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돌이켜 보면 관계를 악화시키는 건 다툼의 순간이 아니라, 화해에 응하는 혹은 화해를 청하는 태도 때문인 경우가 많다. 누군가는 소소한 일을 곱씹는 상대방이 이해가 안 되고, 또 누군가는 사과 대신 보상을 먼저 얘기하는 상대방이 끝내 용서가 안 된다. 결국은 원하는 순간에 각자 원하는 것을 주고받지 못하는 순간, 어쩌면 지금 마지막일 수 있는 사과의 기회를 영영 놓쳐버릴 수도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결국은 제 시간, 즉 타이밍의 문제인 것이다. 영화의 주인공이자 연출을 맡은 조엘 에저튼 감독은 <더 기프트>를 통해 어쩌면 불쑥 찾아온 기회가 그 절대적 타이밍이고, 인생의 선물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곰곰이 되씹고 반추하라고 말한다.
사이먼은 겉으로 보기에 완벽해 보이는 남자다. 좋은 집, 좋은 직장, 그리고 아름다운 아내 로빈이 있다. 승진을 앞두고 있고, 친화력이 있어 새로 만난 이웃들과도 잘 지낸다. 이사한 집 근처에서 사이먼의 고등학교 동창이라는 고든과 우연히 만난 다음부터 사이먼과 로빈 사이에 고든이 불편하게 끼어들기 시작한다. 시작은 빨간 카드와 선물이다. 그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 수 없는 선물은 반갑다기 보다는 불안함을 선사한다. 그리고 고든의 친절함과 어리숙함에 호의적인 로빈과 달리 사이먼은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한다. 둘 사이에 흐르는 이상한 기류를 느낀 로빈은 두 사람 사이에 무언가가 있다고 의심하기 시작하면서 이야기는 점점 더 비밀스러운 과거로 향한다.
<더 기프트>는 막상 그 포장지를 열어보기 전에는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 수 없는 선물이라는 은유를 통해 점점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흥미진진한 스릴러이기도 하고, 시간과 기회를 고마워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인간을 조롱하는 잔혹한 우화이기도 하다. <더 기프트>의 시작은 우리가 흔히 보아오던 전형적 스릴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 충분히 예측 가능한 스토리가 이어진다. 다정해 보이는 중산층 부부가 새 집에 이사 온다. 우연히 만난 동창이라는 녀석은 무언가 미심쩍다. 여기까지는 중산층 가정에 끼어든 침입자가 등장하는 여타 스릴러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조엘 에저튼 감독은 <더 기프트>를 통해 어쩌면 내 가장 가까운 사람의 본심을 내가 정말 알고 있을까 하는 의심부터 시작해, 중산층 가정에 겉도는 기만과 허위의식, 그리고 오만함이 만들어내는 파국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겉으로는 더 없이 다정해 보이지만 비밀이 있어 보이는 부부의 모습 사이로 의심이 싹트기 시작하는 순간, 그 균열 사이로 과거의 비밀은 현재의 공포가 되어 재현된다.
깜짝 놀랄 충격과 반전, 소름끼치는 공포를 기대한 관객에게 심심해 보일 수 있지만, <더 기프트>는 우악스러운 침범과 피 한 방울 없이 곱씹어 볼수록 으스스한 느낌을 주는 영화다. 우리에겐 바즈 루어만 감독의 <위대한 개츠비>에 등장한 섹시한 백만장자로 알려진 조엘 에저튼의 첫 연출작이다. 힘을 줄 법도 한데,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주제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정교한 플롯으로 긴장감을 더한다. 게다가 반전을 만들려는 과욕을 부리지 않는 균형 감각이 돋보인다. 즉 스릴을 위해서 이야기를 희생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충분히 예측 가능할 것 같이 시작한 도입부와 달리,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이야기와 그 보다 더 복잡하고 세밀한 인물의 내면으로 치열하게 돌진하는 이야기가 예사롭지 않다. 더불어 마지막 장면에서 묵직한 메시지 하나를 던져주기 위해 켜켜이 쌓아올린 이야기들이 충분히 사유하고 반성하게 만드는 지점에 이른다는 점은 꽤 놀라운 성과라 할 수 있다.
부분의 여성관객이라면 사이먼과 고든 사이에서 심리적 갈등에 시달리는 로빈에게 마음을 실어주겠지만, 남성관객은 오롯이 맘 부쳐 응원할 대상이 없어 혼란스러울 수 있다. 파헤칠수록 점점 더 비호감 캐릭터가 되는 사이먼과 달리 고든의 행동에는 이유가 있어 이 낯선 외부의 침입자를 점점 응원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시점부터는 누구를 응원하고 누구에게 맘을 둬야하는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알 듯 말 듯 복잡한 인물 사이의 갈등 속에서 어쩌면 선인과 악인의 경계라는 것조차 무의미한 것처럼 보인다. 알 듯 말 듯 복잡한 인물 사이의 갈등이 이어지고 어느 순간 선인과 악인 사이의 경계가 무너진다. 그래서 관객들은 어느 시점부터는 누구를 응원하고 누구에게 맘을 둬야하는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충분한 기회가 있었음에도 제대로 속죄하지 못한 주인공에 대한 분노와 과거의 상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족쇄처럼 묶여 있는 또 다른 주인공에 대한 연민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것이다. 하지만 핏빛 복수극 대신, 고도의 심리전으로 당한 만큼 딱 갚아주는 방식으로 복수를 이뤄낸 주인공의 모습에서는 묘한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류승완 감독의 <베테랑>에서 복잡하게 얽혀버린 파국의 이야기, 그 시작으로 돌아가 보자. 이야기의 중심에 선 배기사(정웅인)가 바랐던 것은 금전적 보상이 아니라 진심어린 사과 한 마디였다. 적절한 타이밍에 따뜻한 말 한 마디로 사과하고, 고개를 숙여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순간은 언제나 기회처럼 찾아온다. <더 기프트> 역시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 찰나의 순간이지만 놓쳐서는 안 될 그 기회를 놓쳐버린 한 남자의 어리석음을 들여다보고 그 타이밍을 잘 잡으라는 교훈을 전한다. 청산하지 않은 과거는 다시 부메랑이 되어 현재로 돌아온다는 사실은 명백한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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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훈
늘 여행이 끝난 후 길이 시작되는 것 같다. 새롭게 시작된 길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보느라, 아주 멀리 돌아왔고 그 여행의 끝에선 또 다른 길을 발견한다. 그래서 영화, 음악, 공연, 문화예술계를 얼쩡거리는 자칭 culture bohemian.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후 씨네서울 기자,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현재는 서울문화재단에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