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영석 연대기 (1) ‘보다 더’ 만이 답은 아니다
<삼시세끼>에 대해 tvN 중역들에게 설명할 때, 중역들은 나영석에게 “시골에 내려간 멤버들이 게임을 하거나 어떤 미션을 수행하느냐”고 물었다 한다. ‘전원의 삶’이라는 본질만으론 시청자를 사로잡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글ㆍ사진 이승한(TV 칼럼니스트)
2015.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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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뭔가 조금 더 더하면 될 것 같은데.” 콘텐츠를 만들거나 기획하는 이들이 자주 하는 고민이다. 더 많은 이들에게 ‘본질’을 전달하려면 근사한 포장과 프로모션이 필요할 것 같은데 뭘 덧붙이면 좋지? 고민이 깊어질수록 제품을 묘사하는 광고 문안은 점점 화려해지고, 제품 패키지는 제품의 특장점을 묘사하는 문구들과 온갖 장식적 요소로 빼곡하게 채워진다. 그렇지 않은가? 불과 십여 년 전만 해도 휴대폰을 구매하면 포장 박스는 깨알 같은 글씨나 그래픽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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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키아 2310의 패키지 디자인


그러나 애플이 아이폰 시리즈의 패키지 디자인에서 보여준 것처럼, 때로는 곁가지를 걷어내고 본질에 집중하는 것이 더 직관적이고 설득력 있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어떠한 문구나 장식적 요소, 상세 스펙 정보도 없이 그저 휴대폰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애플은 소비자들에게 자신들이 팔고자 하는 것에 대한 설명을 끝내 버렸다. 사람들이 정보를 접하고 취사 선택하는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점차 미사여구나 장식 대신 짧은 시간 안에 본질을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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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폰 4의 패키지 디자인



본질만 남기고 나머지는 제하는 뺄셈의 흐름


꾸미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꾸밈을 자제하고 본질로 들어가는 것, 이 ‘뺄셈’의 흐름은 방송가에서도 유효했다. 지난 몇 년 사이 각종 게임 쇼와 서바이벌이 흥했던 시절을 지나, <무한도전>과 <1박 2일>이 열었던 리얼리티 예능을 거쳐, <나 혼자 산다>나 <삼시세끼>처럼 관찰 카메라를 놓고 평범한 일상을 담아내는 관찰 예능의 자리에까지 도달했으니 말이다. 이제 복고의 맥락이 아닌 이상 예능에서 ‘댄스 신고식’을 요구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고, 한때 극에 달했던 자막의 사용은 점점 줄어드는 추세다. 인위적인 요소를 걷어내는 것. 그 흐름의 맨 앞자리에 나영석이 있다.


어쩌면 전부터 예견되어 있던 일인지도 모른다. 2012년 1월 13일 새벽, 여의도 KBS 앞에 <1박 2일> 멤버들을 모은 나영석 PD는 멤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희 제작진이 요새 꽂혀 있는, 애청하는 프로그램이 하나 있어요. 최불암 선생님께서 나오시는 <한국인의 밥상>이라는 프로그램인데요.” 일체의 게임이나 여타 예능적 장치 없이, 최불암의 내레이션에만 의존해 ‘한국의 다양한 맛’이라는 본질 속으로 파고드는 교양 프로그램. 그저 다섯 멤버들을 전국 각지로 보내 다채로운 지역 음식을 맛보게 하기 위한 핑계였던 건지도 모르지만, 이 날 나영석이 <한국인의 밥상>과 함께 언급했던 프로그램이 EBS의 교양 프로그램 <극한직업>이란 사실은 훗날 그가 CJ E&M으로 옮겨간 뒤 만들 프로그램들의 형태를 암시하고 있다. 맛있는 걸 먹으며, 새로운 곳을 찾아가며, 힘들게 노동을 하는 순간 인간은 어떤 표정을 짓고 무엇을 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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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선데이> ‘1박 2일’ ⓒ한국방송. 2012



<1박 2일>에서 게임을 빼 <꽃보다 할배>를.

<꽃보다 할배>에서 여행을 빼 <삼시세끼>를.


<1박 2일>을 구성하는 요소를 거칠게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가본 적 없는) 명승지 여행 멤버들간의 복불복 게임과 레이스 향토음식 소개 멤버들간의 대화” CJ E&M으로 소속을 옮긴 나영석은 새로운 프로그램을 기획하며 “최소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 사람을 찬찬히 지켜보는 프로젝트”를 구상했다. (<시사IN> 367호 “예능의 최종 형태는 아마도 <인간극장>?” 중) 사람을 천천히 살펴보기 위해 중요한 건 속도감이나 게임이 아니다. 고민의 결과로 나온 <꽃보다 할배> 시리즈를 도식화한 공식이 “(가본 적 없는) 명승지 여행 향토음식 소개 멤버들간의 대화”인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나영석에게 기대하던 요소들에서, 빼도 되는 것을 과감하게 빼 버린 결과다. 물론 여기에도 ‘짐꾼’ 이서진에게 요리를 시킨다거나 길 안내를 시키며 짓궂게 놀리는 게임적 요소들은 남아 있지만, 나영석의 전작 <1박 2일>에 비하자면 없는 거나 다름 없었다. 덕분에 남은 시간 여행길에 오른 사람을 관찰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에 집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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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보다 할배> CJ E&M. 2013


흔히 <꽃보다 할배>에서 등장한 농담 ‘요리왕 서지니’의 연속선상에서 파생된 프로그램이라 알고 있는 <삼시세끼>도 사실 뺄셈의 흐름을 타고 기획된 작품이다. 나영석 PD에 따르면 <삼시세끼>는 제작진과 함께 휴식할 수 있는 공동 소유의 전원주택을 알아보던 것에서 출발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전원주택을 알아보던 제작진은 시골 주택도 생각보다 가격대가 높다는 사실에 놀랐고,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시골에서의 삶에 대해 궁금해 한단 사실에 두 번 놀랐다. 그렇다면 TV가 전원의 삶을 대신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이 물음에서 <삼시세끼>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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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시세끼> CJ E&M. 2014


다시 거칠게 요약한 도식으로 돌아가보자. 이 프로젝트의 본질은 시골에서 자급자족하며 살아가는 것이 어떤 리듬으로 진행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집이 위치한 마을을 한 바퀴 걷는다거나, 이웃 사람들과 친해지는 것들은 필요할지언정 기존의 요소 중 ‘여행’은 불필요한 요소다. <삼시세끼> 정선편과 어촌편을 아우르는 공식이 “음식 소개 멤버들간의 대화 일하고 밥하고 치우는 일상”인 것은 당연한 결과다. 정선 옥순봉까지, 혹은 만재도까지 오는 여정이 어땠는가는 좀처럼 화면에 담기지 않는다. 동네의 풍광을 즐기는 것도 당장의 끼니를 마련하는 것에 비하면 뒤로 밀린다. ‘비일상’의 영역에 있던 여행을 치우자, 평범하게 밥을 하고 집안일을 하는 이들의 소소한 일상과 대화가 남은 것이다.


<삼시세끼>에 대해 tvN 중역들에게 설명할 때, 중역들은 나영석에게 “시골에 내려간 멤버들이 게임을 하거나 어떤 미션을 수행하느냐”고 물었다 한다. ‘전원의 삶’이라는 본질만으론 시청자를 사로잡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치 기존의 IT 기업들이 휴대폰 패키지에 잔뜩 홍보문구나 그래픽을 가미했던 것처럼. 그러나 나영석은 사람들이 누리는 평범한 일상 자체가 ‘미션’이란 사실을 간파했기에 “그런 것 없이 그냥 남자 둘이서 시골에서 밥 해먹고 치우며 하루를 보내는 게 전부”라고 대답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모두가 아는 것처럼, <꽃보다> 시리즈와 <삼시세끼> 시리즈는 모두 케이블 TV 역사상 가장 높은 시청률을 갱신한 예능 프로그램이 되었다. 게임이나 레이싱, 여행이 예능의 본질이 아님을, 결국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예능의 본질임을 놓치지 않은 결과다.


(다음 편에서 계속)




#예능 #나영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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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한(TV 칼럼니스트)

TV를 보고 글을 썼습니다. 한때 '땡땡'이란 이름으로 <채널예스>에서 첫 칼럼인 '땡땡의 요주의 인물'을 연재했고, <텐아시아>와 <한겨레>, <시사인> 등에 글을 썼습니다. 고향에 돌아오니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