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한 주말 저녁이었다. 밥을 다 먹은 아이는 식탁에서 일어나 거실로 가 훌러덩 소파로 몸을 던졌다. 주섬주섬 리모콘을 들고 TV를 켠다. 한껏 릴랙스 된 나른한 표정의 아이를 보자마자 나는 반사적으로
“밥 먹자마자 누우면 소된 다. 앉아서 TV 봐.”
라는 진부한 클리쉐를 조건반사처럼 발사한다. 아이는 나를 한 번 흘낏 쳐다 보곤, 벌떡 일어나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는다. “에이씨! ”하면서 리모콘을 집어던지고 방으로 획 들어가버리지 않는 걸 보면, 아직 사춘기가 제대로 온 건 아닌 것 같아 다행이었다. 곧 나도 아이랑 낄낄 거리면서 <무한도전>을 보면서 갑자기 퍼뜩 드는 생각이 있었다.
“왜 누워서 보면 안 되지? 널럴한 주말 저녁, 아이는 한껏 편안해지고 싶었을 텐데. 소화가 안 될까봐 걱정하기에는 쇠도 씹어먹을 10대 남자 아이라는 점에서 걱정이 없고. 혹시 나의 쓸데없는 도덕관이 작동한 것 아닐까? 그저 지적질을 하고 싶었을 뿐이다. 놀 때에도 최소한의 긴장을 하라는.”
그날 따라 <무한도전>이 썩 재미가 없었으니 잡념이 끼어든 것이다. 김태호 PD는 반성해야 한다. 바로 나는 상념에 빠져들었고 여전히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언제부터 누워있는 것은 게으른 사람의 전형적 모습을 떠올리게 된 것일까.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말이 있다. 인간의 한 생애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데, 이거야말로 사람은 누운 자세로 태어나서 죽을 때에는 그 자세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 아닌가. 그렇게 보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이고 자연스러운 자세는 ‘눕다’이다. 이 누운 자세가 게으름을 포함한 부정적인 자세의 대명사가 되어 버린 것은 어떤 이유인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좁디 좁고, 어찌보면 너무 당연하게 여기던 사실같은 것에 납득할만한 반론을 해줄 만한 책이 언뜻 떠오르지 않았다. 이때 눈에 들어온 것이 『눕기의 기술』(현암사)이다. 독일의 작가 베른트 브루너(Bernd Brunner)가 쓴 책으로 그는 ‘크리스마스 트리의 탄생’, ‘곰과 인간의 역사’, ‘달의 역사’와 같이 종잡을 수 없이 다양한 소재를 끄집어내서 역사, 문화사, 인류학등을 종횡무진 씨줄날줄로 엮여서 책으로 풀어내기에 능한데 이번에는 ‘눕는다’를 주제로 삼았다.
그는 눕다를 ‘수평적 삶’이라고 정의한다. 서 있는 것은 ‘수직적 삶’이다. 지구의 중력이 당기는 힘을 거스르면서 서 있다. 인간이 인간다운 진화를 해낼 수 있었던 것은 직립 보행을 하면서 두 손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던 것이 큰 변곡점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서있고, 걷는 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에너지가 매우 많이 드는 행위이고 이 일에 에너지의 많은 부분을 소모한다.
또 직립보행을 하는 덕분에 골반은 10개월 이상 태아를 중력의 힘으로부터 지켜주지 못해서, 채 다 자라지 못한 상태에 세상으로 내보낼 수 밖에 없었고, 이로 인해 우리는 어떤 동물보다 오랜 기간 아이를 돌보고, 키운 다음에야 독립시킬 수 있는 존재가 되었고, 이를 위해 공동체를 만들고 사회가 발전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서있다는 것은 그런 면에서 인류의 발전의 시발점이고, 눕다는 처음과 끝을 말하며 전진보다 평행을, 쉼을 의미한다.
"앉아 있을 때에는 신체를 가누고 통제해야 하지만 누워있을 때에는 전혀 힘을 들일 필요가 없다. 누운 자세는 가장 원초적 자세이며 우리로 하여금 원시적 존재로서 생활방식을 떠올리게 한다. 일어서 있는 것은 계속하여 어느 정도 극기가 필요하다."
전진과 발전을 강조하는 사람에게 눕는다는 것은 그래서 못마땅한 일로 보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그런지, 어떤 일의 진행에 대한 가장 강력한 항의는 ‘드러눕는 것’이 된다. 철거를 하려는 불도저와 트럭앞에 드러눕는 반대자들의 모습도 능동적인 눕기를 통한 ‘서있는 자들’에 대한 분명한 저항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 다름아니다.
그러다보니 ‘서 있음’은 바람직하고 훌륭한 태도라는 인식이 역사적으로 만들어졌다. 군대에서 가장 먼저 제식 훈련을 통해 가르치는 것은 ‘차렷’이고, 그런 영향 속에 만들어진 우리나라의 학교에서도 초등학교 들어가면 조회를 하고, 줄과 열을 맞춰 서있는 것부터 훈련한다. 서있는 자는 말을 잘 듣는 자이고, 잘 버티는 자이며, 그만큼 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다고 순응을 잘하는 자일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저자는 야외에서 여행을 하다가 좋은 잔디밭이 있거나 그늘진 나무밑에 누우면 제일로 편안하고 릴렉스가 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잠깐 누어있으면 주변의 모든 풍경과 소리를 내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만일 그곳에서 제대로 잠을 자고 하루를 보내야 한다면 그때에는 어둠이 청각을 더 예민하게 하고, 작은 소리에도 깨어나서 깊은 잠을 자기 어렵다. 아마도 위험에 더 노출되었다는 것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노숙자들은 선잠을 잔다고 말한다. 그래서 누워있다는 것은 불안하게 만들 수 있다. 누가 짓밟고 지나갈까봐, 무방비 상태로 당할까봐 겁이 난다.
하지만 서있는 것에 힘이 많이 드는 것 만큼,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일수록 누었을 때 잘 눕고 싶다는 욕망이 생긴다. 먼저 밤에 눕는 것, 즉 침대다. 1924년 칼 윌킨스는 목공사전에 ‘침대는 완전한 휴식, 수면에 봉사하는 가구이므로 누운자세로 도달할 수 있는 최상의 휴식을 제공하도록 디자인되어야 한다. 건강과 편안함을 충족시켜야 한다’고 정의했다.
침대는 가장 중요한 집속의 집이며, 우리로 하여금 존재의 무의식적인 차원으로 퇴각할 수 있게 해주는 장소다. 누워서 하는 가장 대표적이고 오랜 행동인 수면은 점점 개인적이고 사적인 일로 변화되었고, 침대는 ‘인간의 숙고를 자극하지 않는 듯한 것’이 되었다. 오직 자기 만족을 위해서 침대는 존재할 수 있는데, 침대계의 ‘롤스로이스’라 불리는 스웨덴의 ‘헤스텐스’의 제품은 약 6만 유로에 달하기도 한다. 이런 침대의 특성을 외부로 적극적으로 드러내서 누움을 저항으 표현으로 이용한 사람이 존 레논과 오노 요코였다. 그들은 1069년 2주간 침대에서 머무르는 ‘bed-ins for peace'란 퍼포먼스로 반전과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들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는 눕다의 맥락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낮시간에 누워서 생활하는 것은 동양이 먼저다. 오스만터키의 지배자들은 궁전에서 주로 긴 매트리스로 만든 침대인 디방위에서 비스듬히 누워서 하루를 보냈다. 역사가 지그프리트 기디온은 ‘동양인의 삶의 자세는 휴식에 기반하고, 서양인은 노력에 뿌리가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에 영향을 받아들인 프랑스에서 침대와 의자의 중간 형태인 셰즈 롱그, 카우치등의 이름이 붙은 길고 푹신한 의자형태의 가구가 등장했다. 지금의 소파와 유사한 형태인데, 주로 귀족들이 사용했는데 이에 대해 도덕적 의심으로 게으름과 태만, 동양적 행동을 부추긴다는 반발이 생겼고 이는 근면한 노동자의 윤리와 어울리지 않고, 당시 급속히 퍼지던 마약사용과 연결되어 버렸다. 어느새 소파는 위험한 장소라 불리게 되었고, 독일의 예의 범절 전문가는 한 책에서 “안락의자에 반쯤 누운 채” 손님을 맞는 것을 금지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눕는 것은 자기 갈 길은 간다. 대표적으로 정신분석의 창시자인 프로이트가 적극적으로 피분석자의 무의식의 연상을 불러내기 위해 사용한 ‘카우치(couch)’를 들 수 있다. 우리가 정신분석하면 떠올리는 이미지는 카우치에 누운 사람이 뭐라고 말하면 그 뒤에 앉은 정신분석가가 받아적거나 그의 말을 듣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서로 마주보고 눈을 마주친 채, 상담을 하면 아무래도 자유연상을 하기에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보다 서로 마주보지 않은 상태에, 더 나아가서 편안하게 누워서 말을 하면 훨씬 쉽게 무의식의 내용들이 나올 것이라는 걸 발견했다. 서있거나 앉아있는 것보다 자연스럽게 긴장을 덜하고, 누워서 잠을 청할 때 같은 아주 기본적인 정신의 태도로 진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세기 중반에서 20세기 초에는 침대에 누워서 요양을 하는 휴양요법이 유행을 한 적도 있다. 뾰족한 치료법이 없는 신경증, 만성질환과 같은 병에 대해서 물 좋고 공기 좋은 요양원에서 치료진은 환자가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치료를 한다 이는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의 주인공 한스 카스트로프의 묘사에도 나온다. 여기서도 누워 있는 수평적 상태는 인간의 존재 형태로 인용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눕는다는 것은 꼭 나쁜 것, 게으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누워있지만 전혀 불안해하거나 긴장하지 않은 채 균형잡힌 자세로 미소를 띄우고 있는 석가모니의 와상(臥像)을 떠올려보라고 저자는 권하고 있다. 잘 눕는 사람은 자유로운 존재일 수 있다.
눕기는 인간의 행동 레퍼토리들 중 하나이고, 다양한 환경에서 실행할 수 있다. 이는 중요한 동작이고 다양한 의미를 갖는다. 철학자 한병철이 ‘머묾의 기술’이 필요하다 했는데, 이런 차원에서 눕기는 중요한 역할을 맡을 수 있다.
너무나 바쁜 현대 사회에서 자칫 내가 누군지, 뭘 하는지, 왜 하는지도 모른 채 그저 밀려오는 일만 처리하다가 그냥 내 존재는 휩쓸려 사라져버릴지 모른다. 이럴 때 『눕기의 기술』을 잘 이용하고 잘 쓸 줄 알면 수직을 강요한 사회에서 수평적 태도로 세상을 보면서 머물면서 부유하는 감정과 생각들을 잘 추슬러서 떠밀려가지 않고 주체적인 삶의 방향성을 잡아내는 판단과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이를 위해 『눕기의 기술』을 ‘무위의 기술, 겸손의 기술, 누림의 기술, 휴식의 기술, 사랑의 기술’들과 적절히 연결해서 구사하라고 권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누움에 대한 죄의식을 떨쳐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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눕기의 기술베른트 브루너 저/유영미 역 | 현암사
저자는 인간에게 수평 자세란 무엇인지를 알아내기 위해 역사, 철학, 문학, 과학, 인문학 등 여러 분야를 아우르며 지적인 탐색을 거듭한다. 어떤 방향으로 누워야 할지, 고대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잠자리를 마련했는지, 어떻게 누워야 잘 누웠다고 소문날지… 인류 탄생 이후부터 이어진 다양한 눕기에 대한 유쾌한 읽을거리가 가득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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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현(정신과 전문의)
어릴 때부터 무엇이든 읽는 것을 좋아했다. 덕분에 지금은 독서가인지 애장가인지 정체성이 모호해져버린 정신과 의사. 건국대 의대에서 치료하고, 가르치고, 글을 쓰며 지내고 있다. 쓴 책으로는 '심야치유식당', '도시심리학', '소통과 공감'등이 있다.
감귤
2015.10.19