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 더 하이츠>, 낯설지 않은 이야기
뮤지컬 <인 더 하이츠>는 이미 검증이 끝난 작품이다. 2008년 브로드웨이에서 정식 오픈한 후, 그 해 토니 어워즈에서 최우수 작품상, 작곡, 작사상, 안무상, 오케스트라상 4개 부문을 수상하는 저력을 과시했다. 이듬해 그래미 어워즈에서는 최우수 뮤지컬 앨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처럼 큰 성공을 거둔 해외 라이선스 작품은 관객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무대에 오르지만, 그와 동시에 숙명 같은 과제를 떠안아야 한다. ‘과연 한국의 관객들에게도 통할 것이냐’는 의심을 불식시켜야 하는 것. 이 점에 있어서 뮤지컬 <인 더 하이츠>는 후한 점수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브로드웨이 태생의 이야기 위로 지금 이곳의 현실이 겹쳐 보이는 까닭이다.
작품의 배경은 워싱턴 하이츠.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미국 땅을 밟은 중남미 이민자들이 모여 사는 빈촌이다. 무대 위에 세워진 그들의 보금자리는, 미국 영화에 등장하곤 하는 허름한 여관처럼, 작은 방들이 빼곡하게 늘어선 낮은 키의 낡은 건물이다.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조지 워싱턴 다리는 화려한 빛을 뿜으며 주변의 초라함을 가볍게 뭉갠다.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뉴저지와 워싱턴 하이츠, 부유함과 빈곤함이 보이지 않는 경계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인 더 하이츠>의 인물들은 서로 다른 곳의 기억을 안고 워싱턴 하이츠에 정착했다.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청년 우스나비는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이민 온 부모님에 의해 미국에서 태어났고, 그를 친 손주처럼 키워온 클라우디아 할머니는 쿠바를 떠나왔다. 푸에르토리코 출신으로 택시회사 사장이 된 케빈과 카밀라 부부는 딸 니나를 스탠포드 대학생으로 키운 성공한 이민자다.
그들은 사랑을 꿈꾸고, 성공을 꿈꾸고, 고향을 꿈꾼다. 그러나 워싱턴 하이츠의 불안한 현실은 밀물처럼 희망을 밀어내기만 한다. 정전과 폭동은 애써 손에 쥔 것들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치솟는 물가는 더 이상 갈 곳 없는 이들의 등을 떠민다. 상류사회로의 진입을 눈앞에 둔 줄 알았던 니나는 등록금을 이유로 학업을 중단하기에 이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 더 하이츠>의 인물들은 다시 오늘을 살아간다. 그들이 떠나온 고향의 뜨거운 햇살이 가르쳐 준 삶의 긍정, 뉴욕의 거리에서 배운 자유의 몸짓으로 또 한 번 일어선다. 라틴 음악과 힙합, 스트릿댄스를 타고 전해지는 그 에너지는 작품에 활기를 불어넣는 동시에, 꿈틀대는 생의 의지를 형상화한다.
그곳의 풍경은 이 도시의 것
뮤지컬 <인 더 하이츠>는 복잡하지 않은 스토리와 다채로운 시각적, 음악적 요소가 어우러져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 작품이다. 랩으로 전달되는 대사는 생소한 만큼 호기심을 자극하고, 남미의 뜨거움을 간직한 음악과 춤은 객석을 달군다. 사이사이 배치해 놓은 발라드는 그 자체로 짙은 여운을 남길 뿐만 아니라, 이야기의 완급을 매끄럽게 조율한다.
이 모든 장치들은 <인 더 하이츠>에 담긴 현실의 무게를 덜어내는 역할을 한다. 새로운 삶을 찾아 익숙한 터전을 떠나온 이들과, 그들의 꿈을 너무나도 쉽게 바스러뜨리는 이야기들은 이곳에도 있다.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공부할 시간이 없다고 외치는 목소리와, 언젠가 지긋지긋한 이곳을 벗어나 화려한 세계로 날아갈 거라 말하는 청춘도 낯설지 않다.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전혀 다른 시간이 공존하는 풍경도 이 도시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 더 하이츠>의 이야기가 무겁게 느껴지지만 않는 것은, 음악과 춤이 가진 힘 덕분이다. 워싱턴 하이츠의 인물들만큼이나 다양한 개성을 가진 음악과 춤이 눈과 귀를 사로잡고, 주제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도록 관객을 구원한다.
또 한 가지, <인 더 하이츠>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캐릭터가 가진 흡입력이다. 우스나비와 바네사, 니나와 베니, 네 명의 중심인물 외에도 클라우디아 할머니, 다니엘라, 소니 등 주변인물들이 지닌 매력은 극에 활기를 더한다. 크고 작은 웃음과 잔잔하게 퍼지는 따스함을 안겨주는 그들을 보고 있노라면,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워싱턴 하이츠의 골목이 그리워질 정도. 결국 <인 더 하이츠>가 가진 마법 같은 힘은, 하찮고 시시해 보이는 삶을 기분 좋은 이야기로 기억되게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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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리
그저 우리 사는 이야기면 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