체와 따로 얘기할 수 없다고 말을 해요. 예전에는 회사가 보수적이어도 광고에서는 선진적이고 크리에이티브하다며 별 얘기를 다 할 수가 있었거든요. 그러나 광고 효과라는 건 이제 그렇게 많지 않아요. 책, SNS, 블로그 등에 의해 총체적으로 노출되어 있는 세상이죠.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을 표현으로 보고 우리를 녹여나가야지 광고만 따로 분리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제 입장에서 바우하우스가 주는 인사이트가 굉장히 많았어요. 저희 회사의 광고, 브랜딩 담당하는 친구들은 무조건 바우하우스를 공부하게 합니다.
현대카드를 떠올리면 기하학적이고 모던한 느낌이 많이 있는데, 이것이 정태영 부회장이 말하는 ‘현대카드 인사이트’라는 설명이었다.
그렇다면 현대카드의 과거와 현재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경영하면서 가장 크게 변화한 것과 변함없이 지키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정태영 부회장은 규모와 집중력을 변화 요소로 꼽았다.
정태영: 일단 조직이 너무 커졌어요. 어제도 회의하면서 어떻게 하면 국내에 대한 미련을 조금 끊고 대부분의 생각을 해외에 대해 할 것인가를 얘기했는데요. 해외 직원도 너무 많아졌어요. 10년 동안 그런 것이 많이 바뀌었고요. 집중력도 많이 바뀌었죠. 예전에는 제가 다 한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요즘은 잘 모르겠어요. 제 입장에서는 엉뚱한 일도 많이 벌어져서 우리끼리 많이 싸우기도 하고 그래요.(웃음) 규모가 바뀌면 행동양식이 바뀌게 돼요. 예전엔 굉장히 빨랐는데 지금은 분명히 저희가 느려진 것도 있거든요. 옛날에는 거의 ‘원스피릿’으로 움직였다고 하면 요즘은 ‘네가 현대 맞느냐?’고 할 정도로 충돌도 있어요.
‘인사이트’, ‘스피릿’을 자주 언급하는 정태영 부회장에게 다른,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는 노하우가 있는지 물었다.
정태영: 중요한 건 강연을 다니지 말아야 해요.(웃음)
박지호: 정말 강연을 싫어하세요. 어렵게 모셨습니다. 이쯤에서 박수 한 번 부탁드립니다.(웃음)
정태영: 강연을 싫어하진 않아요. 잘난 척 하고 다녔어요. 강연에 가장 심취하는 사람이 강연하는 사람이에요. 얼마나 신나게 하겠어요. 이렇게 선한 얼굴로 대단하다고 들어주니까요. 강연을 하면 자기 믿음을 강화하게 돼요. 한 5년 전인가 절대 하면 안 되겠다 싶어서 강연을 끊었더니 상태가 굉장히 좋아졌어요.(웃음) 강연이 좋을 때도 있죠. 한두 번 할 때는 요즘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정리할 수 있으니까 좋은데요. 자꾸 하게 되면 듣는 사람보다 말하는 사람이 훨씬 자기 자랑을 하면서 생각을 강화하게 돼요. 똑같은 말을 열 번만 해보세요. 딱 거기까지예요.
다른 데서 인사이트를 받아오는 것은 제가 제일 재능 있는 부분이에요. 어디를 가도 교활할 정도로 포착을 잘하는 면이 제게는 있는 것 같은데요. 이건 그냥 재능 같아요. 그러니까 따라하지 마세요.(웃음) 굉장히 많이 읽고, 많이 가보고, 질문도 많이 던져요.
그는 다양한 친구를 사귀고 보이는 장면 뒤에 숨은 것들을 다 보려고 노력한다는 설명을 덧붙이며 그것을 사업에 접목시키는 일을 자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심지어 뇌 수술하는 장면을 보면서 리스크 관리에 대한 인사이트를 받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현대카드는 ‘인사이트 트립’이라는 제도가 있다. 10명 이내의 인원이 일주일 정도 여행을 가서 30~40군데를 돈다. 그곳을 관찰하며 치열하게 아이디어를 발견하고 제안해야 한다. 힘든 일인 만큼 인사이트 트립을 싫어하는 임원도 있다는 후문이다.
그거 느낌 좋니?
카드사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영역, 현대카드는 의외의 행보를 보여 왔다. 다양한 문화 마케팅을 진행하는 것인데 이를 통해 측정할 만한 경영적인 성과가 있었는지 물었다.
정태영: 분명히 경쟁사 분이신 것 같아요.(웃음) 직장에 계신 분들이 많으시겠지만 이걸 했을 때 경영적으로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 상사가 물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저희 회사의 강점은 뭐냐면 그런 걸 안 묻는다는 거예요. ‘그거 느낌 좋니?’해서 그렇다고 하면 되는 거예요. 다만 산만해선 안 되죠. 문화적으로 하려고 하면 할 게 얼마나 많아요? 그래서 열 개 아이디어가 있다면 여덟 개는 버리고 우리가 하는 일과 어울리는지 판단하죠. 내년 1월에 컬쳐 프로젝트로 공연 다섯 개가 있는데요. 로열티가 어떻게 되고, 어떻게 스펜딩이 올라가고, 어떻게 돈이 되는지 물어대기 시작하면 아무도 하고 싶지 않죠. 그걸 걷어내 주는 게 저희들의 작업인 것 같아요. 물론 비즈니스를 그렇게만 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굉장히 냉정한 숫자에 대한 계산과 판단이 있어야 하는데요. 모두가 숫자에 얽매이면 자유로움이 사라져서 회사가 재미가 없다고 할까, 영혼이 없어지거든요. 어떤 분은 종일 숫자만 보시지만 어떤 분은 회사 걱정을 하는지 안 하는지 ‘신나지 않겠어요?’하는 자유로운 영혼도 있어요. 그런 분도 많이 있어야 해요.
최근 큰 화제를 불러 모은 현대카드 ‘뮤직 라이브러리’. 오프라인 콘텐츠 공간인 ‘라이브러리’ 시리즈는 어떤 영감을 받아 진행하는 것일까? 이 라이브러리 프로젝트의 최종 목표는 무엇인지 물었다.
정태영: 저는 도서관을 굉장히 좋아해요. 책을 안 버려요. 그것은 내가 지적으로 쌓아온 여정의 발자취인 것이죠. 또 도서관에 앉아서 그 높은 서가를 보고 있으면 지식에 대한 위대함을 많이 느낄 수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도서관에 대해서는 건축학적으로도 굉장히 심취해있었고요. 한편 콘서트 담당하는 친구들이 허탈해서 못하겠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몇 달을 준비했는데 두 시간이면 끝나니까요. 그러면 그 자리에 계속 있는 걸 해보자고 해서 도서관 얘기를 했죠. 금융사가 무슨 도서관이냐고 접기를 몇 번 했었고요. 삼청동 굉장히 좋은 곳에 장소를 발견하고는 여기서 하려고 2년 동안 그렇게 했었나 하고 디자인 라이브러리를 만들었죠. 그 공간이 가능하다는 걸 알고 결론은 5분 안에 끝났었어요. 또 사실은 하나만 만들려고 했는데 너무 좋은 거예요.(웃음) 그래서 몇 개 더 해야겠다 싶어서 하고 있어요. 많이는 안 할 거고요.
현대카드가 추구하는 기업의 방향에 대해 묻자 정태영 부회장은 먼저 ‘위기’라고 말했다.
정태영: 미래를 논하기 전에요. 굉장히 위기예요. 가맹점 수수료가 연달아 낮아지고 있죠. 이걸 어떻게 발전시켜나가야 하는지 지금은 많이 고민 중입니다. 다만 현대카드도 외국에 나가야 한다는 건 기정사실이에요. 한 번 나가면 큰 나라로 제대로 나갔으면 하는 게 저희 생각이고요. 또 요즘 디지털에 관한 얘기를 많이 하고 있어요. 5년 안에 반금융, 반디지털로 변모시키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타 그룹과 달리 현대카드는 큰 조직임에도 불구하고 민첩하고 유연하다는 인상을 준다. 변화의 속도가 짧아지고, 변화의 폭은 넓어지는 이때 과연 현대카드는 어떻게 대응하는 걸까? 빠른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게 하는 효과적인 툴이 있는지 물었다.
정태영: 저희 회사는 top-down 방식의 회사예요. bottom-up이라고 하면 빠를 수가 없어요. 밑에서 아이디어를 만들어서 올라가는 방식보다는 위에서 하자고 하는 게 훨씬 빠르거든요. 둘 다 장단점이 있죠. 그런데 여러분이 평범한 성공을 원하신다면 bottom-up도 나쁘진 않은데요, 위대한 회사의 경우 대부분 top-down이에요. 이것은 나빠지면 아주 나빠질 수 있고 좋으면 굉장히 신속하게 좋은 결정을 빨리 내리기 때문에 좋을 수도 있거든요. 여러분이 책을 읽으면서 사례 공부를 해야 할 좋은 회사다 할 정도면 top-down이 아닌 경우를 저는 못 봤어요.
대신 임원들의 업무량이 훨씬 많죠. top-down 방식이려면 많이 알아야 하니까요. 실무 레벨, 아래 두 단계까지는 내려가야 해요. 저도 어떤 경우는 팀 단위까지 내려가거든요. 그러니까 빨라질 수 있죠. 단점은 실무자, 특히 과장, 차장, 부장 급들이 상실감을 느껴요.(웃음) 경력직에서 많이 그런데요. 다른 조직과 달리 이곳에서는 지시를 듣는 것 밖에 없는 거죠. ‘나의 존재는 뭐냐?’라고 해서 제가 ‘네 존재는 그냥 과장이다’(웃음)라고 했어요. 그것에 관한 관리가 좀 필요해요.
박지호: 임원들이 죽어라 일한다는 말씀이시죠?(웃음)
정태영: 그렇게 되어 있어요. 저는 위로 가면 갈수록 업무가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제가 제일 바빠야 해요. 바쁜 게 맞아요.
그렇다면 현대카드가 선호하는 핵심 인재는 어떤 모습인지 구체적으로 물었다. 정태영 부회장은 단번에 ‘싼 사람’이라고 농담을 했다.
정태영: 거꾸로예요. 사실 비싼 사람을 원하고요. 다른 데 갈 데 많은 사람 원하고요. 이런 질문은 대답하기가 힘들어요. 굉장히 다채로운 사람들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다양한 사람이 있어야 하는 거죠. 언론사를 보면 기획전략실장님도 기자 출신이고, 대학교의 기획전략실장님도 교수님 출신이고, 병원의 원장님부터 행정 인력이 다 의사죠. 저는 그게 굉장히 큰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이런 상황에서 이노베이션을 바랄 수 없죠. 저희 회사의 경우 주로 금융을 많이 알아야겠지만 굉장히 많은 분들이 다른 분야 전공이에요. 저도 불문과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있어야 하는 것이고요. 다만 열정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열정이 없다면 갑 속에 든 칼이지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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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드 현대카드 박지호 저 | 문학동네
금융회사답지 않은, 아니 금융회사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의 신선하고 파격적인 행보를 거듭해온 현대카드의 디자인과 마케팅, 브랜딩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여왔다. 하지만, 그것들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라는 근본적인 의문, 즉 현대카드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일하는지에 대한 조명은 상대적으로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에 이 책은 그간 현대카드의 눈부신 성과에 가려져 있던 내밀한 속살, ‘이 놀랍도록 크리에이티브하고, 집요할 정도로 디테일한 회사는 어떻게 가능했을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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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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